2025/07/10

한반도에 강림하신 재림주님(小)

 나의 증거적 생애

한반도에 강림하신 재림주님

(주) 성화출판사

추 천 사

평소에 진심으로 존경해 오던 강현실 회장님의 회고록 출판을 축하드리며, 추천의 글을 쓸 수 있는 영광을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강현실 회장님은 참부모님께서 남하하신 뒤 처음으로 세운 제자이십니다. 참아버님께서 『원리원본』 집필을 마치시고 하나님께 “이제 믿음 깊은 제자를 보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신 날, 회장님께서 범냇골 토담집으로 찾아가 말씀을 듣고 입교하셨던 것입니다. 
이 책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강 회장님을 첫 제자로 찾아 세우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강현실 회장님은 독실한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하셨습니다. 특히 강 회장님의 선친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투옥되신 후 해방을 보지 못하고 순교의 길을 가신 분이셨습니다. 그런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신학교에 입학, 전도사로 공적인 길을 가시던 강 회장님이었기에 참부모님의 첫 제자로 부름을 받으신 뒤 수많은 고난과 박해를 이겨낼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더불어 강현실 회장님은 참부모님께서 남한에서 세우신 첫 제자이자 전도지로 파송하신 첫 전도사이셨습니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 대구에 도착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셨을 때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니 강하고 담대하게 교회를 세워라.”는 음성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 뒤 강 회장님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보다 강하고 담대하게 참부모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아담한 체구의 여성이신데도 뜻길의 최전선에서 60년 통일교회 역사의 산증인으로 살아오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회장님과 함께 역사해 오신 하나님과 참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강현실 회장님은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전국 기독교와 성당 그리고 신령한 단체들을 방문하여 이 땅에 참부모님께서 오신 것을 전하는 일을 하셨고, 1959년부터 1966년까지 서울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파고다공원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노방강의를 하셨습니다. 참부모님께서 “너의 강의가 멈추면, 전국에서 활동하는 전도의 음성이 멈춘다.”고 하셨기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목이 쉬면 손짓과 발짓으로라도 강의를 하셨다고 합니다. 말씀을 선포하고 전하는 최일선에서 살아오신 것입니다. 

참부모님께서는 늘 가장 가까운 제자로서, 산 증인으로서 강현실 회장님을 찾으셨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참부모님의 말씀선집에 강현실 회장님의 존함이 기록된 것만 해도 880단락으로 1,971회나 됩니다. 1990년대부터만 해도 1,251회나 참부모님께서 강 회장님을 찾으셨습니다. 1950년대부터 모든 말씀이 기록되었다면, 더 많은 기록이 나왔을 것입니다. 훈독회 때마다 “강현실! 강현실, 왔나?” 하고 찾으시던 참부모님의 음성이 저 또한 기억납니다. 더불어 참부모님께서 강현실 회장님께 주신 사인만 40여 회라고 하니 얼마나 남한으로 피난을 오셔서 세우신 첫 제자로서, 첫 전도사로서 강 회장님을 아끼셨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듯이 사랑과 은혜가 크면 시험도 큰 법입니다. 사실 많은 제자들이 참부모님의 사랑을 받은 뒤 시험에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강현실 회장님은 입교 후 60여 생을 변함없는 충절의 마음으로 살아오셨습니다. 참부모님 앞에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셨고, 늘 겸손한 마음으로 남한에서의 첫 제자로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언제나 참부모님 앞에서 소녀와 같이 순수한 모습이셨기에 참부모님께서도 가장 큰 사랑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참부모님께 책임을 다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뿐이라며 고개를 숙이시는 회장님을 뵐 때마다 신앙인의 참된 자세를 몸소 알려 주시는 것 같아서 존경의 마음이 샘솟곤 합니다. 
더불어 강현실 회장님께서는 참부모님께 받은 사랑을 식구들과 나누기를 즐겨 하셨습니다. 누구보다 깊은 심정을 지니고 계시기에 식구들을 만날 때면 어머니와 같이, 누이와 같이, 자매와 같이 챙겨 주시고 다독여 주시곤 하십니다. 언제나 소탈한 모습으로 격의 없이 대해 주시는 회장님이시기에 식구들은 그 사랑에 감동받곤 합니다. 
참부모님의 심정과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전해 주고자 노력하시는 회장님의 생활은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오늘에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런 회장님의 삶은 통일교회의 자랑이자 축복가정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은 강현실 회장님이 살아오신 삶의 기록으로서 한 개인의 삶이 아니라 섭리의 기록이자 증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 회장님의 개인적인 회고록이 아니라 통일교회 초창기 역사에 대한 증언이며, 남한의 첫 제자로서 살아오신 공적인 삶의 자세를 기록한 역사라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부디 많은 축복가정들이 이 책을 읽고 초창기의 고난 속에서도 하늘부모님을 걱정하시고 인류 구원의 길을 걸어오신 참부모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런 참부모님을 모시고 뜻길을 개척하셨던 강현실 회장님을 비롯한 원로 선배님들의 간절한 심정과 충절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책에는 강 회장님께서 김원필 회장님과 유효원 회장님 등 통일교회 초창기의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하셨던 많은 분들과 나눈 서신과 이야기들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서로를 걱정하고 격려하며 섭리의 현장을 지키셨던 선배님들의 심정과 사연을 통해 큰 은혜와 감동을 나누시길 바랍니다. 

천일국 원년 겨울
유 경 석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한국회장

헌정시 
한국 땅 제일 식구의 자랑을 지니고서
- 강현실 선생 회갑기념일에 
유광렬


그 높은 자랑과 
자긍심을 지켜 나오시기 
천년의 험로를 걸어내시듯
어렵기도 하셨으리이다마는,

그토록 오랜 세월을 
훌륭하게 살아오시는 데 
그 면모를 지키심의 덕도 크셨으리이다.

여인의 몸으로 
거의 한평생을 
온갖 힘이 용솟음치는 푸른 세월 동안
마른 먼지만 파삭이는 삭막한 길을 걸어 
세상 누구의 도움도 없이
곱게 곱게 하늘을 지키고 자신을 지키며
큰 상처없이 용케 걸어 나오셨습니다.
그것은 
싸움의 길이요
도의 노정이었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길이요
정성의 성단(聖壇)이었습니다.

더없이 바쁜 길에서도 
나는 몰라라 하시는 듯
차근차근 다져 걸으시는 걸음이셨지요.

대성통곡을 하며
울어야 할 자리에서도
아름답게 눈물을 번지시며,

총칼을 번득이며
싸워야 할 전쟁 마당에서도
일의 앞뒤와 그 절차를 가려서 싸워
반드시 승리로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성경과 원리와 말씀은
기본적으로 읽고 거듭 읽어서
눈 가고 손 간 자리가 장마다 표가 나 있고,

원리강의를 하실 때면
급할 것 없는 이야기꾼이
고담집(古譚集)을 읊어 나가듯 차분차분하셨고,

기도드릴 때에도 
그 중 단 한마디라도
빼어 놓고 들으셨다가는 
하나님이 큰 낭패를 만나실까봐
꼬기꼬기 싸고 또 싸
깊이깊이 간직해 두셨다가
한가하신 시간에 다시 펴놓고
구구절절 검토하셔야 할 정도로
또박또박 꼭 필요한 말씀만 사뢰곤 하시지요.

더구나 보통 사람들이 싸우는
그런 시비로 큰소리를 내는 것은 
단 한 번의 모습조차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래도 
사람이 움직이는 때는
빠짐없이 함께 나가 움직이시고,

사람 살리는 전도행사엔
매양 실천과 끈기로 앞장서시어
수많은 사람들을 건져 내셨지요.

세상에 
많은 선지자와 순교자가 흔히 그러하듯
우리들의 누님, 강현실 누님에겐,
하나님께서 
모든 호화로운 복은 유보시켜 두신 가운데
끝없는 일복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누님, 우리들의 강현실 누님은
그 하늘 뜻을 헤아리시어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만을 해오셨습니다.
한평생을 
하루 한 시간같이 끊임없이 해 나오셨습니다.

왜 내겐
이런 것은 안 주시고
힘드는 일거리만 주시느냐고 
한 번도 투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진흙을 손에 쥔
도공(陶工)의 깊은 마음에서라고 치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따님이 한없이 사랑스러우실 것입니다
따님이 한없이 자랑스러우실 것입니다
역시 일찍 둔 딸, 오직 네가 너로구나
내 뜻을 높이 받들었나니 하시며….

이렇게 
하나님의 따님이신
우리들의 누님의 갑년(甲年)을 맞이하여
오늘 이렇듯
조촐한 기념잔치를 펼친 마당에 여기 모인
믿음의 후배 모두가 한마디씩 배울 수 있다면….

이분이 일할 수 있는 동안
능히 맡겨진 일을 할 수 있도록
끝까지 건강을 허락해 주시고
이분의 모든 수고가 
하나도 헛됨이 없도록
보살펴 주옵소서, 비옵나이다.
그러나
이것 다 괜한 군소리입니다.
우리의 천 마디 만 마디의 울부짖음보다도
이분의 이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몇 배나 더 값 높은 줄 아는 이 마당에….

- 1987년 10월 12일 


 목      차 




추천사 / 3
헌정시 / 8

서  문 / 17

성장과 입교
주 예수 계신 곳 그 어디나 하늘나라 / 25
주님 자기 동산에 오셨네 / 33
눈물의 보리밭 / 82

한반도에 오신 재림주님을 증거하라
일어나 외치리라 / 115
말씀을 선포하는 생활 / 151

초교파의 최전선에서
종교 화합의 길, 초교파 / 197







세계에 말씀을 전하다
눈물 바다를 이룬 일본 / 235
세계복귀의 기반, 러시아 / 239
어거스틴과 축복결혼 / 257
미국 애틀랜타에서의 축복활동 / 266
종족메시아의 선포와 양자 입적 / 274

참부모님이 가셨던 그 길을 가리이다
참부모님이 가셨던 그 길을 가리이다 / 287


심정의 교류들 / 301

이 책을 마감하면서 / 367

서   문 





1984년 어느 날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아버님은 곤색 양복을 입으시고, 어머님은 분홍색 한복을 입으시고 면사포를 쓰신 채로 하늘 높이 떠 계셨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눈이 부실 정도로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늘에 달처럼 떠서 세계를 비추고 계셨습니다. 참부모님께서 공중에 서 계셨는데, 그 빛이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그 환상을 보고, 나는 저절로 찬송이 나왔습니다. 

  저 좋은 낙원 이르니 내 기쁨 한이 없도다 
  이 세상 추운 일기가 화창한 봄날 되도다
  영화롭다 천국이여 이 산 위에서 보오니 
  먼 바다 건너 있는 집 주 예비하신 곳일세
  그 화려하게 지은 것 영원한 내 집이로다

  청아한 음악소리는 내 귀에 들려오는데
  흰 옷 입은 무리들 천사와 노래하도다
  영화롭다 천국이여 이 산 위에서 보오니
  먼 바다 건너 있는 집 주 예비하신 곳일세
  그 화려하게 지은 것 영원한 내 집이로다
 
환상에 취해서 이 찬송을 얼마나 불렀는지 모릅니다. 참부모님께서 전 세계 인류 앞에 현현하신다는 것을 환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달이 하나이지만 세계를 다 비추는 것과 같이 참부모님께서는 세계를 비추는 참부모로서, 참진리로서 세계를 밝혀 주실 것이라는 것을 환상으로 보니 행복과 기쁨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실체적으로 이룰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요즈음 실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길을 걸어오면서 내가 의심하고 반신반의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보여 주시고 알려 주시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처음에 입교할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 나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의심을 하고 이상한 생각을 하면, 환상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초창기에 아버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뭘 그렇게 40수를 중심으로 섭리가 진행되는 것이 중요한가?’ 하는 생각을 하자마자 입에서 피가 쏟아졌던 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버님께서 기도도 안 하시고 오른손으로 턱을 탁 치셨는데, 피가 멈추었습니다. 그러니 믿지 않고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강현실은 영계가 전도한 거야.”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영계에서 나 하나를 세우기 위해 수고하시고, 아버님께서 말씀을 해 주시고 기도해 주셨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가 남한 최초의 식구이기 때문에 아버님께서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세계 인류를 놓고 말씀하시듯이 모든 정성을 다하셨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그만큼 내가 열심히 해야 된다는 것을 느낍니다. 

올해로 입교 62주년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이라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입교한 지 40주년이 되었을 때 “아버님, 저는 지난 40년 동안 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랑할 수 있는 내용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꾸며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제 본심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지금까지 신앙길을 지나왔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참으로 괴롭습니다.” 하고 아버님께 말씀드린 적도 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님께서 “2천 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것도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었어.”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26년 전 회갑연을 할 때도 “나이가 육십이 넘으니 영계에 갈 길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해 놓은 것이 없기 때문에 이제부터 다시 출발하는 마음으로 노력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아버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 전국을 순회했습니다. 일본을 거쳐서 러시아까지 오가며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지금도 내가 무엇을 했다고 내세울 것은 하나도 없고, 아버님께 받은 은혜와 식구들에게서 받은 감동만이 생각납니다. 
아버님께 받은 말씀의 은사와 감동, 감격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고 식구들에게 받은 큰 사랑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환갑을 맞았을 때 한 식구가 나에게 이불을 한 채 선물하셨습니다. 학이 백 마리 수놓아져서 덮으면 백수를 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귀한 이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이불을 20여 년 동안 덮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나에게 이불을 어떤 심정을 가지고 선물하셨을까를 생각하면, 나는 그 이불을 덮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그 이불을 덮으면 이불도 참소를 하고, 내 자신의 앞날도 편안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불을 싸서 고이 모셔 두었습니다. 
이제 그분은 성화하셨습니다. 그간 몇 번이고 내게 “그 이불을 덮으세요?”라고 물으셨는데, 그때마다 “주신 그 심정을 유린하지 않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지 못해서 못 덮고 있습니다. 이불을 덮을 자격을 갖추면 덮겠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후로 그분의 심정을 생각하여 이불을 덮었습니다.
내가 그런 마음의 자세를 가지게 된 것은 참부모님께서 늘 “큰 죄 중에 무슨 죄가 가장 크냐? 남의 심정을 유린하는 것이 가장 큰 죄다.”라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청파동 시절에 누가 감을 한 상자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안양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해 서울역에 내려 감 상자를 머리에 이고 교회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안방에 들여놓았더니 아버님께서 “오늘 이 감이 여기에 오기까지 얼마나 그 사람이 정성을 들이고, 기도를 많이 하고, 아버님께서 잡수어 주셨으면 하는 심정을 가졌겠는가? 그런 심정을 유린하지 않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이 감을 먹어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아무도 그 감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식구들의 심정을 유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 왔습니다. 
이제 참으로 육신생활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실감합니다. 나의 마지막 소망은 아버지께 받은 이 생명을 아버지 앞에 빛나고 영광스럽게 돌려드리는 것뿐입니다. 나의 삶은 유한하지만 참부모님의 참사랑은 영원하시며, 하나님의 뜻은 불변하시기 때문입니다. 
살아온 내 생애는 식구들에게 자랑할 것이 없으나 나에게 주셨던 참부모님의 참사랑과 그 크신 은사는 남겨야겠기에 부족하지만 살아온 자취를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습니다. 내 삶의 간증이라고 생각해 주었으면 합니다. 
부모님께서는 일찍이 나에게 큰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너의 배후에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동역하시고 동사하신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고 기억해라.” 하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 말씀을 기억하고, 내 배후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믿습니다. 

내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고, 해야 할 사명은 한반도에 강림하신 재림주님을 내 피와 살과 뼈 속 깊은데서 사무치게 우러나는 심정으로 만민에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나의 삶 속에 살아 계셨던 천지인참부모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식구님들에게 부족하나마 그 은혜가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부족한 내용을 책으로 엮어 하늘부모님과 천지인참부모님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유경석 한국회장과 본부 임직원 그리고 성화출판사의 김석병 사장과 편집진에게 깊이 감사하며, 특별히 원고작업을 도와준 김민지 박사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더불어 나와 인연된 모든 분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오늘까지 내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하늘부모님과 천지인참부모님의 은혜와 통일가 식구들의 심정 그리고 가족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참부모님, 불초한 여식의 고백을 받아 주시옵소서. 오직 하늘부모님과 천지인참부모님의 영광만이 영원할지어다, 아주!



제 1 부
성장과 입교


주 예수 계신 곳 그 어디나 하늘나라




신실한 신앙 속에서 성장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나는 1927년 10월 1일(천력 8월 20일)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82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고향 영주를 생각하면 푸른 산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소백산 자락에 위치해 맑은 물과 푸른 산이 있어 아름다운 자연을 간직한 고장입니다. 
또한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있어 충효를 자랑하는 선비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소수서원은 주세붕이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세웠던 백운동서원을 후에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소수서원으로 승격시킨 후 많은 학자들과 충신들이 배출된 곳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영주에는 선량하고 강직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고향 영주는 예전부터 기독교 교세가 상당히 강한 지역입니다. 어린 시절에 교회에서 예배가 열릴 때면 앉을 자리가 없이 사람들이 가득 찼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강직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기독교 신앙도 열성적인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경북에서는 영주와 더불어 대구와 안동이 열성적인 신앙인이 많았던 지역입니다. 
특히 내가 태어나 자란 마을은 진주 강씨의 집성촌이었는데, 대부분 교회를 다녀서 마을 전부가 교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진주 강씨들의 신앙은 소문이 나서 ‘영주에 있는 교회 중진들은 거의 진주 강씨’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나는 부친인 강석지(姜錫祉) 장로와 모친 권계월(權桂月) 권사의 7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우리 가정은 조부께서 장로교에 입교하신 이후로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지켜 오고 있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에 다니셨고, 저녁이면 아버지를 중심으로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덕분에 저는 모태에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장했습니다. 가정의 모든 생활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바로 믿고 따르기 위해 노력하던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영주교회에서 40대에 장로로 장립을 받으셨습니다. 장로로 장립되기에는 젊은 나이였지만, 신앙이 독실하고 책임감이 강해서 여러 사람이 추천을 해서 일찍 장로가 되셨습니다. 
우리 집안은 사업을 했기 때문에 중산층 정도로서 궁핍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교회 권사로서 조용한 분이었습니다. 7남매를 키우면서도 큰소리 한 번을 낸 적이 없이 뒷바라지하며 사셨습니다. 자신을 내세우는 적 없이 겸손한 분이라고 주위에서 많이 말하곤 했습니다. 
가정에서 예배를 볼 때면 아버지는 늘 신실한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도하실 때나 말씀하실 때면 “사람은 진실해야 한다. 진실하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이 떠나신다.”고 누누이 강조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 “진실은 언제든지 진실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우리와 더불어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언제나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또 가정예배를 드릴 때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언제나 부르던 찬송가가 있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나직이 부르시던 아버지의 목소리는 내 마음 속에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 찬송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언제나 진실해야 한다.”고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과 삶을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버지는 늘 사석에서나 예배시간에나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렇게 사시려고 노력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도 많은 분들이 강석지 장로님은 진실하시고 뜻대로 사시는 분이라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저도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의 신앙을 따르며 자랐습니다. 
부모님 덕분에 나는 올바른 신앙길을 가려고 노력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신앙의 근본을 마음에 심어 주셨다면, 어머니는 습관을 길러 주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어머니와 같이 새벽기도를 다녔습니다. 새벽에 어머니와 교회에서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나는 어머니처럼 착실하게 말없이 하나님을 믿고 모시며 살아야겠다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신실한 신앙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제가 신사를 곳곳에 세우고 강제로 참배를 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1930년대 후반부터는 교단 차원에 압력을 넣어 일반 신도들도 신사에 참배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진실한 신앙을 하던 우리 가정에 큰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아버지의 친구인 한 목사님이 영주를 찾아왔습니다. 그날 아버지와 그 목사님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알 수 없지만, 천황을 신으로 모시며 참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으신 듯합니다. 
결국 아버지는 신사참배를 거부해서 경찰에 끌려가 수감되시고 말았습니다. 이후로 우리 집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경찰들이 가택수색을 하여 아버지가 평소 보시던 종교에 관한 책을 몇 수레나 싣고 갔습니다. 그런 뒤에도 삼일이 멀다 하고 집에 찾아와서 어머니에게 고함을 치고 집안을 뒤지기도 해서 내가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경찰들이 가족들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고 큰 죄를 지은 죄인 취급을 하며 감시를 해서 자유롭게 기를 펴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신사참배를 안 하는 집안의 딸이라고 주위에서 미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매일 새벽 교회에 나가서 아버지를 위해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저들의 마음속에 나타나셔서 그 잘못을 꾸짖어 주십시오.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시며 유치장에 갇혀 있는 이들을 괴롭히지 말게 해 주십시오.” 하고 열심을 다해 기도드렸습니다. 
수감될 때만 해도 건강하셨던 아버지는 옥중에서 너무나 많은 고문을 당해서 병을 얻고 쾌차하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아버지가 옥중에서 돌아가실까봐 걱정이 되었는지 겨우 출옥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병이 깊어진 아버지는 해방도 보지 못하고 1944년 1월 3일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영주교회에서는 부친에 대해 ‘강석지 장로는 일제시대에 순교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집안에서도 직접적으로 순교를 한 것은 아니지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수감되었다가 병을 얻어 돌아가셨으니 강 씨 집안에 순교자 한 분이 나온 것이라고 이야기되곤 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변함없이 장로교에서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늘 “돌아가신 아버지를 영계에 가서 뵐 때 부끄럽지 않고 죄송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996년에 영육축복을 받았습니다.

신학의 길을 걷다
해방 이후에 나는 부산으로 가서 고려고등성경학교를 거쳐 고려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고려신학교는 아버지의 친구인 한상동 목사가 설립한 학교입니다. 한 목사는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옥중생활을 한 목사들과 함께 신앙의 정도(正道)를 가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오종덕 목사는 아버지와 친한 친구인 한 목사가 부산에 신학교를 세웠으니 나에게 입학하는 것이 좋겠다고 추천해 주었습니다. 그때 나는 신앙적으로나 학업적으로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신학교 입학을 권유 받았습니다. 
당시 내 마음 속에는 아버지가 출감한 후 해방도 못 보고 돌아가신 것이 하나의 숙제로 남았습니다. 아버지가 가신 길을 이어받아 아버지가 못 다한 일을 계승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아버지가 다 못 이루고 가신 것을 내가 이뤄 드려야 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못 다 이루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외적으로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고려신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교역자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학교였기에 아버지가 품었던 뜻을 내외적으로 준비하기에 가장 적합한 학교였습니다. 
1950년 고려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고려신학교의 한 목사가 나를 굉장히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런 사랑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도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도 정성을 다했습니다. 고려신학교는 보수적인 학교라서 하루 60페이지 이상 의무적으로 성경을 읽어야 했고, 세 시간 이상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기도하는 나를 보고는 “항상 그렇게 엎드려서 기도를 오래 하니 곱사등이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고려신학교는 매우 엄격하게 주일을 지켰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에는 어떠한 물건이든 사면 안 됩니다. 물론 전차표나 버스표도 사면 안 됩니다. 일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떨어진 단추를 달아서도 안 되고, 10리 이상의 먼 길을 걸어도 안 됩니다. 학교에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교육을 받고 나니 양심의 가책이 되어서 어떠한 일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당시 나는 성경을 생명시하며 그 말씀을 따라서 바르게 살아 보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마음속에는 ‘다시 오시리라고 약속하신 주님은 언제 오시렵니까?’ 하는 생각이 불같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나를 필연코 사랑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그 믿음은 참으로 절대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니 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2000년대가 되기 전에 오신다고 했기 때문에 이제는 오실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달 밝은 날에는 툇마루에 앉아서 달을 쳐다보며 “주님, 내가 참 사랑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만큼 예수님도 날 사랑하시지요? 오신다면 누구보다 저를 제일 먼저 만나 주셔야 됩니다. 저를 제일 먼저 만나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라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 수업이 끝나면 노방전도를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는 전도와는 다르게 어떤 형식이나 의식, 제도, 법에 매여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 피와 살과 뼛속에서부터 우러나는 심정으로 외쳤습니다. 예수님의 사정과 심정을 체휼한 나는 ‘내가 2천 년 전 살아 있었다면 예수님께 위로와 소망의 대상이 되었을 것인데….’ 하는 마음에 가슴에서 통곡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예수님, 나는 부족하오나 내게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피가 흐릅니다. 이 지상에 인류를 구하고자 하는 뜻이 살아 있습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당시에 주님을 만나기 위해 늘 내적으로, 외적으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 절실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신랑으로 오신다고 했으니 신부 단장을 해야 되는데 내적으로, 외적으로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주님 자기 동산에 오셨네





신학교를 다니면서 다른 한 전도사와 함께 범천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처음에 범천교회는 천막을 친 천막교회로 시작했습니다. 김갑석 전도사와 둘이서 개척했는데, 김봉조 장로께서 재정적으로 지원을 많이 해줘서 100여 명의 신도가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나는 열심과 정성을 다해 전도를 하고, 교인들의 신앙 성장을 위하여 철야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매일 세 집 이상 심방을 하고, 세 집 이상 찾아 다니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지역을 내게 맡겨 주셨으니 이곳에 살고 있는 이들을 내가 치는 그물에 다 걸리게 해야 한다고 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간절한 기도를 꼭 들어 주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또한 매일 100여 명이 넘는 교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가면서 그들의 사정을 하나님께 보고했습니다. 교인들의 심령을 위해 너무 간절히 기도하다 보니 피곤하고 허탈할 때도 있었습니다. 또한 다른 이들에게 신령한 양식을 주려면, 우선 내 자신의 심령이 살아 움직여야 하는데 때로는 냉랭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내게 오시어 역사하시는 것을 느끼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나의 일생을 예수님의 인류 구원사업을 위해 바치겠다는 큰 희망과 포부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범천교회 교인들은 나와 하나가 되어서 잘 따랐습니다. 음식을 해다 주고, 물을 길어다 주고, 맛있는 것을 사다 주는 등 많은 교인들이 협조를 해 줘서 한창 부흥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범천교회 나오던 청년 한 사람을 청년회 회장으로 세웠는데, 후에 보니 감리교 큰 교회의 감리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방학 때면 영주와 풍기뿐만 아니라 가까운 지역의 교회들에서 나를 초청해 부흥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들의 심령이 크게 부활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참으로 역사해 주심을 실감했습니다. 역대하 16장 9절의 “하나님의 눈은 불꽃같아서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는 말씀처럼 전심을 하나님께 향하느냐가 문제 해결의 열쇠임을 믿었습니다.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는 범냇골 청년
1952년 5월 초, 봄기운이 잠들었던 대지를 일깨워 푸른 옷을 입히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나는 전도하러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이연규라는 한 여대생이 찾아왔습니다. 그 여대생은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다면서 “범냇골 골짜기에 사는 어떤 청년이 이상한 이야기를 하더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학생이 살고 있는 집 근처에 한 청년이 직접 집을 지어서 살고 있어서 한 번 대화를 나누어 보았던 모양입니다. “어떤 이상한 이야기를 합디까?” 하고 물으니 “인류가 타락하기 이전의 세계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는데 대단합디다.”라고 했습니다. 그 학생의 말을 듣고 보니 걱정부터 되었습니다. ‘구원의 방법, 어떤 사람이길래 그런 말을 하는가?’ 하는 궁금함이 들어 자세히 물어 보았으나 “나는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도 잘 모르겠지만 아주 열심히 자신 있게 이야기를 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성경을 읽어도 내가 더 많이 읽고, 성경을 알아도 내가 더 많이 알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일단 가서 들어보고 난 다음에 가야지 그전에는 가지 말아라.” 하고 당부했습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24장 22절 이하 말씀을 보면, 말세에는 적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나는데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가지도 말고 쫓지도 말라고 했으니 절대 가면 안 된다.”하면서 만류했습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막상 내가 그 청년을 찾아가려니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만나러 가야 될까, 가지 말아야 될까? 나는 신학교 학생이고 교회의 전도사로서 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에 처신을 가볍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께 보고하여 답을 얻어야겠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어떤 청년이 이상한 얘기를 한다는데, 내가 거기에 가는 것이 뜻입니까? 안 가는 것이 뜻입니까? 가는 것이 뜻이라면 내가 어떤 방법으로든 가게 해주시고, 가는 것이 뜻이 아니라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가지 못하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일주일 동안 했습니다.

첫 만남
그날은 1952년 5월 10일 토요일이었습니다. 아침부터 비가 와서 교회에서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범냇골에 산다는 이상한 청년을 만나봐야 되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만나 보고 똑똑하고 하나님께 쓰일 수 있는 이라면 전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꾼으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교회를 나섰습니다. 
오후 4시경 길을 나서려니 비가 거의 그쳐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의 이름도 알지 못했고 얼굴도, 집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여대생이 살고 있는 집 근처에서 남자들만 자취하고 있는 모양이라는 말만을 기억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범냇골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남자들만이 자취하는 집이 어디냐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기야, 그당시에 자취하던 남자가 한둘이었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리라,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청년에게 인도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계속 물어 보며 돌아다녔습니다. 
얼마쯤 헤매다가 한 부인이 “저 꼭대기에 올라가면 우물이 하나 있는데, 그 우물 옆에 허술한 집이 하나 있어요. 그 집에 청년 둘이 사는 듯합디다.” 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오르막길로 쭉 올라가니 과연 우물이 하나 나왔습니다. 양재기로 퍼 올리는 샘물 같은 우물이었습니다.
우물에서 손을 씻고 있으려니 곱게 생긴 한 아주머니가 물을 긷기 위해 우물로 나왔습니다. 연세는 한 오십여 세 쯤 되었는데, 피부가 깨끗하고 정정한 분이었습니다. 피난시절이라 국방색 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무척 기품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주머니에게 “이 근처에 청년들이 자취하는 방이 있다는데, 혹시 어딘지 아십니까?” 하고 말을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주머니는 “댁은 어느 회사에 다니는데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마도 내 옷차림을 보고 어느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으로 짐작했던 모양입니다. 나는 무릎 아래까지 오는 약간 짧은 치마를 입고, 남자 구두 같은 걸 신고, 성경과 찬송가를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습니다. 
나는 웃으면서 “아닙니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이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나는 예수님을 자랑하고 진심으로 전하고 싶어서 누구를 만나도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그 아주머니는 내 얼굴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보더니 “아, 그러면 우리집으로  들어갑시다.”라고 했습니다. “집이 어디세요?” 하고 물었더니 “바로 이 집입니다.”라면서 바로 옆집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옥세현 모친이었습니다. 
그 집은 바로 우물 옆에 있었습니다. 흙과 돌을 이겨서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집이었는데 어설프게 보였습니다. 사람이 손으로 흙과 돌을 섞어 만든 집이다 보니 벽이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하게 형편없어 보였습니다. 지붕은 전쟁 중이라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씨레이션 박스를 펴서 덮어놓은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피난을 온 사람들이 그걸로 집을 많이 지었습니다. 씨레이션 박스는 비가 와도 새지 않아서 지붕을 덮어 놓으면 좋았던 모양입니다. 피난민들이 그런 집을 지은 것을 보긴 했지만 그렇게 작고 초라한 집은 처음이었습니다. 마치 시골에서 담장을 쌓을 때 흙과 돌로 엉성하게 만든 것과 같은 벽이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다다미 두 장도 안 될 정도의 좁은 방이었습니다. 문도 키가 큰 사람들은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될 정도로 낮았습니다. 벽에는 종이나 신문지 한 장도 발라져 있지 않고 흙벽 그대로였습니다. 천장은 비가 샜는지 여기저기 얼룩져 있었고, 방바닥은 검은 비닐조각을 깔아 놓았습니다. 마치 어느 촌 마굿간 같았습니다. 그날 비가 온 뒤라서 방안 풍경이 더 우울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방에 들어가서 먼저 기도를 한 후 눈을 떴을 때 ‘참, 세상에 이런 집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방 안에 세간은 아무것도 없고, 옷 한 벌이 걸려 있었습니다. 양복 한 벌이었는데 그 집이나 방과는 어울리지 않게 좋아보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양복은 엄덕문 선생이 아버님께 선물해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방 한쪽에 둥근 밥상이 하나 있었는데, 그 위의 연필꽂이에 몽당연필이 많이 꽂혀 있었습니다. 세간도 없는 방에 연필이 많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집에는 초등학생이 많은가? 왠 연필이 이렇게 많이 꽂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원필 선생이 그림을 그릴 때 선을 긋기 위해 연필을 많이 깎아 둔 것이라는 걸 후에 들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그렇게 초라한 집과 방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문득 ‘사람이 이 땅 위에 태어나서 이런 집에서 일생을 살다가 가면 얼마나 많은 한이 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 순간을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재림주님으로 오신 아버님께서 다다미 두 장도 안 되는 좁은 집에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버님께서 얼마나 기가 막힌 생활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예전에 일본에서 누군가가 간증하면서 “세상에 사람이 땅 위에 태어나서 이러한 집에서 일생을 살다가 죽는다면 얼마나 많은 한이 남을까?” 하던 내 말이 두고두고 가슴을 울리더라고 이야기하던 것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 출발하셨던 아버님께서 메시아요 구세주요 승리하신 천지인참부모님으로, 만왕의 왕으로 정착하실 때까지 얼마나 형언할 수 없는 어려운 노정을 걸어 오셨는지 생각하면 뜨거운 눈물이 나곤 합니다. 그 집은 부엌도 없어서 집 바깥에서 밥을 지어야 했습니다. 그나마 비가 오면 방안에서 밥을 해야 했습니다. 나중에는 어쩔 수 없어서 텐트를 바깥에 치고 취사를 하곤 했습니다. 
그런 집이었지만 아버님께서는 그 집을 손수 지어 놓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버님께서 부산으로 피난을 와서 집 없이 지내며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하루가 저물어도 들어가서 쉴 곳이 없으니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그러다 범냇골에 집을 하나 짓기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조금 쌓아 올리면 비가 와서 무너지고, 또 조금 쌓아 올려 놓으면 비가 와서 무너지기를 세 번이나 했다는 것입니다. 
그 방 한 칸을 만드시면서 참아버님께서는 많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잘못된 역사를 올바로 세우는 복귀역사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기대를 하시고 계시는지 아셨기에 에덴동산에서 잃었던 참핏줄을 새로이 찾으시려는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며 흥분된 마음에 새 역사를 찾으시는 소망에 가득 차 계셨던 것입니다. 
겨우 집을 완공한 날 벽도 마르지 않았지만 들어가 누우니 세상 없이 행복했다고 하셨습니다. 대리석으로 멋지게 지은 집이 아니라 두 평도 안 되는 토담집이지만 고대광실의 왕궁보다도 값지고 아름다운 방 한 칸, 발을 뻗고 누울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으셨는지 잊을 수 없다고 하시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때 그 방안에 들어가서 ‘이런 집에서 일생을 살면 얼마나 한이 많이 남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왠 청년이 들어왔습니다. 국방색 한복 바지를 입고, 위에는 낡은 갈색 점퍼를 입고 있어서 위 아래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양말은 툭툭한 미군용 양말을 신고 있었는데 대님을 매지 않고 바지를 걷어 올린 모습이었습니다. 그 청년이 바로 아버님이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방에 들어와 저를 보시더니 “어디에서 왔소?”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저 밑에 범천교회가 있지요? 저는 거기서 여자 전도사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버님께서는 “아, 이 방이 찬데요.” 하시며 초록색에 별 무늬가 그려진 요를 펴시더니 “이 위에 올라와 앉으세요. 방이 찹니다.” 하고 권하셨습니다. 나는 “전 여기도 괜찮습니다.”라고 사양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께서는 계속 방이 차갑다며 요 위로 올라와 앉으라고 권하셨습니다. 권유에 못 이겨 그 위에 앉으니 아버님께서는 “오늘이 5월 10일인데, 참 뜻이 있는 좋은 날에 오셨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속으로 ‘오늘이 무슨 날인데 저렇게 오늘이 좋은 날이라고 하나?’ 하고 가만히 속으로 생각해 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아버님께서는 “내가 이북에서 이남으로 피난을 왔는데 이 집에서 귀중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이 그 글쓰기를 마친 날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글쓰는 일을 마치고, 지금부터는 내가 전도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고 내려오는 길입니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아버님께서는 그날 산에 올라가 “하나님, 저하고 약속하시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값진 원리말씀 아래로 모여든다고 하셨습니다. 원리를 중심삼고 하나의 세계, 선의 세계, 사랑의 세계, 아버지의 세계를 이 땅 위에 이루어 놓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북에서 남한으로 내려와 아직 한 사람의 생명도 못 찾았습니다. 하나님, 저는 사람이 그립습니다. 그리운 중에도 예수님을 잘 믿는 성도, 올바로 믿는 성도가 그립습니다. 하나님, 예수님을 잘 믿는 성도를 보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하고 내려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초대도 하지 않은 기성교회 여자 전도사가 방에 들어와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나 반가우셨겠습니까? 아버님의 용안에는 희색이 만면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자리에 앉은 저에게 “7년 전부터 하나님께서 강 전도사를 굉장히 사랑했습니다.”라고 딱 한 마디를 하셨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고 청년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습니다. ‘아니, 저 청년은 7년 전에 나를 만난 적이 없는데 어디서 날 봤다고 7년 전에 하나님이 나를 굉장히 사랑했다는 말씀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7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돌이켜 보니 7년 전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으면서 나는 내 모든 일생을 하나님의 뜻과 복음사업을 위해 바쳐야 되겠다는 결의를 하고 본격적으로 출발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생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7년 전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굉장히 사랑하셨다. 이 청년이 정말 뭘 좀 아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다음부터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원리강의를 서론, 창조원리, 타락론, 종말론, 부활론, 예정론, 기독론, 복귀원리, 재림론 순서가 아니라 결론인 재림론부터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아버님께서는 종이를 작게 여러 조각으로 찢으며 처음에는 작은 종이조각에 재림론이라고 쓰시고 다른 종이조각에 각각 예수, 아담, 해와라고 쓰셨습니다. 그러시더니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 이야기를 할 때는 예수 종이를 앞에 두고 이야기하시고, 아담 이야기를 할 때는 아담 종이를 앞에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강의를 들으면서도 정신을 집중하지 못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아버님께서 조용히 앉아서 강의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종이를 들었다 놨다 하시고 몸동작을 취하시며 강의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목소리가 크신지 내 고막이 터질 정도였습니다. ‘아직 나는 젊어서 귀도 먹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저 청년이 저렇게 큰소리로 말씀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실 거라고 믿습니까?” 하고 너무나 큰 소리로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성경말씀을 믿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일점 일획도 가하지도 말고 감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믿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님은 “구름 타고 안 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구름 타고 안 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본인이 보시던 성경을 펼쳐 가면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을 얼마나 열심히 보셨던지 빨간 줄이 꽉 채워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엘리야가 세례 요한으로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육신을 쓰고 오십니다.”라고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다면 똑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재림하신 예수님이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되묻기도 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열정적으로 내 의문에 답을 해주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육신을 쓰고 오신다면 어디에 발을 놓으실 거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오시는데 한국으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는 나라와 땅이 많은데, 하필이면 폐허가 된 한국 땅에 예수님이 오신답니까?” 하고 반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1950년에 북한 상공에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못 들었습니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도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억하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게 다 뜻이 있는 겁니다. 북한 상공에 왜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나타났겠습니까? 다 뜻이 있는 겁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에 답변하시는 목소리가 얼마나 크신지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얼마나 열심히 말씀을 하시는지 절정에 이르면 산천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조그만 방에서 그렇게 크게 말씀을 하시니까 나는 속으로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아이고, 오늘 조용히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무슨 변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너무 큰 소리로 말씀하시면서 몸동작을 취하셨기 때문에 나는 벽에 등을 대고 되도록 멀찍이 앉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는 말씀에 취해서 펄쩍펄쩍 뛰면서 내 앞에 다가와서 말씀을 하시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질려서 나도 모르게 표정이 짜증스럽게 변해 버렸습니다. 조그만 방에 나 한 사람을 두고 춤을 추거나 연극을 하는 것처럼 말씀을 하시니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내 바로 앞까지 오셔서 말씀하시다가 뒤로 물러나셨다가 펄쩍 뛰어 오르듯 하시면서 온몸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아버님의 표정과 음성, 몸짓에 놀라서 혼이 빠져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그때 아버님께서는 나 한 사람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전 인류에게 전하듯 말씀하신 것이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전 세계 인류를 살리고 인류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버님의 사명이시기에 비록 아버님 목전에는 나 혼자 앉아 있었지만, 아버님께서는 전 세계 인류의 모든 영들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으로 생각하신 것입니다. 전 세계 인류의 심령을 향하여, 전 세계 인류의 생명을 향하여 그렇게 큰 목소리로 열정을 다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그날 아버님께서는 사생결단을 하면서 큰 싸움을 하는 사람처럼 사느냐, 죽느냐 하는 그런 기로에 서서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이니 격식을 차리며 다정하게 ‘그러지 않는가?’ 하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100% 확신과 자신을 가지고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나는 그때 말씀의 내용보다 아버님의 자신감과 열정에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나도 전도사로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는 방식으로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는 ‘이것은 이렇습니다. 저것은 저렇습니다.’ 하고 결론을 정확하게 말씀하시는데 누구든지 들으면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신념과 열정이 넘치셨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정말 대단한 분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버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바라보니 아버님의 눈동자가 번쩍번쩍 빛났습니다. ‘이상하다. 저 청년의 눈동자가 번쩍번쩍 빛나네, 광채가 나네.’ 하면서 혹시 내 눈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가 싶어서 눈을 비비며 다시 아버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다시 눈을 뜨고 바라봐도 아버님의 눈에서는 여전히 서광이 비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저 청년의 눈에 서광이 비칠까?’라고 생각하면서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아버님께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합시다.” 하셨습니다. 그때 7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내가 4시 조금 넘어서 아버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했는데 7시가 넘었으니 3시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3시간이나 말씀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나 또한 상당히 힘들었기 때문에 아버님께서 오늘은 그만하자고 하셨을 때 벌떡 일어났습니다. ‘아, 다행이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가려고 일어났는데, 아버님께서 “밥 한 끼 나누어 먹는 것 아무것도 아닌데 식사나 같이 하고 가시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아닙니다. 우리집이 바로 이 밑에 있는데 뭘 식사를 하고 갑니까? 오늘은 그만 가야겠습니다.”라고 사양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님께서는 오늘 저녁에 꼭 여기서 식사를 하고 가야된다고 몇 번이나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말의 ‘꼭’을 일본어로 ‘가나라즈(かならず)’라고 합니다. ‘가나라즈’라는 말까지 쓰시면서 “오늘 꼭, 필히, 여기에서 식사를 하고 가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씀을 하시는데,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꼭’이라는 아버님의 말씀에 깊은 정이 느껴지고 매료되어 결국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전쟁 중이라서 다들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녁상을 받고 보니 너무 초라한 밥상이었습니다. 옥세현 모친이 저녁상을 차려 왔는데 소나무로 만든 밥상에다 찌그러진 양재기 그릇에 시커먼 보리쌀 밥이 담겨져 나왔습니다. 반찬도 신김치에 두부 몇 조각을 구워 놓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 밥상을 앞에 놓고 앉았는데도 아버님께서는 얼굴에 기쁜 빛이 가득했습니다. 나와 같이 저녁을 드시는 것이 기쁘신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아버님께서 몇 번이고 “그때는 내가 가장 외로운 때였다. 가장 외로운 때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강현실을 보내 주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나에게 식사기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아이구, 나 기도 안 하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날 세 시간 동안 말씀을 들으면서 아버님께서 너무 강하게 우격다짐으로 야단을 하시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기가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26년간 신앙생활을 해 왔기에 어디가나 자신이 넘쳐서 기도인도를 했는데, 그날은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기도 못 하겠습니다.”라고 다시 한 번 거절을 하자 아버님께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우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목이 메어 한참을 쉬었다가 또 계속해서 기도하셨는데, 뼈살에서 우러나는 심정에 사무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가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 나왔지만, 하나님이 저보다 수고를 더 많이 하신 줄 알고 있사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가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그 많은 남겨진 한을 제가 꼭 풀어 드리겠습니다.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와 세계를 제가 찾아 세워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식해 드리고 기쁘게 해 드리는 제 자신이 꼭 되겠으니 하나님, 나를 보시고 위로를 받아 주십시오.” 
그 기도 내용을 듣고 나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나도 하루 세 시간 이상 기도를 해 왔지만, 나의 기도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도 드릴 때마다 “병난 자는 병이 낫고, 시험에 든 자는 시험에서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그리고 지친 자에게는 용기를 주십시오.” 하는 것처럼 한결같이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선생님은 하나님의 서럽고도 애달픈 사정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리고 하나님의 소원을 이뤄 드리겠다고 기도를 하는구나!’ 하는 거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그런 기도를 못 해 봤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 기도 내용을 들으며 ‘아, 여기에 무엇이 있구나!’ 하는 큰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날 저녁식사를 안 하고 그냥 집으로 갔으면, 아마도 나는 통일교회 식구가 안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 기도 말씀을 듣고 저녁을 먹고는 내가 달라졌습니다. ‘나는 불효녀같이 하나님께 매달려 내 것을 채우려고 했는데, 이 청년은 자신의 것을 드리면서 하나님을 모시고 편안하게 해 드리려고 하는구나!’ 하는 반성이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들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내가 흐느껴 울고 있는데, 아버님께서 “오늘 이 어린 딸이 여기에 찾아왔습니다. 하나님, 무슨 뜻이 있어서인지 본인은 모르지만 이 딸로 하여금 하나님의 참뜻을 알고 느끼고 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며 흐느끼셨습니다. 그렇게 흐느끼실 때는 목이 메어 기도를 이어서 하시지 못하고 가만히 계시다가 다시 이어서 기도를 하시고, 또 흐느끼시며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모습에는 형식도, 가식도 없고 진심만이 있었습니다. 그 기도에 나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기도를 들으면서 나는 ‘이곳에는 하나님이 같이 하고 계신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목이 메어 흑흑 하고 흐느끼면서 진실된 기도를 하시는 그 모습에는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진실, 하나님을 편안히 모셔야 되겠다는 효자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예수님을 믿어 왔지만 잘못 믿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나는 매일 내 욕심만 부리며 하나님께 요구만 하고 산 것입니다. “하나님, 저를 천당에서도 좋은 자리에 보내 주십시오. 예수님도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만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드리는 불효를 했습니다. 내가 동기가 되고, 욕심이 중심이 되어 나를 중심으로 신앙했던 것을 깨달으면서 회개의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세상의 부모도 그 부모에게 와서 무엇을 달라고 해서 얻어가는 자녀보다는 옷 한 벌이라도, 밥 한 상이라도 대접하는 자녀가 귀하고 사랑스러울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이 청년을 더 사랑하리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 기도보다는 청년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감동의 기도가 끝난 후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진지를 맛있게 드셨습니다. 한 그릇을 다 드신 다음에 약간 여유가 생겼을 때 내가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날 나는 궁금한 게 많았지만 제대로 된 질문을 못 했습니다. 아버님께서 강하게 일방적으로 질문하시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질문을 할 틈도 없었고, 엄두도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렇게 세 시간이나 말씀을 하셨는데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신가요, 끝나셨나요?”라고 여쭈었더니 “사실 내가 말이에요, 이야기를 하려 들면 며칠 밤을 새워서 이야기해도 계속해서 새로운 말씀을 할 내용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 청년이 굉장히 큰 이야기보따리를 가지고 있구나. 성경에 대한 새 말씀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니 굉장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실 말씀이 많으십니까?” 그랬더니 “이집은 바깥으로 보기에는 초라하지요? 그렇지만 언제든지 문을 열어 놓고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를 또 기다리시나요?” 하고 물으니 “이 땅에는 인생의 근본문제와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방황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사람들에게 내가 새로운 하늘의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서 언제든지 문을 열어 놓고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헤어질 때 아버님께서는 “강 전도사, 다음에 또 와서 말씀을 듣기 바랍니다.”라고 그러시기에 “시간이 있으면 오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님께서는 단호한 어조로 “시간은 항상 없습니다. 시간은 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헤어져 걸어 나오는데,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뒤돌아 보니 아버님께서 내 뒤를 따라오고 계셨습니다. 나는 ‘인사까지 했는데, 또 왜 날 따라올까? 참 이상하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우리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내가 뒤를 돌아보면서 “여기가 저희 집입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또 와서 말씀을 들으세요.” 하셨습니다. 아까 헤어질 때와 똑같은 말씀을 하시기에 “시간이 나면 가겠습니다.”라고만 말씀드렸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아버님께서는 또 “시간은 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야 되는 겁니다.” 하셨습니다. 결국 내가 “그러면 시간을 만들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아버님께서는 소년 같은 미소를 지으시며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께서 그때 사람의 생명을 찾고 구하기 위해서 당신의 입장이나 체면, 위신 같은 것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버님의 위신이나 체면을 생각하면 젊은 여자의 뒤를 따라오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귀의 길에서 한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계셨기에 내 뒤를 따라와 한 번 더 말씀을 들으러 오겠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집으로 돌아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 아버님의 미소는 지금까지 나의 마음 속에 남아 있습니다. 사람이 그리워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만난 반가움과 기쁨이 아버님의 얼굴에 그대로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찾아가다
그날 이후 신학교에서 배웠던 모든 신학의 내용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 그런지 그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부터 내 인생이 무로 돌아간 것 같았고, 기도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아버님의 기도는 내가 신앙생활을 해 왔던 것과 상당히 차이가 있었습니다. 기성교회에서는 기도를 할 때 의식적으로 기도의 형식과 교회의 제도에 매여서 기도할 때가 많은데 아버님의 기도는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피와 살과 뼈 속에서 자연적으로 우러나와서 하시던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를 들으면서 ‘이분은 하나님과 가까운 인연을 맺고 계시는구나.’ 하는 감탄이 저절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7년 전 내가 결심했던 일을 아시는 것을 보니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며칠을 밤새워 이야기해도 될 만큼의 이야기가 있다고 했으니 한 번 더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한 번 더 찾아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먼저 세 시간 동안 들은 말씀을 곰곰이 음미해 보았습니다. 생각할수록 너무나 논리적이고 확실한 내용이어서 결국 목요일에 다시 찾아갔습니다. 
오전에 학교에 갔다가 오후에 말씀을 듣기 위해 찾아갔더니 청년이 나를 보고 너무 반가워했습니다. 방으로 어서 들어오라는데, 순간적으로 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저분이 왜 나를 이렇게 좋아할까? 젊은 남자인데, 혹시 내가 젊은 여자여서 좋아하는 것인가?’ 하는 마음이 드니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년은 다시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내용은 하나님이 어떻게 계시는가 하는 것으로서 창조원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전하는 아버님의 모습에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존재하시는가? 존재하신다면 어떻게 존재하시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지만, 사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백 퍼센트 확신을 가지고 전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는 너무나 분명하게,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실재를 전하셨습니다. 그런 아버님의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의 신앙을 회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언제 하나님에 대해 진정으로 믿고 증거했는가? 예수님에 대해 전력을 다해 전달했는가? 내가 믿은 만큼 전하는 것인데 절대적으로 믿지 못하였으니 전할 때도 상대의 마음에 절대적으로 전하지 못했겠구나. 나의 믿음은 참으로 부족했구나. 이런 믿음으로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겠는가?’ 하는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머리로 연구해서 지어낸 말씀이 아니라 전 세계 인류를 구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 감동을 받으면서도 마음 한 편에서는 의심과 갈등도 있었습니다. ‘말세에는 적그리스도가 많이 나온다고 하는데, 혹시 적그리스도인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 것입니다. 그때 신학교에는 아버님께서 이북에서 어떤 일을 하시던 분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아버님은 이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문을 생각하면서 ‘적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그래서 가지도 말고 쫓지도 말라고 했는데 공연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때에는 아버님이 재림주님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했습니다. 다만 ‘말씀을 조리 있게 잘하시고, 많은 체험을 가지고 계시며, 영적으로 밝으신 분이구나.’ 하면서 기도를 많이 하고 신령하신 분이라는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으로 모시다
두 번째 말씀을 들은 다음날인 5월 16일 금요일, 다시 아버님께 찾아갔습니다. 저녁을 일찍 먹고 올라갔더니 아버님께서 그날은 더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이틀간 말씀을 들은 토대 위에 셋째 날은 완전히 취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 이것이면 되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상 사람들은 싸우고 죽이고 어둠 속에서 아우성을 치는데, 나는 참진리를 만났으니 이것으로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새로운 말씀에 취해서 정신이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말씀을 다 들은 다음 아버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뭔데요?”
“앞으로 선생님으로 모시고 싶은데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남루한 옷을 입은 청년을 나는 그때부터 선생님으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옆에서 초상화를 그리고 있던 청년과 아주머니도 반가운 표정이었습니다. 그 청년이 김원필 선생이었으며, 아주머니는 옥세현 모친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옥세현 모친이나 김원필 선생 등 아버님을 모시는 사람들이 ‘아버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모셨습니다. 

말씀이 거의 끝났을 무렵에 시계를 보니 새벽 4시가 약간 넘어 있었습니다. 4시 30분에는 새벽기도를 인도해야 하는데 4시 15분쯤에야 말씀이 끝났으니 준비를 전혀 못 했습니다. 교회에 내려가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려니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해서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를 하는 도중에 교인들 가운데 회개를 하며 머리를 쥐어뜯기도 하고, 가슴을 치고 예배당 마루바닥을 치면서 통곡을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평소에 기도회를 인도할 때는 준비를 많이 해도 그런 일이 없었기에 이상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지난 3일 동안 들었던 내용을 중심하고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심방을 하는데, 아버님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꼭 가서 만나 뵙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심방을 하던 집사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집사님, 저 범냇골에 어떤 청년이 있는데 예수를 잘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권면해서 교회에 나오도록 해야겠습니다.” 
“어떤 청년인데요?”
“어떤 청년이냐 하면 생기기도 잘 생긴 분인데, 그분에게 잘못된 병이 있다면 교회에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녀와요.”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그 집사는 장로 댁에서 기다리게 하고 아버님이 계시는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마침 그때 아버님께서는 밖에 계시다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시면서 방에 들어가서 말씀을 듣자고 하셨습니다. 
“지금 심방을 하다가 왔으니 가야 합니다.”
“20분이라도 이야기를 듣고 가면 좋겠는데요.” 하면서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이제까지 말씀을 많이 들었는데 이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인간의 머리로 짜낸 것인지를 알고 싶지 않습니까? 그 출처를 캐고 싶지 않습니까?” 하고 물으셨습니다.
“예, 알고 싶은데요. 어떻게 하면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럼 기도를 해보시죠. 하나님께서는 꼭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아버님의 대답을 듣고, 내 마음이 기뻤습니다.
만약 그때 아버님께서 “이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니 이 말씀을 안 믿으면 망하고 지옥 갑니다.” 했다면, 나는 그냥 아무런 미련 없이 내려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직접 기도해 보라고 하시니 왠지 좋았습니다. 
“예, 기도해 보겠습니다.” 
“자녀가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부모가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도 자녀가 간절히 기도하면 꼭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라고 하시던 아버님의 말씀에 힘이 있었습니다.

벙어리가 되다
다음날은 주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인들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다음날인 월요일 새벽부터 그 말씀에 대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엎드려 기도를 하는 도중에 신학교에서 배웠던 이론들이 쭉 스쳐갔습니다. 그런 훌륭한 이론들은 많은데, 그 이론들을 실천한 사람이 적은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세상의 많은 이론들이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그대로인데,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하나의 이론으로 그치고 실현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 생각과 함께 골치가 아파 오고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불러도 혀가 돌아가지 않고, 입이 벌어지지 않아서 기도가 막힌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아버지와 나 사이에 이런 담벽이 생겼습니까? 이 장벽 때문에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힐 것만 같으니 하나님이 이 장벽을 헐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습니다. 몸이 불구덩이에 들어가 있는 곳만이 지옥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을 때, 즉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을 때가 지옥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사랑의 주관권에 있지 못하고 하나님의 주관을 받지 못하는 비원리권이 지옥이구나.’ 한 것입니다. 그때 나는 지옥이 무엇임을 느꼈습니다. 말도 못 하고,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속만 타 들어갔습니다. 
‘아버지, 내게 있는 전부를 다 빼앗아 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통할 수 있는 기도의 길만은 거두어 가지 마옵소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심정적인 내적인 인연만은 끊지 마시옵소서.’ 하던 마음이었습니다.
말문이 막히고 보니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렇게 말을 못 하는 벙어리가 되어 3일이 지나갔습니다. 그 3일이 얼마나 지루하고 답답하고 괴로운 시간이었던지 한 3년의 세월이 지나간 기분이었습니다. 
4일째가 되던 날도 교회에 나갔습니다. 교회에서 기도를 드렸는데 “사람의 말도 못 믿고 못 받아들이는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얼마나 믿고 받아들이겠느냐?”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신 요한1서 4장 20절의 말씀이 기억나서 회개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사람의 말도 못 믿고 못 받아들이는 자가 되었습니다. 내 불신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더니 골치 아픈 것과 가슴 답답하던 것이 풀리고 마음과 몸이 시원해졌습니다. 
그리고 입이 열리어 “아버지, 하나님, 주님!” 하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아침식사를 하기 전에 아버님에게로 뛰어 갔습니다. 3일 동안 가지 못하다 갔더니 아버님께서는 “왜 3일 동안이나 못 나왔소.” 하셨습니다. “저는 3일 동안 지옥에 갔다 왔습니다. 선생님을 만나 뵙기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만난 다음에는 골치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고, 기도가 막혀서 3일간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간에 많은 시간을 빼앗겼고 심령적으로 많은 상처를 받았으니 손해 본 것을 배상해 주셔야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아버님께서 “기도를 하려고 할 때 의심을 하지는 않았어요?”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도 모르게 의심이 생겼어요.”
“벙어리가 된 것은 의심을 했기 때문이지요.” 
아버님께서는 나에게 말씀을 더 해 주시려고 했지만, 내가 손해배상을 받아야겠다고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상대기준이 맞지 않았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결국 밖으로 나가 버리셨습니다. 그때 옥세현 모친이 나에게 말을 건네왔습니다. 
“저분은 훌륭한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저에게 좋은 말씀을 해 주실 줄 알았는데, 왜 선생님 자랑만 합니까? 아주머니는 선생님을 언제 어떻게 만났습니까?” 
“나는 계시를 받고 들어왔지요.” 
“계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죠.” 
“정말로 들었습니까? 나는 26년 동안 예수님을 믿었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나도 꼭 듣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지요?”
“사심을 버리고 진심으로 기도하면 됩니다. 사실 저분은 하나님이 크게 사랑하시는 분, 재림예수님입니다.”
“저분이 재림주님이라고요? 재림주님은 구름 타고 오신다고 했는데, 구름도 안 타고 오셨는데 재림주님이라고 하십니까?”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분이자 세계적으로 크게 일하실 분이라고 계시를 받고 만난 선생님입니다.”
그렇게 옥세현 모친은 전도되었던 때를 회상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옥세현 모친은 장로교회의 독실한 장로 부인으로서 은혜를 많이 받은 권사님이었습니다. “어느 날 집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크게 들려왔어요. 만수대 건너편에서 젊은 청년을 찾으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잘못 들은 말인 줄 알고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눈병이 났습니다. 병원에도 가보고 약국에서 안약을 사서 넣어도 보았지만 낫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왜 찾아가 보라는 곳에 가지 않았느냐고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결국 가라는 곳으로 갔더니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선생님을 뵙자마자 눈병이 나았습니다. 이후로 선생님을 극진히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평양에서 작은 방 하나를 얻어 예배를 드리고 계셨는데 평양 시내의 잘 믿는 권사, 집사, 평신도들이 계시를 받고 많이 몰려왔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음성과 계시를 받은 자들이 많았어요. 그러자 평양 시내의 목사들이 장로들과 회의를 열고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결의를 했지요.
처음에는 교회에서 문제가 되었고 다음에는 노회에서 문제가 되고 총회에서 문제가 되어 기성교인들이 경찰에 투서를 넣었는데 80통 이상이나 되었답니다. 그렇게 사회질서를 유린하고 교인들을 빼앗아 간다고 경찰에 투서를 해서 결국은 선생님이 평양 옥중에 수감당하시게 되었어요. 그때 나는 미숫가루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만들어서 매월 한 번씩 면회를 갔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지었습니다.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던 나의 마음 한 구석에 옥 권사님의 눈물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내가 잘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이 장로교회의 장로여서 면회를 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어요. 한 달에 한 번씩 평양에서 흥남에 다녀와야 하니까 여간해서는 갈 수 없었어요. 하루는 기차 안에서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내가 문 선생님 면회 가는 것 다음 달부터는 그만두겠습니다.’라고 했더니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났어요. “왜 면회를 안가려 하느냐? 지금은 그늘 속에 파묻혀 냄새나는 옥중에 있지만, 그 선생님은 보통 분이 아니시다. 앞으로 전 세계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모여들 때가 온다. 그러니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계속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로 계속해서 면회를 다녔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감동을 받은 한편 놀랐습니다. 아버님께 세계인들이 찾아와서 배우며 머리를 숙일 때가 온다는 말씀에 나도 기도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심을 버리고 아무리 진심으로 기도해도 그런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 가서 진심으로 기도를 드리는데 “살아 계시는 인류의 부모이신 아버지 하나님, 이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습니다. 음성으로든지 환상으로든지 나타나서 알려 주고 들려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음성은 빌립보서 3장 20절의 말씀이었습니다.
“네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셨나니라.” 하는 음성이 세 번이나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주위와 천장을 살펴보았으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음성을 낼 만한 사람이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를 살펴보았으나 텅 빈 교회당에 나 혼자뿐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산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아버님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기도 중에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무슨 음성인데….” 하셔서 그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전도사님, 그러다간 미치겠네요.” 하며 웃으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잘, 또 바로 믿으려는 것뿐인데 미치면 어떻게 됩니까?”
“미쳐도 하나님을 위해, 선을 위해 미친다면 좋은 것이니 안심하십시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음성을 들은 후부터가 문제였습니다. 이 길을 가야 되느냐, 안 가야 되느냐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때의 환경을 보아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방은 다다미 두 장의 넓이도 안 되는데다 비가 새는 토굴 같은 데서 예배를 보고, 예배인원도 두세 명뿐이니 믿기가 힘들었습니다. 말씀은 엄청나게 높은 내용이어서 들을 때 수긍이 갔지만, 조금만 지나면 의심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마음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얼굴색을 바꾸어 가면서 하나님이 지어 주셨던 본연의 얼굴을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채 남을 의심하는 인생 길을 살아 오지는 아니했나?’ 하고 내 마음은 답답하고 괴로웠습니다. 
‘내가 왜 별스럽게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가? 장로교회를 다니며 예수를 믿어도 얼마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데….’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앞서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는 예배를 마친 다음에 신자들이 인산인해로 쏟아져 나오는데, 이곳은 두세 사람뿐이니 도저히 내 자신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동시에 장로교회에서 신앙을 계속 지켜 나간다는 것도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허망한 것을 참된 것으로 알고,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으로 생각하며 어리석은 자신을 영리한 줄 알고 거짓과 가식으로 자기를 위장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온 것 같아서 괴로웠습니다. 
극심한 내적인 갈등 중에도 아버님께는 무슨 인력(引力)이 있는지 매일 말씀을 듣기 위해서 찾아갔습니다. 마치 자석에 철분(鐵粉)을 부은 것 같았습니다. 그때는 워낙 어려운 시절이었으나 내 마음은 무엇이든지 해 드리고 싶어서 며칠에 한 번씩 김치를 해서 드리기도 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내가 김치를 맛있게 담근다고 기억하고 계셨지만, 아마도 그 시절에는 워낙 먹을 것이 귀하던 때라 그렇게 기억하시는 듯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절에 나도 넉넉지 않는 상황이라 양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김치를 담궈 드린 적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버님께서 맛있다고 하셔서 김치며 멸치며 여러 반찬들을 만들어서 드리곤 했습니다. 
매일 아버님께 가게 되니 교회에서도 알게 되고, 학교에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어떤 젊은 청년을 쫓아다닌다고 색안경을 쓰고 나를 보게 되었고, 1952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선택의 기로
그 뒤로 나는 계속 시험에 들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나에게 다른 사람들도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평소 존경하던 전도사, 같이 공부하던 신학생, 교회에서 신앙심이 깊은 집사 등 많은 사람들을 아버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사람들이 말씀을 들은 후 “강 선생이 이상한 것 같아. 이게 무슨 진리인가? 성경에도 없는 이야기만 자꾸 지어서 하는구먼!” 하며 모두 불신했습니다. 한 사람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정말로 내가 잘못된 것인가?’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수긍이 가니 힘이 나고 좋다가도 말씀을 다 듣고 집으로 갈 때는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내가 데리고 온 사람들 가운데 신도가 수백 명이 넘는 교회의 전도사도 있었고, 신학교에서 수재라는 평을 받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범천교회에서 신앙심이 깊기로 소문난 사람들도 많이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아무도 아버님의 말씀에 공명(共鳴)된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다 나를 이상하다고 하니까 갈등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니라고 하는데, 나 혼자만 옳다고 하면 되는 걸까? 나도 이제 그만두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면, 아버님께서 나를 대하시는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내가 의심을 하면, 아버님께서 나를 거리를 두고 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내가 의심하는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어쩌면 내 속에 들어와 계시는 것처럼 나를 알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한 번도 아버님께 내 마음의 갈등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의심을 한다든지 불신을 하는 마음이 생기면, 아버님은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있는 듯 아셨습니다. ‘하나님같이 내 마음을 꿰뚫고 계시는 분이구나.’ 하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말씀을 들은 후 집으로 돌아가면서 부정적인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다들 아니라고 하는데, 나만 옳다고 하는 건 뭔가 잘못된 것이다. 나보다 예수님을 오래 잘 믿어온 사람들, 신학을 오래 공부한 이들도 모두 아니라고 하는데 내가 뭐라고 혼자 옳다고 하는가? 나 혼자 옳다고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교회에서 욕만 먹고, 신학교에서는 미쳤다는 말까지 들었다. 이제 정말 그만두어야 되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그때 물이 내려가는 더러운 하수도에 발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더러운 물에 발이 빠지자 ‘내가 의심을 하고 그만두어야 되겠다고 결심해서 벌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그런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갈등이 최고조에 달해서 도저히 안되겠다고 결심을 하면, 그런 예상치 않은 사고가 계속 일어났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아버님께 들은 말씀을 분석도 해 보고,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인가를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주위에서 모두 나에게 미쳤다, 이상해졌다고 했기 때문에 마음속 갈등은 더 심해졌습니다. 
어떤 날은 밤에 몽시를 보기도 했습니다. 귀신 같은 시커먼 것이 나타나 나를 묶어서 어두운 지옥 같은 곳으로 데리고 가는 몽시였습니다. 그런 꿈을 꾸고 난 날은 귀신에게 홀려서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버님을 만나고 나서 몽시로 많은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 내용을 잊을까봐 꿈에서 깨었을 때 바로 메모를 하려고 머리맡에 노트와 필기도구를 두고 자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8월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내가 그만두어야 되겠다. 이렇게 내가 핍박을 받고 사람 취급도 못 받아서 더 이상은 계속하지 못하겠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나를 바람난 여자, 방탕한 여자로 보니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먹고 아버님을 찾아 올라갔습니다. ‘오늘은 절대 방에 들어가지 말고 바깥에서 인사만 드리고 돌아와야지!’ 하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습니다. 방안에 들어가서 말씀을 들으면 또 말씀에 빨려 들어갈지 모르니 밖에서 인사만 드리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도착하니 아버님께서 밖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버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 이제 이곳에서 말씀 듣는 것을 그만두겠습니다. 예전에 믿었던 예수, 장로교에서 믿었던 예수를 믿겠습니다.”라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드리려고 아버님을 쳐다보았더니 어제까지 다정하고 인자해 보이던 아버님의 얼굴이 성난 호랑이의 얼굴처럼 보였습니다. 막상 아버님의 얼굴을 뵈니 자신이 없어져서 ‘집으로 돌아갈까,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혼자 하고 있는데 아버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안 하시고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인사도, 아무런 말씀도 안 하시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시니 나는 또 갈등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왕 왔으니 하직 인사라도 하고 가야겠다 싶어서 나도 방으로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아버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 
무언으로 30초 정도 계시더니 “오늘 여기에 올라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어요?”라고 물으셨습니다. 
“아무 생각한 것 없습니다.”라고 했더니 “생각한 것이 있는데요?”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젊은 사람이 왜 금방 생각한 것을 기억하지 못해요? 지금 여기로 올라오면서, 소나무 모퉁이를 돌면서 다음부터는 이 길을 가지 않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늘 여기에 온 것은 하직 인사를 하러 온 게 아니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데, 나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의 가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한 것을 그대로 말씀하시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나에게 아버님께서는 “나는 사실 힘이 있는 사람이요,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장사를 해도 내가 멋있게 잘해서 돈을 벌 수 있고, 또 취직을 한다고 해도 내가 지금보다 잘 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정 이도 저도 안 되서 부둣가에서 노동을 해도 이보다 더 잘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이 젊은 사람이 여름에도 겨울옷을 입고 다다미 두 장의 넓이도 안 되는 방구석에 죽치고 앉아 있겠어요? 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미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데 나는 분명히 미친 사람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데, 내 가슴이 섬짓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아직 미쳐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데 미쳐 보지 못했는데 이분은 역시 대단한 분이로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미친 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데 미친 분을 따라서 나도 좀 미쳐 봐야 되겠다.’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때 아버님께서 나에게 “정 안 믿어지면 보따리를 싸 가지고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다시 돌아올 것인데, 왜 헛수고를 하려고 해요?”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이것이 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조변석개(朝變夕改)라고 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마음이 달라지는데, 나도 내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날이면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5분 후에 무엇이 다가올지 모르며 사는 것이 인생이다. 내일로 끝나게 되어 있는 목숨인데도 불구하고 천년 만년 설계를 세워 자기를 위해서는 발이 닳도록 헐떡거리며 뛰어다니면서도 정작 자기의 소중한 영혼을 위해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줄 모르는 슬픈 길, 불쌍한 길을 걸어오지나 아니했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거짓과 가식으로 내 자신을 위장하는 슬픈 인생길을 가고 있지나 않은가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의심과 역사의 반복
어느 날은 내가 배운 신학교의 이론으로 아버님이 그때까지 말씀해주신 원리와 대비해 토론하기 위해서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예수님을 믿는 데 무슨 숫자가 필요합니까? 40일, 40년, 400년, 4천 년으로 4수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시는데 나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렇게 이뤄졌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그리고 입에서는 피까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은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아버님께서 내 턱에 손을 댔는데, 거짓말처럼 피가 멎고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이렇게 아픈 곳을 고쳐 주시니 내가 이 길을 가야 할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어느 날 아버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날 따라 아버님의 옷차림과 집이 너무도 누추하게 보였습니다. 엄청난 말씀을 하시는데, 누추한 모습을 보자 역시 이론이지 실제로 실현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얼굴을 살피시던 아버님께서 “성경을 아무 데나 펼쳐 봐요.” 하셨습니다. 성경을 펼쳤더니 마태복음 14장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31절을 읽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적게 믿는 자여, 왜 의심하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성경을 들고 “이것은 내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적게 믿는 자여, 왜 의심하느냐고 하시는데도 의심하겠어요?” 하시며 꾸짖었습니다.
그러시면서 “앞으로 이 원리로써 기독교가 통일될 날이 올 겁니다.”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기독교가 통일되려면 각 종파의 대표들이 모여서 회의도 하고 그 방법을 모색해야지 이 범냇골에서 겨우 세 사람이 통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는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내 말을 들으시더니 웃으시면서 “지금은 힘들어 보이나 얼마 안 가서 그렇게 됩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종교도 통일되고, 세계도 통일되고, 천주도 통일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천주는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천주는 하늘과 땅을 말해.”라고 답하셨습니다.

어느 날은 광복동 국제시장 앞을 걸어가다가 싸우는 남자와 여자를 보았습니다. 두 사람은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피투성이가 된 채 싸우고 있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불평을 했습니다. ‘저렇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언제 지상천국이 이루어질까? 천국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도저히 믿기 어렵다.’고 하자 아무리 걸어가려고 해도 양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발이 저린 듯 아파오더니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하나님, 어쩌자고 내 마음대로 생각하지도 못하게 하고 마음대로 걷지도 못하게 하십니까?” 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길거리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가슴팍으로, 두 눈으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에게 몇 번이고 나타나서 가르쳐 주었는데, 너는 그래도 불신하고 의심하느냐? 너는 할 일이 많은 사람이야. 저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저들의 생명을 아버지의 사랑 속으로 인도해야 할 전도사란 말이야!” 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나의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결국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하고 회개했더니 아픈 발이 땅에서 떨어져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겪은 일을 거짓말이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직접 경험한 나에게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뒤에도 참스승을 매정하게 걷어차 버리면서 나를 노리는 사탄에게는 묘하게 웃으면서 그와 한편이 되려고 하던 불신의 마음을 꾸짖어 보았습니다. 

의문과 계시가 반복되던 어느 날, 나는 담판기도를 했습니다. 그 내용은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느 길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은 어떠한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을 주셨습니다. “내가 6천 년간 섭리하고 역사해 온 길이 바로 이 길이다.”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후로 하나님은 내 마음대로 생각하며 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인연을 맺고 살 수 있도록 징계하시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담판기도를 했을 때도 응답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때 나는 금식을 하면서 담판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내 생명이, 내가 귀하다는 것을 느끼고 압니다. 어느 누가 지옥가기를 좋아하고, 어느 누가 자기가 망하는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를 드리니 정말로 이 길이 바른 길인지 아닌지 알려 주십시오. 내게 바르게 알려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그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문선명 선생은 내가 지금까지 땅을 대해서 수고하고 땅에서 구원섭리를 역사해 왔던 모든 전체를 계승해 준 사람이다. 그는 그렇게 귀하고도 큰 역사를 하고 있다. 2천 년 전 예수가 땅에서 이뤄야 했던 사명, 내가 6천 년 동안 이끌어 왔던 역사를 하고 있다. 그런 모든 사명을 계승한 자가 바로 문선명 선생이다.”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 응답의 은사로 말미암아 내 갈 길을 확실히 정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생활의 중심을 아버님께 두었습니다. 이 길을 가다 죽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분이 바로 내가 사모하고 기다려 왔던 메시아, 구세주, 재림주임을 믿고 모시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님께서 나에게 “내일은 누구를 만날 것인데, 그에게 전도를 해보시오.” 하셨습니다. 다음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권사 한 사람을 우리 집에 데리고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권사님,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만나서 구원을 얻는 것 아닙니까? 그 주님이 언제 어떻게 어느 땅에 오시는지 우리 같이 기도 한 번 해봅시다.”라고 했습니다.
이후에 새벽마다 냉수 목욕을 하고, 그 권사와 기도시간은 따로 가졌습니다. 며칠 후 그 권사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불이 켜진 전구 세 개가 보이고, 그다음에는 무궁화 세 송이가 보이고, 예수님의 얼굴이 그 위에 나타난 환상이었습니다. 
그 권사는 환상으로 본 것이 무엇인가를 놓고 다시 기도를 했습니다. 그 결과 “전구는 밝은 빛을 가리키고, 무궁화는 한국을 의미하며, 예수님의 얼굴은 다시 오시는 주님을 뜻한다.”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한 번만 기도해서 해결이 다 되었다고 볼 수 없으니 또 한 번을 기도해 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역시 같은 제목으로 기도를 드렸는데 “전도사님, 이번 기도는 실패했습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을 보여 주시는군요.”라고 권사가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이상한 산이 하나 보이고, 그 다음에는 키가 훤칠한 청년 한 사람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말을 듣고 나는 그 권사를 데리고 아버님이 계시는 곳에 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곳으로 가던 도중에 그 권사가 나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전도사님, 이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이 이상합니까?” 
“저기에 보이는 저 산이 오늘 새벽 기도할 때 본 산입니다.” 
아버님이 계시는 집의 문 앞에 다다랐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이 집은 내가 기도할 때 본 집하고 같군요.”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아버님께서 문을 열고 나오셨습니다. 아버님을 뵙더니 그 권사는 환상으로 본 분하고 꼭 같다고 하면서 너무 기뻐하며 아버님께 공손하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 권사가 집으로 돌아간 후 아버님께서는 “권사님에게 환상을 보여 주신 것은 강 전도사가 너무 믿지를 못해서 권사님의 증거를 통해 믿도록 하신 것입니다.”라고 말씀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하루는 신학교의 설립자인 한상동 목사가 서면에서 부흥회를 한다는 소식을 아버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러면 강 전도사가 가서 만나 보지!”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신학박사이며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7년이나 옥살이한 목사였습니다. 평소에 존경하던 사람이었기에 영계에서 협조해준다면 문제가 없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찾아갔습니다. 부흥회가 끝난 후 그 목사에게 “목사님, 요즈음 제가 굉장히 말씀을 잘하는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성경 66권의 의문점을 확실하게 풀어주는 분입니다. 이상하게도 의심을 하면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고, 벙어리가 되고, 발이 땅에 붙어 버리는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목사님도 가서 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하고 나의 신앙체험을 말했습니다.
내 말을 들은 그 목사는 얼굴빛이 금방 달라졌습니다. “장로교의 예수님을 믿어도 구원을 얻을 것이 분명한데, 왜 다른 데로 갑니까? 당장 발길을 끊고 가지 마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긍정적인 대답을 듣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아버님께 “영계에서 협조해 줄 것을 믿고 갔는데 통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때 내 심정은 지옥이었습니다. 
내 보고를 들으신 아버님은 “한 목사가 누굽니까? 그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언젠가 알 때가 옵니다.” 하시면서 찬송을 부르자고 하셨습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아니 버리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마음 속에 차고도 넘쳐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
 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의 길 되시고
 나에게 밝은 빛이 되시니 길 잃어버릴 염려없네.

아버님과 옥세현 모친 그리고 나까지 세 사람이 찬송을 부르고 또 부르면서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 “하나님 아버지, 왜 남들이 아니라는 길을 가야 합니까? 아버지와 약속한 그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 하여도 나는 기필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하는 내용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반대하지만 하나님의 뜻이기에 나는 출발했으며 이 길을 가야하고 꼭 승리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습니다. 
언젠가 아버님께서 “강현실은 영계에서 전도한 거야.”라고 하셨는데, 아마 당시에 내가 의심을 하고 심령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사건이 생겨서 의심을 못 하도록 막았던 역사가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토담집 생활의 시작
결국 9월이 되었을 때는 범천교회의 전도사직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매일 전도사로서의 직분은 다하지 않고 아버님만 뵈러 다니니 교회에서 당연히 안 좋은 소문이 돌았습니다. 교회 일을 소홀히 하고, 신학교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은 것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교회의 책임자가 교리적인 심문을 해 왔습니다. 당회가 아버님의 말씀을 교리적으로 틀린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 교회의 목사는 절대적인 예정설을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예정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믿고 따르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인간에게 책임분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냥 믿고 따르는 것도 다 책임이며,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대로 내가 행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해야 될 5퍼센트의 책임분담이 있다는 것을 말했더니 그 목사는 “교리적으로 강 전도사가 말하는 것은 틀립니다. 우리 신학교에서는 칼빈의 예정론을 절대적으로 믿습니다. 절대예정론을 믿지 않는다면 더 이상 전도사직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회에서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범천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그만두었을 때는 바람이 한결 서늘해진 때였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교회에서 제공하는 사택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임직했던 교회와 생활했던 공간 모두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나에게 아버님께서는 “보따리를 싸서 들어와라.” 하셨습니다. 결국 나는 아버님이 계시던 토담집에 들어가서 생활했습니다. 
신학교의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했지만 갈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3학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입학한 학교에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된 것은 아쉬운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때 옥세현 모친이 나에게 어느 학교에 다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고려신학교에 다닌다고 했더니 웃었습니다. ‘왜 저 분이 고려신학교라고 하니까 웃으실까?’ 했더니 “우리 영감도 고려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어요.” 했습니다. “정말요? 누구신데요?” 하니 “우화섭 장로입니다.” 라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우 장로는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신학교에서 가장 어린 학생이었고, 우 장로는 가장 나이가 많았습니다. 공부를 하다 모르는 한자가 있을 때면 우 장로에게 찾아가 물어보곤 했었습니다. 
“아, 그러세요? 제가 잘 아는 분인데요.”
“아이고, 그래요? 얼마나 우리 영감이 반대를 하는지 몰라요.”라고 해서 같이 웃은 적이 있습니다. 이후에 장충동교회 시절 그 장로를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우 장로는 옥 씨 모친과 이혼을 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때 그는 나에게 “내가 부인을 사랑했습니다. 지금도 옥 씨 어머니는 사랑하지만 신앙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는 형편이라 이렇게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그래도 내가 마음이 놓이는 것은 강 선생이 이 길에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되니 조금은 안심이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범냇골 생활
범냇골 토담집에서 살 때 가장 오래 같이 있었던 분은 김원필 선생이었습니다. 그분은 매일 아침에 미군부대로 일하러 나갔다가 저녁 늦게 돌아왔습니다. 늘 같은 새까만 점퍼를 입고, 표정도 변하지 않고 다니던 참 조용한 분이었습니다. 언제나 말없이 본인의 일을 묵묵히 계속했는데 아버님께 절대적이었습니다. 
몇 년 동안 보았는데도 같이 대화를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늘 한결 같은 모습으로 미군부대로 출퇴근하면서 정성을 들이던 성실한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퇴근해서 돌아온 뒤에도 미군들 가족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했습니다. 아버님은 김원필 선생을 돕기 위해 인견천(인조 견사로 짠 직물)에다가 풀을 먹여서 틀에 붙이는 일을 하셨습니다. 풀을 먹여 틀에 붙인 뒤 햇볕에 말리면 팽팽해졌습니다. 그러면 아버님께서는 얼굴을 그리기 쉽게 연필로 선을 그어 놓으셨습니다. 나도 아버님을 도와 그 작업을 했지만 김원필 선생과는 이야기를 많이 해 보지 못했습니다. 워낙 말이 없고, 나에게는 조용히 목례로 인사만 했습니다. 
그리고 옥 씨 어머니가 같이 있었고, 가끔 옥 씨 어머니의 딸들이 다녀가곤 했습니다. 또 엄덕문 선생이 가끔 주일에 찾아 왔습니다. 엄덕문 선생은 범냇골 토담집 초라한 방에 어울리지 않는 양복 한 벌을 아버님께 드렸습니다. 
그 양복은 엄 선생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올 때 가지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피난올 때 겨우 챙겨 온 양복 한 벌을 아버님께 드릴 정도로 아버님을 존경하고 귀하게 생각하던 분이었습니다. 그 양복 덕분에 한결 방안이 돋보였습니다. 연한 밤색 바탕에 붉은 줄이 있는 세련된 양복이었습니다. 
엄 선생은 주일이면 늘 아버님이 계시던 곳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노래로 아버님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 드렸습니다. 맑은 목소리로 ‘몽금포타령’, ‘백로야 울지 마라’, ‘동산의 봄노래’ 등을 부르곤 했습니다. 그 노래를 들으시던 아버님의 표정이 매우 기쁘신 것 같았습니다. 
이기완 권사도 가끔 왔습니다. 이기완 할머니는 아버님께서 하숙하셨던 흑석동 하숙집 주인의 언니였습니다. 그분은 김백문 씨를 따르던 분이었는데 아버님의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이분은 한국의 큰 부흥사가 되시겠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리시면서 기도하시는지 그 모습만 봐도 감동과 은혜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기도하신 자리를 보면 걸레로 눈물을 닦아야 할 정도로 눈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는 걸 봤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고개가 숙여지고 존경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당시에 고등학생이어서 학교에 일찍 가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기완 할머니는 제일 먼저 아버님의 밥을 퍼서 갖다 드렸답니다. 남편이 보면 오해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아버님은 십대 후반의 소년이었고, 이기완 할머니는 삼십대의 주부였지만 각별하게 챙기고 모시는 것이 이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구박도 많이 받고, 방망이로 얻어맞은 날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범냇골 토담집 시절에는 주일에 예배를 드렸지만, 특별한 형식은 없었습니다. 어떤 날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서 아버님을 모시고 옥세현 어머니와 김원필 선생 그리고 나까지 네 명이 예배를 드린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 날은 나도 모르게 힘이 빠졌습니다. 세계 인류를 구하는 진리의 말씀이라면 오는 사람이 많아야 하는데 서너 명이 앉아 예배를 드리니 과연 이 말씀으로 기독교 통일, 세계 통일이 이루어지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눈물의 보리밭





가정적 고난의 십자가
1952년 11월 중순, 늦가을이었습니다. 그날은 몹시도 날씨가 추웠습니다. 얼굴이 희고 깨끗한 30대 젊은 부인이 한 남자아이를 데리고 범냇골 토담집을 찾아왔습니다. 젊은 부인은 회색 공작털실로 짠 스웨터에 곤색 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있었으며 남자아이는 색동두루마기를 곱게 입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보따리를 하나 들고 왔는데, 분위기가 아주 날카로웠습니다. 오자마자 신발도 벗지 않고 바로 방안으로 들어가 아버님께 언성을 높이면서 자기가 살아온 한풀이를 했습니다. 그분이 최선길 여사였습니다. 7살 된 아들을 데리고 아버님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7년 동안 혼자 아들을 키우면서 갖은 고생을 다한 것 같았습니다. 귀한 아들을 잘 키워 보려고 장사까지 했다는 말을 들으니 나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랬는데 아버님께서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 편지 한 통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기가 막힐 만도 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누가 말릴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아버님께서 아들이 하나 서울에 있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못했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최 여사가 왔기에 더 이상 작은 토담집에서 같이 지낼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날로 근처에 살던 식구 할머니 댁에 가서 잠을 잤습니다. 
더 이상 그집에서도 신세를 질 수 없어서 고향집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우리집은 영주에서 점촌으로 이사를 해서 점촌 시골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을 만날 수도,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외롭고 답답한 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때 아버님께서는 몇 차례의 글월을 주셨습니다. 내용은 2천 년 전 예수님께서도 가정적으로 어려운 짐을 지고 말 못 할 고충을 겪었는데 아버님 역시 그와 같은 길을 가고 계신다는 내용이었으며, 하나님의 뜻은 기필코 이루어지니 먼 후일을 바라보고 참으며 나가자는 내용으로 격려의 편지였습니다. 그리고 부산으로 오지 말고 열심히 전도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편지봉투의 주소가 범냇골이 아니라 수정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떠나 있는 동안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참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버님이 얼마나 많은 고충 속에 계시는지 걱정도 되었고, 뵙고 말씀을 들어야 막힌 가슴이 좀 편안해질 것 같았습니다.
1953년 1월에 아버님을 너무나 뵙고 싶어서 점촌에서 상주까지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상주에서 기차를 타고 가려는데 제2차 긴급통화금융조치, 즉 제2차 화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전쟁 중에 남발된 통화로 인한 물가상승을 잡기 위해 100원을 1환으로 개혁하는 조치로 기차표를 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음력 1월 6일(양력 2월 19일) 아버님의 생신 때는 꼭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찰떡을 미리 준비해서 하루 전날에 부산으로 떠났습니다. 2월이어서 날씨가 너무 추웠습니다. 이번에는 점촌에서 김천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김천에서 부산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기차가 연착되어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12시가 넘은 시각이었습니다. 통행금지 시간이었기 때문에 역무원이 손바닥에 큼직한 도장을 찍어 주었습니다. 부산진역에서 범냇골까지는 꽤 먼 거리였습니다. 
수정동은 처음 가 보는 곳이라서 지리도 몰랐고, 이미 통행금지 시간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범냇골로 향했습니다. 부산진역에서 범일동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습니다. 트렁크를 하나 들고 걸어서 겨우 토담집에 도착했습니다. 아버님께서 혹여 계시지 않을까 하고 갔지만 계시지 않았습니다. 
가 보니 토담집에는 최 여사만 살고 있었습니다. 방에는 들어갈 수 없어서 방 앞에 쳐 놓은 천막으로 들어갔습니다. 부엌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는데, 거기서 그날 밤을 지내고 아침에 수정동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은 너무 추워서 발이 시려 견딜 수 없었습니다. 결국 발을 동동 구르며 그날 밤을 샜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심한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내가 점촌으로 내려간 다음에 최선길 여사는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이었습니다. 7년간 온갖 고생 끝에 찾아온 남편이었지만, 아버님은 가정을 돌보는 일보다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미쳐 계셨기에 더 많은 고충을 겪으신 것 같았습니다. 아버님을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로만 생각하려던 최 여사이니 패악(悖惡)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기만 했습니다. 결국 아버님은 수정동으로 몸을 피하셨고, 최 여사는 아버님이 어디에 계시는지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아버님을 뵙겠다고 찾아갔으니 얼마나 울화가 치밀었겠습니까?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서 한 번도 욕을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키울 때 ‘이년’ 소리 한 번을 안했습니다. 그런데 최 여사는 나에게 범냇골에 도착해서 새벽 4시에 통행금지가 해제되어 그곳을 떠날 때까지 4시간 가량 계속해서 끊이지도 않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최 여사는 아버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모르고 답답해서 더 그런 것 같았습니다. 나에게 아버님을 어디에 숨겨 두었냐고, 아무리 찾아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며 온갖 욕을 다 했습니다. 
나는 마태복음 5장 10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상 받을 것이 크리라.”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아무런 대답도 안하고 모진 욕을 감내하면서 묵묵히 천막 안에서 밤을 새웠습니다. 
통행금지 해제 시간인 4시에 그곳을 떠나 범일동 버스정류소에서 수정동행 버스를 탔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왠 젊은 여인이 큰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것을 파출소 순경이 보고는 뒤를 따라왔습니다. 수정동에서 내렸을 때 그 순경은 나를 보고 파출소에 가자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순경의 뒤를 따라서 파출소에 갔습니다. 
그때 순경은 내 신분을 알기 위해 가방을 뒤졌습니다. 나는 그때 재빨리 아버님께서 보내 주신 편지를 외투주머니에서 빼내어 버선목에 감추었습니다. 행여나 코트주머니에서 편지가 발견되면 무슨 번거로운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해서였습니다. 순경은 신학교의 학생증, 주민등록증을 보고 의심을 풀었습니다. 짐을 뒤져 봐도 성경과 찬송가 밖에 없으니 그만 가 보라며 풀어 주었습니다. 
파출소를 나와서 수정동 주소를 가지고 집을 찾았으나 도저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셋방 주소만 있으니 찾는 것 자체가 너무도 어려웠습니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며 물어 보았지만 다 모른다고 했습니다. 

호산나, 
새 주님이 오신다
안타까운 맘으로 한참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이요한 목사님이 나타났습니다. 그 목사님이 너무도 반가웠습니다. 그 목사님이 나를 아버님이 계시던 집으로 안내해주었습니다. 그 집의 근처를 몇 번이나 오르내렸지만 찾지 못했던 곳이었습니다. 도착해 보니 아침 10시경이었습니다. 
그곳도 역시 두 평도 채 못 되는 허술한 방이었습니다. 수정동 뒷산 밑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많은 피난민과 빈민들이 살던 동네였습니다. 그 집에는 아버님과 김원필 선생, 옥세현 모친, 이요한 목사 그리고 이숙희 씨라는 식구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이숙희 식구가 조반을 차려 주어서 먹었습니다. 아버님의 생신을 축하드리기 위해 해 간 찰떡을 드렸더니 아버님께서 맛이 있다고 하시면서 많이 잡수셨습니다. 
나는 아버님께 그동안 전도하면서 있었던 일과 써 두었던 글들을 보고드렸습니다. 1953년 2월 8일 주일에 홀로 뜻을 알고 있음이 너무도 안타까워 나는 이렇게 써 두었던 것입니다. 
“내가 사는 모든 중심과 목적은 뜻을 위하는 생활을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 나타나 아버지가 바라시는 그 세계, 오늘도 눈앞에 그려보니 소망은 더욱 커집니다. 아아, 멀리 계시는 영광의 주님이 오늘도 그리워집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이 길, 영광의 승리를 바라고 걸어가는 내 자신이 더욱 힘찬 걸음으로써 뜻을 실현해야 하겠습니다. 우주의 만민들이 내가 알고 있는 세계를 찾아서 믿을진데 그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인가? 지금 나는 정말 외롭습니다. 그러나 참아버지를 내가 바라보니 할렐루야, 영광일세! 나의 원하는 소원을 하늘의 아버지, 이루어 주소서. 아버지, 나를 멀리하면 나는 살 수 없어요. 세상의 더러운 인간적 사랑, 또 세상적 사랑을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하늘의 한 줄기 생명 있는 사랑을 받고자 하오니 이 사랑이 내 생명이 되며 내 소망이 되어 가는 앞길에 광명의 빛이 되소서! 험산준령과 같은 어려운 십자가의 고통을 감사함으로 극복할 수 있게 해 주소서! 십자가로서 승리하신 주여! 십자가의 고난에 나도 동참케 하시옵소서, 아멘!”
나는 너무도 안타까워 이렇게 혼자 글을 쓰면서 하나님께 호소했다고 아버님께 보고드렸습니다. 그리고 오천에 살던 한 권사의 이야기도 해 드렸습니다. 
경상북도 산양면 오천에 살던 권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분을 오천 모친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그분에게 하나님의 섭리가 어디서 누구를 중심하고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말씀했습니다. 그랬더니 오천 모친이 기도 중에 직접 “호산나로다. 한국 땅에 주님이 오신다, 하늘이 낮아지고, 땅이 솟으며 호산나로다. 새 예루살렘이 한국에서 이루어지이다.”라고 계시를 받았습니다. 오천 모친은 이런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나만을 사랑해 주시는 줄 알았는데 나보다 강 전도사를 더 사랑해 주는 것 같다.’고 나에 대하여 증거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아버님께 보고드렸더니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현실이가 너무 외로워하니까 하나님께서 증거해 주는 역사를 하신 것이구나.”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신령한 이들, 또 영통한 이들은 다 우리 편이며 우리를 중거할 것이다.”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또 나는 오천 모친에게 주님이 어떻게 오시는지 기도해 보라고 했습니다. 기도 후 오천 모친이 대답하기를 “주님은 이미 와 계시는데, 이 일은 강 전도사가 이미 알고 있는 일이오. 한국 땅에 주님은 이미 오셨으며, 어둠의 골짜기에 주님의 밝은 빛이 비쳐 올 것이라고 응답이 왔습니다.” 하고 자신 있게 ‘이미 오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 받으시던 아버님의 표정이 매우 환했습니다. 이런 보고를 오후 4시까지 6시간 동안이나 드렸습니다. 보고를 다 들으신 후 아버님은 “세상은 어두워 알지 못하지만, 영계는 다 알고 있다. 특히 영통을 하는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또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이 뜻을 인정하고 있으니 용기를 잃지 말고 싸우자!”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핍박과 조롱을 견디다
오후 4시경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나는 뒷산에 올라가서 바람을 좀 쏘이고 오겠다.”고 하시면서 집을 나가셨습니다. 이숙희 씨와 나는 저녁준비를 하느라 쌀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헌병대 군인 2명과 옥세현 모친의 아들 그리고 최 여사가 들이닥쳤습니다. 
헌병대 군인 2명은 국방색 양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들 일행은 들어서자마자 반말을 하며 우리를 방으로 밀어뜨렸습니다. 옥세현 모친, 숙희 씨 그리고 나는 방으로 떠밀려 들어갔습니다. 그 방에 불을 지르겠다던 최 여사의 목소리도 들려왔습니다. 또 어떤 이는 아버님의 성경을 발기발기 찢기도 했습니다. 
그 방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최 여사는 부엌살림을 전부 내던졌습니다. 밥그릇, 쌀바가지, 수저, 항아리 등을 던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언덕 아래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려고 모여들었습니다. 나는 심장이 약해서인지 혹은 신앙의 중심이 잡히지 않아서인지 너무도 떨렸습니다. 그리고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나는 헌병대 군인에게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며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버님이 어디에 계실까 하고 산을 쳐다보았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산으로 좀 올라가다가 주위가 어두워지고 무섭기도 해서 그냥 내려왔습니다. 수정동 아랫길로 내려오는데, 다리가 너무 떨려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때 예수 믿는 길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누가 이 길을 갈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침 다리를 건너서는데 김원필 선생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내 손을 꽉 잡으면서 “언제 왔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어젯밤에 왔습니다.” 했더니 “옥세현 모친이 수정동 전차정류소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같이 갑시다.” 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잠시 몸을 피하려면 돈이 있어야 될 겁니다. 모아 둔 달러를 문틀 위에 숨겨 두었으니 내가 집에 잠시 들러서 그 돈을 찾아오겠습니다.” 하면서 집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김 선생을 기다리는 동안도 나는 혹시나 헌병대와 마주칠까봐 가슴이 떨렸습니다. 잠시 뒤 김원필 선생이 빈 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집 주위에 헌병대 요원들이 지키고 있어서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나와 김 선생은 전차정류소로 걸어 내려 갔습니다. 그곳에는 옥세현 모친이 혼자 처량하게 서 있었습니다. 한 10분쯤 있으니 이요한 목사님이 전도를 나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우리 일행 네 사람은 어디로 갈까 망설였습니다.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참 생각한 끝에 김성실 씨 댁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때 김성실 씨는 이요한 목사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성실 씨 댁은 염주동이었으므로 우리는 전차를 타고 성실 씨 댁을 찾았습니다. 그때는 피난시절이었으므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성실 씨 집은 적산 가옥으로 단칸방 옆에 좁고 긴 낭하(廊下)가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거기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좁은 복도같이 생긴 곳이었기 때문에 다리를 뻗을 수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쪼그리고 앉아서 밤을 새웠습니다. 그곳에서 밤을 새면서 나는 ‘아버님이 정말 재림주님으로 오셨다면, 먼 후일의 역사가 오늘을 증거할 것이다. 아버님께서 얼마나 모진 반대와 박해를 받으셨는지 역사는 알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 우리 일행의 심정과 표정들은 초췌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한편 아버님은 산에서 그날 오후의 상황을 다 보고 계셨다고 하셨습니다. 상황을 보니 ‘장본인이 나인데 내려가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셔서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집안은 온통 도깨비집 같이 많은 물건들이 흩어지고 부서져 있었습니다. 헌병대 요원들은 아버님을 이끌고 수정동 가까운 데 있는 동부경찰서로 갔습니다. 그때 숙희 씨가 함께 그 뒤를 따라갔는데, 최 여사가 걷고 계시던 아버님 옆에서 너무도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길을 걷던 사람들도 그 소리에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볼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 남자가 무슨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기에, 저 여자에게 저렇게 심한 욕을 먹으며 갈까?’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 모욕을 그대로 견디셨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아버님이 그렇게 조롱을 받으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먼 후일에 인류는 통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 아버님께서는 가정적인 십자가로 인해 모진 핍박을 받으셨으며 사회로부터 조롱당하고 욕설을 들어야 했습니다. 
동부경찰서에 도착해서 취조를 받으셨는데, 마침 그때 그 경찰서에 김원득 씨가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김원득 씨는 아버님께서 흥남감옥에 계실 때 같이 수감되어 있던 죄수였는데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전도된 사람이었습니다. 김원득 씨는 아버님이 보통 분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건의 본질을 바로 알고 잘 처리해 주었습니다. 그 사건을 가정적인 문제라고 정리하고 아버님을 경찰서 숙직실로 모셔서 하룻밤을 주무시게 한 뒤 다음날 댁으로 가실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김원필 선생은 직장으로 나가고, 이요한 목사님은 다시 전도를 나가고 난 뒤 나는 다시 수정동으로 갔습니다. ‘집이 어떻게 되었는지, 일이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가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전 11시쯤 수정동에 도착하니 아버님께서 집에 계셨습니다. 아버님은 집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시고는 성진 모자가 여기로 올 것이니 어서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너무 놀란 나는 다른 곳으로 피해야겠다며 그 집을 나섰습니다. 
그 순간에 집으로 들어서던 최 여사와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다짜고짜 내 뺨을 때렸습니다. “이 미친년이 여기까지 따라왔네!” 하면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심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온몸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간신히 그 자리를 피해 수정동 집 뒤에 있던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심장이 떨리고 어지러웠습니다. 정신없이 언덕 위에 올라가 보니 아래 보리밭에 보리가 파랗게 뾰족뾰족 올라온 것이 보였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내 마음은 너무나 답답하고 무거웠습니다. 
나는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저로 하여금 담력과 용기를 가지게 해 주시고 이보다 더 큰 시험이 내게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기쁜 맘으로 승리하게 해주십시오. 뜻이 아니라면 가는 길을 막아주십시오.” 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12시가 훨씬 지나서 김원필 선생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현실 씨, 집에 갑시다. 최 여사가 회개했어요.”라고 하던 말을 믿을 수 없어서 한참을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음이 진정된 뒤 김 선생을 따라 내려 갔습니다. 도착해 보니 아버님께서는 최 여사에게 많은 말씀을 해 주시고 계셨습니다. 그 귀한 말씀에 최 여사도 감동되어 회개하면서 “나도 이제는 한 식구가 되어 이 길을 가겠습니다.” 하고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통곡의 아리랑 고개
아버님께서는 내가 돌아온 것을 보시더니 최 여사에게 옥 씨 모친과 나에게 잘못했다고 빌라고 하셨습니다. 최 여사는 자존심이 있어서 주저하는 빛이 보였으나, 결국 우리에게 잘못했다고 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성진 엄마는 옥 씨 모친을 딸 같은 입장에서 잘 섬기고 강현실에게 동생같이 대하라. 옥 씨 모친은 성진 엄마를 딸처럼 생각하고, 강현실은 언니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내게는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이분은 참으로 불쌍한 분이시다. 남편이지만 남편으로 생각하지 않고 한 식구로서 스승으로 모셔야 하니 어떤 면에서는 참 장하신 분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최 여사에게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러자 아버님께서는 “하나님, 복귀의 길은 한 많은 길이었으며 피와 땀과 눈물로 점철되어 있는 길임을 또 새삼스럽게 느낍니다. 이 뜻을 이루어 놓으시기 위하여 아버지는 6천 년을 한 번도 쉬지 못하고 통곡하시며, 안타까워하시며 찾아오신 길임을 이 소자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소자에게 많은 기대를 거시고 뜻을 이루어 달라고 부탁하셨던 그 말씀을 저는 기억만 할 뿐 아니라 기어코 기어코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그 옛날에 이 소자를 붙들고 애원하시며 부탁하신 말씀을 저는 잊지 않고 지키겠사오니 아버지, 위로받으시며 저를 믿어 주십시오.”라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그 기도는 아버님의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심장에서부터 우러나오던 통곡의 기도였습니다. 나도 그때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옥세현 모친과 김원필 선생도 울어서 눈물이 강을 이루었습니다. 
부엌에는 멀쩡한 그릇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김원필 선생이 도시락을 싸 가지고 갔던 도시락 그릇만이 온전했습니다. 그래서 도시락 뚜껑에 빵을 담아 놓고 기도한 후 새로운 출발을 기념하며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때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아버님께서는 그때 최여사에게 마음으로 이 길을 함께 가겠다고 결심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최 여사도 식구로서 아버님을 믿고 모시고 받들어 섬기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에게 가장 넘기 힘든 고개였고 책임분담이며 숙제였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범냇골 토담집에 계실 때 근처에 따로 집을 얻어 예배를 보는데, 최 여사가 변소에서 인분(人糞)을 퍼서 뿌린 적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말을 들으니 ‘이분이 반대를 해도 보통으로 한 것이 아니구나. 그만큼 지독하게 아버님을 사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님께서 그분의 사랑에 응해 주셨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시는 분이니 문제가 계속 생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최 여사도 확실히 이 길을 가겠다고 세 사람 이상의 증인 앞에서 확실하게 약속을 했습니다. 아버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최 여사가 하늘의 뜻을 이루는 데 한 식구가 되겠다고 맹세하는 것을 보고 너무도 대견해 하시고 흐뭇해 하시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 뒤 최 여사는 서울에 짐을 가지러 올라갔다가 2주일 후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상경했습니다. 
최 여사는 서울에서 짐을 챙겨서 부산으로 왔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혼자 아들을 키우면서 불안하고 우울했던지 조석으로 마음이 변했습니다. 아버님이 조금만 잘 대해 주시면 조금 나아졌다가도 아버님께서 누구를 만나러 밖에 나가시거나 식구들과 오랜 시간 지내시느라고 본인에게 소홀하다는 느낌이 오면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마음이 180도 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만, 때로는 자기 마음이 아닌 것처럼 상식 이외의 일도 했습니다. 나는 아버님께서 언니와 동생처럼 지내라고 하셨기 때문에 최 여사의 빨래도 해 주며 가깝게 지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최 여사는 우리 교회의 식구가 된다는 것이 힘든 듯 했습니다. 예배를 볼 때도 항상 구석에 혼자 앉아 있었고 누구와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해 겨울에 내가 대구 개척을 나갔다가 12월에 부산에 잠시 갔었는데, 그때도 나를 보자마자 부엌에 있던 장작으로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저렇게 피해 보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몇 대는 장작으로 얻어맞았습니다. 게다가 나를 보고 ‘화냥년’이라고 하면서 심한 욕을 엄청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좀처럼 마음의 안정을 못 찾고 아직도 이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침에는 회개하고 저녁이면 또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식으로 마음이 변했습니다. 아마도 자기 마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특히 젊은 여자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여자들에게는 더 그런 경향이 있었습니다. 나는 범냇골 토담집에서부터 보았으니 볼 때마다 더욱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이후에 오랜 시간이 지나 1970년대에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마음이 많이 안정 되어서 서로 화해를 했습니다. 

수정동 교회의 출발
수정동 집은 뒷산 기슭, 빈민들이 살던 곳에 있었습니다. 골목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도 초라해서 내 마음까지 우울해지곤 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이웃 사람들의 시선이 늘 우리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동네 부인들이 이 집은 싸움하는 집이라고 지나가며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래서 집을 나설 때는 고개를 숙이고 나가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피해 다녔습니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시내로 나오면,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비록 생활은 어려웠어도 ‘부산의 수정동 골짜기에 하나님의 6천 년 섭리의 뜻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오신 메시아가 계시는구나. 인류의 생명을 구할 근본이신 메시아가 피난민들 사이에서 함께 고생하시는 것은 천주의 한을 풀기 위함이요, 하나님께 참효도의 도리를 다해 하나님을 위로하시기 위한 것이다. 이런 귀한 뜻을 먼저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루는 전도를 하러 시내에 나갔다 돌아오니 아버님이 아주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계셨습니다. 얼굴빛이 너무 안 좋으셔서 걱정을 하고 있는데 옆방의 집 주인 되는 부인이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옥세현 모친의 남편이었던 우 장로와 아들이 그곳으로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두 부자는 아버님을 향해 갖은 욕설을 다 퍼부으며, 아버님의 멱살을 잡고 머리를 벽에다 찧었다고 했습니다. 옆방 주인이 아버님께서 그 부자에게 많이 얻어맞았다고 알려주는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당시의 아버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너무나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시고, 매도 수없이 맞으셨습니다. 워낙 따르는 식구가 적고, 힘이 없고, 외로우신 때였기에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고 눈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 것같은 생활을 하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누가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고 폭력을 행사해도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말없이 욕을 듣고 가만히 그 매를 다 맞으셨습니다.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으시고 앉아 계시는 아버님을 볼 때 나는 마음이 아파 심장이 터져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님의 심장도 타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 하실 말씀이 없으셨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런 말씀도 안 하시고 가만히 고개를 떨구고 앉아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뒤 최 여사가 서울에서 짐을 챙겨서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집이 너무 좁아서 생활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수정동에 방 두 칸 짜리 집을 하나 샀습니다. 김원필 선생이 그림을 그려서 모은 돈으로 공사를 해서 방을 하나 더 증축했습니다. 
그런 일은 이봉운 장로가 주로 맡아서 했습니다. 이봉운 장로는 제주도에 있을 때 정성을 들이는 생활을 하며 영적으로 계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때 영적으로 강 장로의 딸이라는 젊은 여자가 앞치마를 입고 부엌에서 일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부산에 와서 보니 강 장로의 딸이라는 젊은 여자가 바로 나였다고 이야기해 준 적이 있습니다.
이사를 간 수정동 새집에서 복귀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주일 낮 예배를 볼 때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많이 모일 때는 20여 명도 모였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찬송도 취해서 부르시고, 설교말씀도 취해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어하셨던 내용을 아버님께서 대신 전달하셨기에 예배의 분위기는 언제든지 은혜가 넘쳤습니다. 진실로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바쳐 드리던 예배였습니다. 깊은 경지에 도달했을 때는 식구들이 일어서서 춤을 추었습니다. 간혹 ‘에덴 복귀!’ 하고 크게 외치는 식구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기쁨으로 화답하는 예배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어떤 식구는 방언을 하고, 어떤 이는 환상을 보고, 어떤 이는 직접적으로 계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자기를 잊고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시험에 낙제를 거듭하다
1953년 3월 말경 이사를 한 뒤 나는 7월 19일까지 그 집에서 생활했습니다. 그 집은 수정동 뒷산 밑 언덕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곳은 높은 곳이어서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으며, 수도 시설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물물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때에 나는 부엌살림 전부를 맡아서 일을 했으며, 또 거의 매일 부산 시내에 신령한 이들이나 잘 믿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말씀을 증거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 생활이 너무도 버거웠습니다. 
매일 밤 12시가 되면 물동이로 물을 긷기 시작했습니다. 밤이 아니면 물을 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밤에도 많은 사람들이 물동이를 줄 세워 놓고 기다리고 서 있었습니다. 그때에 수정동 집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열다섯 명 정도였습니다. 또 말씀을 듣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보통 하루 저녁에 물을 긷기 시작하면 20동이는 길어야 했습니다. 20동이를 기르자면 세 시간은 걸렸습니다. 어떤 때는 물동이를 이고 언덕길을 올라가다 미끄러져서 물을 다 쏟아 버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치마, 저고리, 속옷까지 다 젖었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내 몸은 야위어 갔습니다. 내 힘으론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은 시장에 가서 쌀을 두 가마니 사 왔습니다. 옛날에는 쌀에 겨가 너무도 많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키를 가지고 겨를 까불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두 가마니를 그렇게 하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 날 저녁에는 팔이 너무 아파서 머리도 잘 빗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버님께서는 내게 너무나 많은 일들을 시키셨습니다. 그때 아버님께서 나를 꾸짖은 일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이 집은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집이다. 절간에 부처를 모셔 놓은 집도 티끌 하나를 찾아 볼 수 없으리 만큼 깨끗하지 않느냐?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집이 왜 이렇게 깨끗하지 못하느냐?”고 꾸짖으셨습니다. 어느 날은 나를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화장실 위에 거미줄과 먼지가 많이 쌓여 있으니 깨끗하게 하라고 하시면서 “어떻게 이런 집에 하나님이 찾아오시겠느냐?”고 걱정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다른 식구들을 향해서는 아무런 말씀도 안 하시면서 유독 나만 보시면 그런 걱정을 하시며 꾸짖곤 하셨습니다. 
어떤 날은 손님들의 고무신을 다 씻어 놓으라고 명령하기도 하셨습니다. 나는 속으로 ‘물을 긷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데, 왜 저렇게 명령하실까? 재림주님을 모시기가 참으로 고된 길이로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 아버님께서는 여러 번 나를 시험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번번이 시험인지도 모르고 모든 시험에 낙제를 하고 말았습니다. 
한 번은 이불을 꿰매는 큰 바늘을 갖고 오셔서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만약 아버님께서 이 바늘로 나를 찌른다면 아파서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앞서서 손바닥을 폈다가 오므렸다 하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님께서는 “내가 너를 왜 찌르겠느냐? 내가 명령하는 것을 얼마나 순종하는가를 시험해 보려 했는데, 또 이 시험에 미끄러졌구나.” 하셨습니다.
또 한 번은 동네 반장이 자갈 부역을 하러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님께서는 나에게 소쿠리와 삽을 가지고 나가서 자갈 부역을 하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자갈 부역은 남자들만 하는 일이었는데 나보고 자갈 부역을 나가라고 하셔서 나는 그때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의 나는 27세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하는 일을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정 못 나가겠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나는 나가기도 싫고, 겁도 나고 해서 “저는 못 나갑니다.” 하고 부엌으로 가서 숨었습니다. 그러자 아버님께서는 부엌까지 따라 오셔서 화를 내시며 “정말로 못 나가겠느냐?”고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때서야 나는 “그럼, 제가 나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제서야 “현실이가 자갈 부역을 나가겠다고 해도 나는 보내지 않는다. 얼마나 말씀에 순종하는가를 시험했는데 또 낙제를 했구나.” 하셨습니다. 
나는 아버님께서 나를 시험하신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아니했습니다. 실제로만 생각했기에 내 입장만 내세우고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도 철없던 생활이었습니다. 문득 생각하면 불신하고 불순종하며 살아 온 과거가 부끄럽고 후회스럽기 끝이 없습니다. 

절대순종의 표본이었던 
정달옥 형님
그에 비해 당시에 나와 함께 생활했던 정달옥 형님은 절대순종의 표본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도 늘 달옥 형님이 아버님을 모시고 섬기며 따르는 데 절대순종의 표본 인물이라고 하셨습니다. 달옥 형님은 아버님께서 북한에 계실 때 말씀을 처음 접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오빠 두 사람이 목사로서 시무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어서 육신의 부모가 극도로 반대를 했습니다. 그 집안에서는 집안의 위신도 있고 해서 달옥 형님을 아버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집안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아무리 가두어 두어도 달옥 형님의 고집이 꺾이지 않자 화가 난 아버지가 칼을 앞에 놓고 “그만두겠느냐, 죽겠느냐?” 하고 물었답니다. 그렇게 협박을 해서라도 그만 나가게 하려는 마음이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달옥 형님은 칼을 들어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버렸습니다. “지금 내가 손가락을 잘랐지만, 나를 계속 가두어 두면 그냥 죽어 버리겠습니다.”라고 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 부모 형제가 두 손 들고 마음대로 하라고 항복해 버렸다고 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정달옥이 지독한 사람이야.” 하셨습니다. 
그해 5월이었습니다. 나는 목욕을 하고 와서 앉아 머리를 말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달옥 씨, 현실이한테 가서 귀를 잡고 키스를 해 봐.” 하셨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런 말을 듣고 웃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달옥 형님은 그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나에게 와서 내 귀를 잡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재미있어서 한참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아버님께서도 같이 웃으셨습니다. 
하루는 아버님께서 “달옥 씨, 춤을 한번 춰 봐.” 하셨습니다. 그러자 달옥 형님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일어나서 나풀나풀 춤을 추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웃음보가 터져서 웃는데도 달옥 형님은 정말 진지하게 아버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춤을 추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식구가 달옥 형님에게 속치맛감을 사다 주었습니다. 달옥 형님은 그것을 아버님께 가지고 가서 “아버님! 이것으로 겉치마를 할까요, 아니면 속치마를 해 입을까요?” 하고 물어봤다고 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무슨 그런 것까지 나에게 물어 보느냐?”고 꾸짖으면서도 “저렇게 절대적인 신앙을 하고 있는 사람 앞에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많았다고 하셨습니다. 
또 언젠가 달옥 형님은 생손을 여러 달 동안 앓았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버님께서 농담으로 “무슨 생손을 그렇게도 오래 앓느냐? 그만 그 손가락을 잘라 버려라.”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달옥 형님은 가위를 가지고 와서 “얼마만큼 자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결국 “달옥이 앞에서는 농담도 못 한다.”고 하시면서 “달옥 씨는 부모보다, 자녀보다, 남편보다, 형제보다, 재산보다, 자기의 생명보다도 선생님을 더 중히 여기며 믿고 모시는 이”라고 말씀하시며 흐뭇해 하셨습니다. 
수정동교회 시절에 나는 달옥 형님과 짧은 기간이었지만 함께 생활하면서 절대적으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아버님을 시봉하는 분이라는 걸 많이 느끼고 배웠습니다. 당시의 나는 달옥 형님과 함께 부엌에서 아버님의 진지를 준비했습니다. 그때 달옥 형님의 정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와 정성으로 반찬을 만들고, 반찬 하나를 만들어 상 위에 놓을 때마다 “선생님, 이것 맛있게 드십시오.” 하며 기도를 하던 그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살아납니다. 
때때로 그런 달옥 형님의 모습이 답답해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순진하여 융통성이 좀 없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달옥 형님이 늘 가슴에 품고 다니는 손수건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 손수건을 보았을 때는 오래되어서 낡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달옥 형님은 그 손수건을 어떤 보석이나 보물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고 늘 품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슨 손수건이냐고 물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달옥 형님은 “이북에서 선생님께서 주신 손수건”이라면서 너무나 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절대적으로 아버님을 믿고 모시고 섬기며 따라올 수 있었던 달옥 형님이 존경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달옥 형님을 생각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신이 나며 기쁘고, 또 내 자신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신앙인의 열두 고개
6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는 10여 명의 식구들이 벗어 놓은 빨래감을 가지고 수정동 뒷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가뭄 끝이었기에 산에서 내려오는 물도 쫄쫄 내려왔습니다. 큰 빨래 함지에 양재기로 물을 퍼서 빨래를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빨래를 다 해 가지고 내려올 때는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내려와 보니 많은 식구들이 있었지만 밥을 짓지 않고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나는 세상에서 말하는 식모와 같이 일했습니다. 급히 빨래 함지를 내려 놓고 장작을 도끼로 패어 밥을 지었습니다. 
마음은 급한데, 장작이 젖어 있어서 불이 잘 붙지 않았습니다. 젖은 장작을 때니 연기는 나고, 눈물이 하염없이 나왔습니다. 결국 불이 세지 않아 밥이 질어졌습니다. 식구들이 밥을 먹으면서 “왜 밥이 이렇게 질어졌느냐? 밥에서 물 냄새가 난다. 반찬도 맛이 하나도 없다.”고 한 마디씩 잔소리를 했습니다. 어떤 식구는 “시금치를 무칠 때 손으로 팍팍 주물러서 무쳐야 맛있는데 숟가락으로 휘저어서 무쳤는지 맛이 하나도 없다.”고 음식 타박을 했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 나니 나는 정말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잘 믿으려고 여기에 들어왔는데, 식모 노릇을 하는 것도 힘든데 옆에서 다들 나를 식모 취급하고 타박까지 하는구나. 나중에 나를 천당 제일 좋은 꼭대기에 앉혀 준다고 해도 나는 더 이상 못 가겠다. 그만둬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 진지상을 들고 들어가서 “저는 예수를 바로 믿고 잘 믿기 위해서 여기에 왔습니다. 그리고 이 고생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데 동역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모든 것이 힘들고 어렵지만 참고 견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더는 못 하겠습니다. 함께 이 길을 간다고 하면서도 주위의 많은 식구들이 나를 식구로 보지 않고 식모 취급을 합니다. 제 마음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보다도 아프게 하고 있으니 나는 이제 더는 이 길을 못 가겠습니다. 이 시간에 보따리를 싸 가지고 내 육신의 아버지가 믿어 오던 장로교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아버님께서는 “보따리를 싸 가지고 나가려면 싸야지. 강현실이 있다고 뜻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강현실이 없다고 뜻이 안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니 보따리를 싸려면 싸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때 너무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중에 제가 어떻게 되든지 더 이상은 도저히 제가 못 견디겠습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보따리를 싸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아버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하나님이 정말 강현실을 사랑하시고 계시는구나.” 하셨습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현실이를 못살게 구는 것은 자기들의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시켜서 그렇게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현실이 선생님을 만나서 믿고 모셔 왔던 그 신앙의 결실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런 시험을 거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시기에 이런 귀한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을 기쁘고 감사하게 받아야지 참지 못하고 불평하거나 불만을 가지거나 마음속으로 고통스럽게 싸우게 된다면, 다음에는 그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것이 온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든 간에 그런 일이 있을 때는 무조건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시키신 것으로 알고 따르도록 하여라. 그러면 신앙 길을 가는 데 모든 것이 교훈의 재료가 되는 거야.” 하시면서 “보따리를 싸 가지고 나갈 수 있다면 나가 보라. 언젠가는 쌌던 그 보따리를 도로 싸 가지고 이곳에 찾아 올 것이다.” 하시면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날 저녁에 식사를 마치고 아버님께서는 한 식구에게 알사탕을 사 오라고 시키셨습니다. 사탕 한 봉지를 앞에 놓으시고, 방에 둘러 앉은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셨습니다. 노래를 부른 후 사탕 두어 개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나에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나는 마음에 맺혀 있던 모든 것을 다 풀고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 아버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할 줄 알아야 된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것이다. 사람들이 고마울 때감사하고 좋을 때 감사하지만,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 감사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것인데 여기에 있는 너희들은 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때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의 정도를 찾아서 걸으려면 이런 어려운 고개와 고비를 감사함으로 넘어야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이런 어려운 고개는 한두 고개가 아니고, 넘고 나면 더 큰 고개가 또 기다리고 있으니 깨어서 기도하고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귀신도 모르게 사탄의 밥이 되고 만다.”고 하시면서 “아리랑 고개는 열두 고개라 하지만, 이 시대에 참신앙인이 넘어야 할 고개는 열두 고개보다 더 많다는 것을 알고 가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항상 나는 선한 입장, 옳은 입장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는 것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자리에서 시비를 가리기보다 3일 동안 기도를 해 보라고 합니다. 기도를 하면, 언제나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이상한 마음을 품었던 것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회개를 하고 보면, 상대방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때 아버님께서 나를 나무라시면서도 불쌍히 여겨 심정적으로 수습해 주시려고 알사탕 잔치를 열고 더 높은 신앙의 단계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런 아버님의 말씀에서 내가 깨달은 것입니다. 

수정동교회 시절 나는 유명한 목사와 신령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영적으로 계시를 받는 이들에게 아버님이 하고 계시는 일들에 대해 전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아버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아주 간절하게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계시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나에게 찾아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차영은 선생도 만나고, 김달향 전도사도 만났습니다. 김달향 씨는 내가 아버님과 함께 찾아가 말씀을 전했을 때 아주 기뻐했습니다. 말씀을 다 들은 후 그는 아버님을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과 내가 그 댁에 가서 아주 큰 대접을 받고, 또 말씀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한명동 목사도 찾아갔습니다. 아버님도 같이 가셔서 직접 두 분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서로 말씀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한명동 목사는 순교적 신앙생활을 해 부산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사였지만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신학관에 입각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버님께서 원리를 가지고 말씀을 하시는 것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아버님께서 열정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으나 그는 아버님을 말도 안 되는 이단이라고만 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차영은 씨를 만난 것입니다. 차영은 씨는 광복 이후 이북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으로 남하할 때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심을 받은 특별한 심령의 소유자로 유명했는데, 당시에 부산 초장동에 와 있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차영은 씨를 여러 번 찾아가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중 세 번은 나도 함께 동행했습니다. 아버님께서 한 번은 세 시간 동안 말씀을 하시는데 청산유수와 같이 마음에 담은 뜻을 펼쳐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차영은 씨는 큰 반응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에게도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어 하늘의 뜻을 알게 하소서.’ 하고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어떤 뜻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선생님께서 직접 찾아가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딸인 줄 아옵니다. 그에게 직접 나타나서 하나님의 참뜻을 보여 주시고 알려 주소서.” 하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세 번 씩이나 찾아가서 말씀을 하시고, 아버님께서는 “이제는 내가 할 책임은 다했다.”라고 하시고 이후에는 찾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신령한 생활 속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를 받으며 살아 온 이들에게는 중요한 책임이 있다. 끝날에 그들이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는 수십 년간 은혜의 생활을 해 온 것이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간다.”고 하시면서 하나의 생명을 우주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며 은혜 받은 사람들을 찾아다니셨습니다. 귀한 은혜 속에 생활해 오던 사람들이 마지막 때에 신앙생활의 유종의 미를 잘 거두게 하기 위해 지성을 다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님께서는 수십 년간 그들이 쌓아 왔던 공적을 하나님 편에서 거두게 해 주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수정동에서 아버님의 생활은 기도와 정성의 연속이었습니다. 식구들이 찾아오지 않는 날은 먼 산을 바라보시며 작게는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을 위하여, 기독교계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크게는 인류의 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무친 한을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뜻을 이루어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시고 그 무거운 짐을 혼자 감당하기 위해 기도하시던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버님은 하나님을 향한 정성에서 세계의 어느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정성을 들이셨던 분입니다. 언제나 아버님의 주체이자 위하는 주인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행여나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지나 않았는가를 염려하시며 언제나 살얼음판을 걸어가시는 것과 같은 조심스러운 생활을 하고 계시던 모습을 옆에서 확연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식구들과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올 때는 전력을 쏟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식구들을 당신의 생명과 같이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자랑하시던 정의 소유자이셨습니다. 





제 2 부 
한반도에 오신 재림주님을 증거하라




일어나 외치리라





제1호 전도사
1953년 7월 17일, 아버님께서 나를 부르셨습니다. 
“개척을 나가야겠다. 개척을 나가도록 준비하라.”
“어디로 가면 좋겠습니까?”
“한국에서 제일 교세가 강한 곳이 대구이니까 거기에서 전도를 출발하는 것이 좋겠다.”
“알겠습니다.”
“40일 동안 대구에 가서 전도를 해라. 꼭 40일을 채우고 와야 된다. 만약 39일째 되는 날 저녁에 돌아오게 되면 집 안에 들이지도 않고 문 밖으로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식구로 인정도 하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아라.”고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아버님께서 너무나 심각하게 말씀하셔서 대답을 하면서 내 마음도 그만큼 비장해졌습니다. 결의와 각오를 다지며 전도를 가기 위해 몸과 마음 모두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19일에 이득삼 형님이 치마저고리 두 벌을 사 가지고 왔습니다. 이득삼 형님은 신앙심이 깊고 아버님을 모시는 데 늘 최선을 다했던 분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부유했고, 인품이 좋았고, 마음의 폭이 넓어서 늘 주위의 사람들을 챙기고 배려하는 게 생활화되었습니다. 그때도 나 혼자 전도를 나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만해 온 것이었는데, 여름에 시원하게 입을 수 있는 모시 적삼과 치마 한 벌 그리고 편하게 막 빨아 입을 수 있는 치마저고리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득삼 형님과 대화를 하는 중에 아버님께서 두 벌 중 한 벌을 몰래 감추시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옷을 입으실 수도 없는데, 왜 여자 옷을 감추실까?’ 하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버님께서 아무런 말씀도 안 하셔서 나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20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나를 찾으셔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나를 혼자 앉혀 놓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이 사랑하는 어린 딸이 새로운 말씀과 새 소식을 가지고 저 이리떼들이 우글거리는 사탄 세계인 대구로 떠납니다. 살아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동행하고 동역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어린 딸의 힘이 되어 주시고, 산성이 되어 주시고, 방패가 되어 주시고, 모든 일을 주관해 주십시오. 하나님, 사탄 세계에서 빼앗긴 그 한을 이 어린 딸로 하여금 느끼게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대구에 아버지 말씀의 꽃을 활짝 피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대구에 하나님의 몸된 새로운 교회를 세울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울음 섞인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아버님의 기도가 나의 심정을 동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는 “사실 젊은 강현실을 사탄들이 우글거리는 대구 땅에 내보내고 싶은 생각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보내지 않으면 안되는 내 심정을 알아 주기 바란다. 내 마음도 이렇게 아프겠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심정이야 얼마나 더 아프시겠느냐? 나가게 되면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이 생길 것이다. 그때마다 먼저 무엇보다도 네 배후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계신다는 이것만은 한시도 잊어 버리지 말고 언제든지 기억하면서 일해 주길 바란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매일 하나님의 뜻에 미쳐 계셨으며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반드시 실현시켜 놓겠다는 굳은 의지로 불타올랐습니다. 그러한 의지는 평안하실 때나 핍박이 닥쳐올 때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아버님의 심정은 언제나 한결같았습니다. 
첫 번째로 세운 전도사로서 아버님의 심정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 드려야겠다는 결의가 마음 속에서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기도와 말씀을 끝낸 뒤 아버님께서 여비를 주셨습니다. 여비는 부산에서 대구까지 완행 기차표를 사고 나면 쌀 한 되를 살 돈밖에 안 되었습니다. 솔직히 여비가 너무 적어서 속으로 좀 놀랐습니다. 그때가 어려운 시절이기는 했지만, 아버님께서는 간혹 식구들에게 양복을 해 입으라고 두세 벌 해 입을 돈을 주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40일 동안 전도를 하고 오라고 하시며 왕복 차비도 안되는 돈을 주시니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주시는 여비를 감사히 받고, 흰 인조보자기에 짐을 싸서 집을 나섰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전도 나가던 제자들에게 옷 두 벌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시고 돈 전대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기에 아버님께서는 나에게도 그런 길을 가야 된다고 기준을 세워 주신 것이었습니다. 
배웅해 주는 사람 아무도 없이 집을 나서니 공연히 마음이 울적했습니다. 뒤돌아보니 아버님이 담장 위에 손을 놓고 나를 보고 계셨습니다. 안녕히 계시라고 인사를 드리는데 보니, 아버님의 표정에 나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담장의 기왓장 위에 손을 얹고 서서 첫 전도사를 파송하시며 대구에 꼭 교회를 개척하고 돌아오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습니다. 얼굴 표정이 그럴 때 아버님의 심정은 얼마나 간절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이렇게 큰 기대와 소망을 두시는가?’ 하는 생각이 들자 아버님의 처절하고 불쌍하고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울면서 새로운 다짐을 했습니다. 
“꼭 싸워 승리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기대하시고 소망하시는 강현실이 되겠습니다.”라고 다짐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내가 돌아볼 때마다 손을 흔들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저만큼 가서 돌아보면 아버님께서 손을 흔드시고, 저만큼 또 가서 돌아보면 손을 흔드셨습니다.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버님께서는 그곳에 서서 그렇게 작별인사를 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완행기차는 장사하는 장사꾼과 쌀이나 채소를 머리에 이고 들어오는 사람들로 만원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틈을 뚫고 들어가 앉을 자리가 없어서 한쪽 구석에 서서 대구까지 갔습니다. 기차 안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는데, 다들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기차 안에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대구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새로운 소식을 아는 사람은 나 밖에 없습니다. 이 뜻을 저 사람들에게 다 전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구로 향했습니다. 
대구역에 내렸지만, 갈 곳이 없었습니다. 한국은행 앞에 서서 보니 교회 종각이 많이 보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데 어디로 발을 옮겨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한 사람도 뜻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니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도 많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나는 어디에다 발을 옮겨 놓아야 될지를 모릅니다. 하나님, 이 일이 이렇게도 어렵습니까?”라고 기도를 하며 그냥 서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내 귀에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현실아, 너는 이걸 어렵다고 하느냐? 너는 1년 남짓 이 길을 걷고 어렵다고 하느냐? 나는 이 뜻을 이루어 놓기 위해서 자그만치 6천 년간 수고해 왔다. 그런데 너는 1년 정도 이 길을 걷고 어렵다고 하느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너무나 크게 들려왔던 것입니다. 
“하나님,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너에게 힘과 용기를 줄 터이니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이 대구 성중에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라.”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서 나와 더불어 같이 하시니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지금도 나에게 어려운 문제가 닥쳐오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 옛날 그 대구 노상에서 내게 들려주셨던 음성이 그립습니다. 지금도 내게 그 음성을 들려주셔야 되겠습니다.”라고 기도드립니다. 
어느덧 날은 저물어 밤이 되었습니다. 대구에 도착했으니 먼저 하나님께 기도드릴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대구에서 제일 큰 서문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철야기도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대구에 아버지의 뜻과 심정을 아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니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새벽기도 하러 온 한 집사를 만났습니다. 도기선 집사라는 분이었는데 그 분이 “오늘 우리 같이 산 기도하러 갑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집사를 따라 안지랭이산(지금의 대덕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도 집사는 그때 입교해서 식구가 되었습니다. 날씨는 더웠지만 상상봉까지 올라가 기도를 드리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오너라 동무야 동산의 봄은 때맞아 꽃이 피고 
 즐기는 이 봄을 노래하리 에덴의 동무들아
 모두 다 모여서 춤을 추며 새 노래 부르자

예배를 볼 때 많이 불렀던 노래가 생각나서 불렀습니다.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 부르는 노래이니 산이 울리도록 불렀습니다. 3절까지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그렇게 노래에 취해서 부르고 있는데, “여기에 사람이 있네요.” 하면서 10여 명의 부인들이 올라왔습니다. 그들은 남문교회 권사와 집사들로서 열흘 간 산 기도를 하기 위해서 올라왔는데, 산 밑에서 기도 중에 내 노랫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여자의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니 “저기에 사람이 있나보다.” 하는 사람과 “저건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천사의 노랫소리다.” 하는 사람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서로 이야기를 해도 결론이 나지 않아 내기까지 걸고 노랫소리를 따라서 올라온 것입니다. 그들을 보니 선생님께서 나를 보내시고 얼마나 기도하고 정성을 들이며 영적으로 함께 하셨는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보고 매우 반가워했습니다. 
“어떻게 여기서 노래를 하고 있습니까?”
“나는 여기에 산 기도를 하러 왔습니다.”
“그래요? 우리도 열흘 동안 산 기도를 하러 왔습니다. 우리와 함께 기도하시지요.”라고 권했습니다. 
일행 중 연배가 좀 있어 보이는 부인이 나를 보고 “얼굴을 보니 은혜를 많이 받으신 분 같습니다. 여기에 있는 동안 기도도 해 주시고, 성경 강해도 해 주시고, 말씀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고 청했습니다. 
나는 “아닙니다. 저는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사양을 했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은혜를 좀 나눠 주십시오.” 하며 일행이 모두 나에게 부탁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러면 같이 은혜를 받읍시다.” 하고 그날 저녁부터 말씀을 전했습니다. 
역사는 첫날의 저녁부터 일어났습니다. 같이 찬송을 하는데, 한 사람이 일어나서 나풀나풀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이 “영계에서 영인들이 너무 기뻐하며 춤을 춥니다. 그래서 나도 화답하기 위해서 춤을 춥니다.” 했습니다. 그리고 “영인들이 지상에 살아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당신들이 너무 부럽습니다. 우리는 영으로라도 주님을 만나니 너무 기쁘다고 말합니다.”라고 전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안지랭이산에서 서광이 비치는데, 그 빛이 얼마나 환하고 뜨거운지 불이 되어서 대구시를 모두 불태우는 환상을 보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회색 바지에 모시남방을 입은 체구가 큰 분이 두 손을 높이 들고는 축복기도를 해 주는 환상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 모습은 그당시 아버님 모습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영적으로 그 산에 찾아와서 우리를 축복해 주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열흘 동안 역사가 일어나니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기도를 했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열흘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밤에 바위 위에 누워 쉬노라면, 낮 동안 태양열에 달았던 열기로 인하여 천연 돌침대가 되어 등이 따뜻했습니다. 
그렇게 같이 정성들이던 권사와 집사들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나에게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애인을 사랑하듯이 사랑했습니다. 사흘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쉬다가 눈을 떠 보니 다들 내 몸을 잡고 잠자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른손을 잡고 또 어떤 사람은 왼손, 왼팔, 왼 다리, 오른 다리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다들 왜 이러십니까, 날도 더운데? 잠이 오지 않으면 기도를 더 하지요?” 했더니 “기도하는 것보다 선생님의 옆에 있는 것이 더 은혜스럽습니다.” 했습니다. 
“그러면 좀 쉬지 그러세요?” 했더니 “쉬는 것보다 이렇게 선생님의 옆에 있는 것이 덜 피곤합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나를 따르는지 내가 명상하러 가면 찾아오고, 혼자 조용히 기도하려 하면 따라오고 화장실을 가도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심하게 그러니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20년 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 이런 말씀은 처음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정과 심정을 우리가 몰랐습니다.” 하면서 뜨거운 열기가 식지 않았습니다.
찬송가를 부르면, 다들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동안 지나왔던 삶을 나에게 와서 고백하며 회개하기도 했습니다. 
열흘째가 되던 날 재림론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사람이 무릎을 치더니 “강 선생님, 이제 해결이 났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해결됐습니까?” 했더니 “우리가 처음 이곳에서 기도할 때 나는 까만 종이에 흰 글씨로 ‘한국 재림’이라고 쓴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니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더니 그 사람이 “우리가 내려가서 교회를 세웁시다. 교회를 세울 수 있는 헌금을 합시다.”라고 제안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교회를 세우기 위해 헌금을 하자는 데 뜻을 모았습니다. 거기서 헌금한 금액으로 방 하나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구교회의 출발
산에서 내려와 방값이 조금 싼 봉산동에 방을 하나 얻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곳이 최초의 대구교회였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자리를 잡은 뒤 8월 말에 이요한 목사님이 대구에 왔습니다. 
그런데 남문교회의 중진이었던 권사와 집사들 10여 명이 한꺼번에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자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권사와 집사님들이 은혜를 받은 내용을 전하기 시작하자 대구 교회 전체에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80여 명의 노회 목사들이 모여서 대책회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설교 시간에 “부산에서 아무것도 아닌 여자 이단이 들어와서 남문교회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혹시 누가 새로운 이야기를 하게 되면 절대로 따라가면 안됩니다.”라고 경계를 했습니다. 
하루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한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우리 교회에서 지금 예배를 드리다가 왔습니다.”라고 하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예배시간에 목사님이 ‘부산에서 온 여자가 있는 곳은 이단이며 지옥을 가는 곳입니다. 그곳에 가면 망하고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을 감고 있으니까 ‘그곳은 이단이 아니다. 망하고 죽고 지옥가는 곳이 아니다.’라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답니다. ‘지금 이 교회는 쑥물을 먹이지만, 그곳은 생명수 샘물을 먹이는 곳이다. 지금 그곳에서 참생명을 살릴 수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흰 고무신을 신고 자전거를 타고 빨리 가라.’고 알려 주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예배가 끝나기 전에 도착하려고 급하게 계시 받은 장소로 왔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와서 다시 예배를 드리는데 “내가 이제 지상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하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 사람 덕분에 주위의 핍박으로 힘들어 하던 식구들이 힘을 더 얻게 되었습니다. 초창기의 대구교회에서는 그런 신령역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은혜가 큰 만큼 박해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사를 많이 했습니다. 이사 와서 며칠만 지나도 집에서 예배를 보니까 동네에서 미친 사람들이 이사를 왔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결국 일주일도 되기 전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봐야지 집에서 예배를 보면서 ‘아이구, 아이구!’ 하며 소리 내어 울면서 기도를 하니 미친 사람들이 분명하다. 재수 없는 사람들이 동네에 들어오면 안된다.”면서 쫓아내곤 했습니다. 

1953년 9월 17일, 대구역에서 잠시 아버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서울을 개척하기 위해 떠나시던 길에 대구역에서 뵌 것입니다. 한국의 수도 서울은 암흑에 잠겨 있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종로구 청진동에 하숙을 정하시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정성과 물질을 아끼지 않고 쏟으시며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나는 아버님께 일주일에 한 번씩 활동한 내용을 편지로 보고드렸습니다. 한 달에도 몇 번씩이나 이사를 해야겠기에 대구의 주소를 남산동에 있던 어느 집사댁으로 정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여러 통의 편지를 써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 편에 서 계신다. 외롭고 적적하고 답답할 때마다 하나님을 부르면 그때마다 현실이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해 주시니 강하고 담대하라. 하나님이 함께해 주신다는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가슴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원하는 자들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심어 주라.”는 간곡한 부탁이었습니다. 
“고생과 수고가 다 끝나고 영광과 승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그 날을 속히 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희생과 충성 그리고 정성이 따라야 하니 열심히 사탄주권의 세계를 하나님 주권의 세계로 찾아 세우자.”는 기막힌 내용들이었습니다. 

뱀과 같이 지혜로워라
1953년 11월 2일 아버님께서 처음으로 대구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때 남산동에 조그만 방 두 칸을 빌려서 있던 때였습니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손님이 오셨다고 해서 빨래를 하다가 뛰어나가 보았더니 아버님께서 너무도 초라한 모습으로 서 계셨습니다. 
아버님의 뒤에는 지게에 짐을 지운 남자가 따라왔습니다. 나는 걱정이 되어 아버님께 “어떻게 오신다는 소식도 없이 오셨습니까?”하고 여쭈었더니 아버님께서는 별 말씀 없이 “그렇게 되었다.”고만 하셨습니다. 그 시간이 아침 7시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식구들에게 아버님께서 오셨다고 연락을 했습니다. 너무도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을 때라서 그저 있는 대로 정성을 다하여 조반을 준비해서 차려 드렸습니다. 나는 교회를 개척하면서 언젠가는 아버님께서 대구교회에 오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식구들과 의논해 이불과 포단을 미리 준비했습니다. 이불 색깔은 연두색 명주천에 빨간색 깃을 둘렀고, 포단은 빨간색이었습니다. 대구의 개척이 힘들고 어려웠으나 이불을 장만하기 위해 초창기의 식구들은 한마음이 되어 정성도 많이 들였습니다. 또 돈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연하늘색 양복을 입으셨는데, 여기저기 기름때가 묻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식구들이 이요한 목사님께 갖다 드린 한복 바지저고리를 임시로 드리고, 그 양복은 세탁소에 맡겼습니다. 이 목사님의 바지저고리는 아버님께 맞지 않았습니다. 소매가 짧고 저고리도 짧았으며, 특히 바지는 너무 짧아서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아버님의 모습을 뵙자니 마음 한 구석에서 서러움이 사무치게 끓어올랐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옷 한 벌을 준비해 놓고 기다린 성도가 없었는데, 오늘도 천주의 주인공이 되시는 분이 오셨건만 기독 성도들이 알지 못하여 모시지 못하는 것을 생각할 때 뜨거운 눈물이 내 얼굴을 덮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대구 식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아래 윗방이 가득 찼습니다. 그동안 대구 식구들은 아버님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들었지만 직접 만나 뵙지는 못했기 때문에 늘 사모하면서 기다려 왔습니다. 
아버님은 조반이 끝난 후 말씀을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말씀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정오쯤 되었을 때입니다. 갑자기 경찰이 찾아왔습니다. 아마도 방안에서 큰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리고, 사람들이 몰려드니 주인집에서 수상하게 생각해서 경찰서에 신고를 한 모양이었습니다. 
나는 재빨리 아버님께 부엌문으로 나오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부엌문은 여자들만 출입해서 여자 고무신밖에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버님은 여자 고무신을 급하게 신고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그 집에서 나와 남의 집 대문 앞으로 몸을 숨기셨습니다. 그곳은 다행히 길 가는 사람들이 볼 수 없었던 곳이었습니다. 아버님은 몸에 맞지 않은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는데다 여자 고무신을 신고 계셨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띠면 수상하게 볼 상황이었습니다. 나는 아버님 앞쪽에 서서 치마를 펼치고 서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내 키가 작다 보니 아버님을 가려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 골목에 서서 나는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드님이 이렇게 사탄 세계의 사람들로부터 몰림을 받고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면 좀 순탄하게 가실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 주셔야 되겠습니다. 그들의 어두운 눈을 밝혀 주셔서 천주의 참주인이 되시는 아버지를 알게 해 주소서.” 하고 기도하며 서 있었습니다. 
아버님의 모습은 아주 초라하며 처량하게 보였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성경에 지혜는 뱀과 같이 하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느냐, 못 이루어 드리느냐는 인간이 하기에 달렸다. 어두운 사탄 세계에 하나님의 고귀한 뜻을 펼치려니 사탄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다.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뜻을 이루지 못하게 방해를 하고 있는데, 나는 형무소나 유치장을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다만, 만약에 무슨 사건이라도 생긴다면 그만큼 복귀섭리가 연장되니 지혜롭게 처신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현실이는 지금 식구들 중에 제일 젊으니 지혜롭고 민첩하게 울타리가 되어 움직여 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나에게 이런 당부를 하실까?’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간절한 아버님의 심정을 더욱 절감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나라를 찾기 위해 독립군들이 생명을 바치며 싸워 왔다. 우리는 이 땅에 온 인류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할 책임이 있음을 생각한다면 무엇인들 못 하겠는가?” 하고 격려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아버님의 입장과 그 모습, 그 간절함을 지금도 잊으려야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집에서는 하룻밤도 주무시지 못하고, 바로 대구역 근처의 여관으로 모셨습니다. 양복을 찾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맞지 않은 바지저고리를 입고 택시를 타셨습니다. 일단 여관방을 잡고, 세탁소에 가서 양복을 찾아다 드렸습니다. 양복을 입으시니 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경찰이 찾아온 후 이웃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따가워서 다시 남산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옆에 방 하나를 따로 얻어 아버님을 모셨습니다. 나는 식사 때마다 가서 진지를 해 드렸습니다. 그해 11월은 날씨가 유난히도 추웠습니다. 대구의 겨울바람에 손이 다 터져서 피가 났습니다. 그리고 반대하고 핍박하는 무리들 때문에 시달려서 괴롭게 지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대구에서 생명을 내어 놓고 전도를 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지만 좀처럼 전도의 불길이 타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기성교인들의 반대와 핍박, 조롱이 거세었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의 뒷모습
11월 20일경, 남산동에 방을 얻고 며칠도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습니다. 남산동 골목길 옆 작은 방에는 옥세현 모친. 지승도 모친, 이요한 목사 그리고 나를 포함한 4명이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오후 4시쯤이 되었을까? 어디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남산동 31번지가 어디지요?” 하던 그 목소리는 최선길 여사의 음성이었습니다. 
다림질을 하다가 나는 너무 놀라서 신발도 신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가 나무를 쌓아 놓은 헛간에 숨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내가 그렇게 놀라는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옥씨 모친, 지승도 모친, 이요한 목사도 방안에서 문고리를 잡고 떨고 있었습니다. 집 주인이 “이곳은 남산동 31번지가 아니오. 좀더 올라가야 되오.”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남산동 31번지는 임 집사 댁 주소였습니다. 어떻게 최 여사가 대구 임 집사의 주소를 가지고 있었을까? 대구에 있을 때 나는 너무 자주 이사를 하게 되어서 아버님께 편지를 보낼 때 임 집사의 집주소로 거처를 정했습니다. 아버님께서 보고 받는 것을 언제나 기뻐하셨기 때문에 주 1회 보고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마, 최 여사는 김원필 선생을 통해 아버님의 서울 주소를 알게 되어 서울 청진동에 갔다가 내가 보낸 편지를 본 것 같았습니다. 대구에 도착한 최 여사는 경찰서에 아버님을 신고까지 했습니다. 
나는 바로 아버님께 찾아가 최 여사가 대구에 왔다고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 보고를 들으신 아버님은 “오늘 내가 이곳을 떠나는 것이 대구 식구들을 위해서도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상경하실 여비가 없었습니다. 
나는 남들에게 구차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어쩔 수 없이 식구들에게 사정하여 여비를 마련해 드렸습니다. 남산동에서 대구역으로 향하시던 아버님의 뒷모습이 너무 처량해 보였습니다. 밤 11시 30분에 출발하던 밤 기차였기 때문에 누구도 역까지 배웅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예전에는 통행금지 시간이 엄수되었기 때문에 배웅한 뒤 집까지 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따라 대구의 바람은 살을 에이듯 차가웠으며, 손과 발이 시려서 걸음을 걷기 힘들 만큼 추웠습니다. ‘복귀섭리의 큰 뜻을 품으시고 뜻을 이뤄 드리기 위해 하나님과 약속하신 그날부터 형언하기 힘든 가시밭길을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아버님, 그 길을 동지도 없이 홀로 가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절로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아버님께서는 때로 넘어지고 쓰러지고 거꾸러지면서도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인류 구원의 목표를 향해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온 인류 앞에 사탄과 싸워 승리하신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날 밤 나는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아버님의 뒷모습이 자꾸 생각나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런 고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그런 선생님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위안을 받고 장한 내 아들이라고 흐뭇해하시며 기뻐하실 것이었다. 선생님은 수십 번, 수백 번 이제 더 이상 못 하겠다고 말씀하실 기회가 많았지만 한 번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며 살아오셨다. 자신의 어려움과 고생과 고통을 개의치 않으시고 하나님의 염려와 고충만을 걱정하고 두려워하셨기 때문이다. 70억 인류 가운데 어느 누가 하나님을 염려하고,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위하겠는가? 어느 누가 하나님의 어려움을 덜어 드리고 편안히 쉬실 날을 위해 노력하겠는가? 하나님 앞에 이처럼 효도한 효자는 인류 역사 이래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 선생님 같은 분이 어떻게 이 지상에 오셨을까? 안 오셨더라면, 누가 하늘과 땅에 얽혀 있는 사연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인가? 선생님이 오셨기에 하나님이 4천 년 동안 준비를 시켜서 보내신 예수님의 뜻을 계승받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6천 년간 애태우며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려 오셨던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는 책임을 다하신 분이다. 지상은 어둠에 잠겨서 모르고 있지만, 영계는 환히 보고 또 알고 증거하고 있다. 언젠가 지상의 모든 인류도 선생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될 것이다.’ 하는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유효원 선생의 입교
이후로 한 달쯤 지난 후 12월 25일 부산에서 아버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그날 아버님께서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오셨습니다. 유효원 전 협회장, 유효영과 유효민 씨 등이 입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나도 아버님을 뵐 겸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당시 부산 수정동 집에는 최 여사가 살고 있었으므로 아버님을 모실 집이 없었습니다. 일단, 유효원 전 협회장의 사촌 누이동생이었던 유순희 씨 집으로 모셨습니다. 피난민들이 살던 영도의 작은 방 한 칸이었습니다. 그 작은 방에서 아버님께서는 유효원 전 협회장에게 열심히 원리강의를 하셨습니다. 
나는 아버님의 식사 책임을 맡아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은 없었지만, 아버님께서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 2시나 3시까지 말씀하시는 모습을 뵐 수 있었습니다. 유 전 협회장은 건강이 좋지 않아 모로 비스듬이 누워서 말씀을 들으며 무엇을 많이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식사하시는 것도 잊으시고 말씀에 취하신 입장에서 정성을 다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목석이 아닌 이상 누구도 그 말씀 앞에는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아버님께 드릴 진지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 이득삼 형님이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단지 경제적인 물질 후원을 한 것이 아니라 심정이 언제나 살아 있어서 무엇이 부족한 지 말하지 않아도 알고 도움을 주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새벽에 우리는 아직 잠에서 깨지 못했을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잠결에 일어나 문을 여니 이득삼 형님이었습니다. 아버님께 드리고 싶다고 밤새 김치, 깍두기를 담아 항아리에 넣어 머리에 이고 염주동에서 영도까지 걸어온 것입니다. 나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마침 김치가 떨어져 걱정을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당시에 말씀을 듣고 있었던 사람들은 유효원, 유효영, 유효민, 김관성, 송도욱 씨 등이었습니다. 
마침 김인주 권사가 남한에 내려와서 연락이 닿아 처음으로 영도에서 아버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김인주 권사는 방에 들어와서 기도를 드리고 말씀을 좀 듣다가 “아버지!” 하며 아버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에 우리 모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영도에서 한 달 동안 말씀을 하셨는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동네 통장이 ‘이북 말씨를 쓰는 청년이 왔는데,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수상하다.’ 경찰에 신고한 것입니다. 그 신고를 받은 경찰이 찾아와 동대신동으로 이사를 했으나 또 문제가 생겨서 대구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어둠 속의 흐느낌
1954년 1월 말에 대구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아버님을 모실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봉산동에 아주 작은 방 하나를 빌렸습니다.  
봉산동의 그 방은 너무 추웠습니다. 방안에 둔 걸레가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추위가 극심했습니다. 그런 추위에도 아버님께서는 매일 저녁 수건을 하나 물에 적셔서 윗목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새벽 3시가 되면 일어나서 그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시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너무 추웠기 때문에 이불을 하나는 깔고, 하나는 쓰시고 엎드려 기도하시는데 늘 흐느껴 우시면서 “하나님, 당신과 약속할 때 분명히 나는 뜻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뜻이 이루어지기는 요원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나는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안겨 드리는 날을 마련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온몸을 떠시며 우실 때마다 이불이 들렸다 내렸다 했습니다. 그렇게 우시며 기도하던 아버님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쫓기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누구도 아버님을 야단하거나 책망하지 않지만, 아버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켜 드리지 못해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언제까지 뜻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니까 쫓기는 마음을 가지고 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는 마음이신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집은 지금도 내 눈에 생생한데,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사는 집처럼 허름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채소를 머리에 이고 나가 길에서 팔아 겨우 끼니를 꾸려 나가던 가정이었습니다. 그런 집에서 아버님을 모시려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쌀이 떨어졌습니다. 그때까지 남아 있었던 쌀로 저녁밥은 겨우 지을 수 있었지만, 다음날 아침 진지를 해 올릴 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께 “쌀이 떨어졌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릴 수 없었습니다. 죄송스런 마음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밤이 깊어 자려고 누워도 걱정이 되어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일찍 밖에 나가 보니 툇마루에 누군지 모르지만 쌀 한 말을 갖다 놓았던 것입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쌀자루를 붙들고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옛날 엘리야가 먹을 것이 없어서 걱정할 때 까마귀가 먹을 것을 물어다 주었던 생각을 하며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기도드렸습니다. 나중에 알아 보니 말씀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식구가 새벽에 왠지 모르게 아버님께 쌀을 갖다 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불 붙듯 일어나서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집안일을 해 놓고, 대구에서 신령하다고 이름나 있던 이들을 만나러 다녔습니다. 그 중에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사람이 동산병원 아래에 살던 김 부인이었습니다. 김 부인은 작은 집에 살면서 정성을 들이는 생활을 오래 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보여 주고 알려 주는 계시에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한국을 중심하고 새로운 섭리를 펼치고 계시는데, 이미 한국 한 모퉁이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계시를 받은 후 더 열심으로 정성을 들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부인에게 말씀을 전하러 갔습니다. 수십 번 찾아가 원리말씀을 전했는데, 어떤 부분은 이해를 하고 감동을 받았지만 어떤 부분은 전혀 이해를 못 했습니다. 그러면서 좀처럼 식구가 되지 않았습니다. 
김 부인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신령한 사람들에게 미리 보여 주고 준비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알려 주고 준비하신 사람이라도 자기의 관념과 사고를 버리지 않고 고집하면 재림주님을 만나도 알지 못하고, 새로운 진리를 들어도 자신의 계시에만 집착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사람이 해야 될 책임분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대구 삼덕동에서 목회를 하던 한 목사가 아버님을 뵈러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구의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유명한 홍 목사님이었습니다. 그 목사가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은혜를 받았던지 여러 번 말씀을 들으러 왔습니다. 그 목사와 인연이 되어 다른 기성교회 목사들과 전도사들도 아버님을 찾아와 말씀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신령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말씀을 전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항상 나에게 전도를 나가라고 재촉하셨습니다. 지금도 준비되어 있는 이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왠지 아침마다 아버님을 뵙기가 어려웠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의 뜻을 놓고 기도하신 아버님의 용안은 엄숙하고 비장해서 무서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전도를 나갔다 돌아오면, 마치 아버지가 딸을 반기듯이 다정한 얼굴로 대해 주셨습니다. 나는 늘 솔직하게 있었던 그대로 그날의 일을 보고드렸습니다. 그럴 때는 육신의 아버지 이상으로 아버님이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핍박의 연속
1954년 2월 9일, 음력 1월 6일 아버님의 생신을 대구에서 지냈습니다. 대구 식구들이 모여서 아버님의 생신 잔치를 하는데 유효원, 유효민, 유효영, 이창환 씨 등이 왔습니다. 그때 우리는 대봉동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한참 모여서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나를 불렀습니다. “밖에 손님이 왔습니다.” 하기에 나가 봤더니 한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얼굴을 보았으나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신지요?”
“나는 문선명 선생 친구입니다. 면회 좀 시켜 주십시오.” 했습니다.
일면식이 없는 사람이라서 어떻게 해야 될지 망설였지만, 아버님의 존함을 대면서 친구라고 하니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 “어떤 분이 친구라고 하면서 밖에 와 있습니다.” 하고 보고를 드렸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래?” 하시며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방안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기 때문에 아버님이 나가서 누군지를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나가시자마자 그 사람이 아버님을 막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버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허리춤을 손으로 꽉 잡더니 막 흔들면서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옆에서 말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길에서 일이 벌어져서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물을 기르던 부인들이 모두 쳐다보았습니다. ‘무슨 싸움이 났나?’ 하는 얼굴로 바라보는데,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식구들이 나와서 말렸지만, 이미 아버님께서는 많이 맞아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아버님께서 힘을 쓰시면 그 사람에게 맞을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한 번도 저항을 하지 않고 묵묵히 맞고 계셨습니다. 흔들면 흔드는 대로, 때리면 때리는 대로 그대로 맞고 흔들리셨습니다. 
식구들이 겨우 그 사람을 진정시키고 나자 아버님께서는 그냥 아무런 말씀도 안 하시고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방으로 들어가시던 뒷모습이 얼마나 내 가슴을 아프게 했는지 모릅니다. 생신에 모든 식구들이 모였을 때 그런 일이 생기니 마치 그 모든 일이 내가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생긴 것 같아서 죄송하기만 했습니다. 
언젠가 그 이야기를 내가 했더니 어떤 사람이 “힘이 없어서 맞은 게 아니셨을 겁니다. 아무런 말씀도 못 하시고 대항도 안 하시고, 그 모욕을 견디셨을 아버님의 심정이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어떤 식구의 오빠였습니다. 집안에서 반대가 심한 식구였는데, 그 식구가 아버님을 만나러 간다면서 집을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난 오빠가 아버님을 찾아와 행패를 부린 것이었습니다. 정작, 그 식구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오빠 되는 사람이 사과를 했지만, 이미 아버님의 생신잔치는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식구의 가족들이 찾아와서 아버님께 폭력을 행사하거나 욕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구에서 머무는 동안 이런저런 사건 때문에 이사를 자주 했습니다. 어떤 때는 한 달에 세 번이나 이사를 했습니다. 늘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쫓겨 다니던 입장이었습니다. 핍박도 심하고, 교회는 자주 이사를 다니니 대구 식구들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하루에 두 번도 이사를 했습니다. 오전에 짐을 옮기고 예배를 올리는 모습을 보고, 오후에 주인이 예배를 봐서는 안된다고 해서 집을 새로 구해 이사한 적도 있습니다. 
나중에는 식구들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이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식구들이 어떻게든 알아내서 찾아왔습니다. 이사를 한 다음날 아침에 어떤 권사가 찾아온 적도 있습니다. 깜짝 놀라서 “알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하나님께서 다 알려 주셨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권사는 교회가 이사 간 걸 알고 철야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밤새도록 “하나님, 어디로 이사했는지 알려 주십시오.” 하고 간절하게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아침이 되자 “내가 가르쳐 주마!”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집을 나서라!” 권사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서 집을 나섰습니다. 그 음성이 인도하는 대로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집 앞에서 발이 저절로 멈추었습니다. “이 집으로 들어가라!” 하고 알려 주어서 찾아온 것입니다. 

한 번은 이사를 한 후 식구들에게 차차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영수라는 사람이 전화를 했습니다. 그 사람은 강 집사의 남편으로 한약방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강 집사가 우리 교회에 다닐 때 심하게 반대를 하다가 차차 말씀을 듣고 함께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전화로 “이사를 어디로 하셨습니까?” 하고 묻기에 “댁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하면서 주소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 정말 저희 집에서 가까운 곳이네요. 저녁에 한 번 가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날 저녁에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왔습니다. 누가 밖에서 나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누가 이 시간에 나를 찾아왔을까?’ 하며 밖으로 나가 보니 아버님께서 택시 안에 앉아 계셨습니다. 임 집사도 아버님과 함께 택시 안에 타고 있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나를 보자마자 택시에 타라고 하셨습니다. 집에 있던 사람들이 걱정이 되어 “잠시 들어가서 선생님께 다녀온다고 이야기를 하고 나오겠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바쁘신지 “그 사람들은 걱정하지 말고 빨리 가자!”고 재촉하셨습니다. 결국 어디에 다녀온다는 말도 안 하고 저녁밥을 먹다 나온 그대로 택시를 탔습니다. 
도착한 곳은 대구역 근처의 어느 여관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임 집사와 나에게 “복귀의 길은 어렵고도 험한 길이다.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복귀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인간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도 있으며 이해되지 않는 일도 많이 있으니 협조해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우리는 뜻 속에서 인연되고, 또 뜻을 세우기 위해 나선 몸들이니 생명을 내어 놓고 나가 싸워야 된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나니 죽음도 감사한 마음으로 받겠다는 심정을 가지고 나가자!”고 간절하게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님과 헤어질 때는 “내가 왔다고 하면 또 문제가 생기게 되니 가급적 내가 왔다고는 식구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임 집사와 나는 11시쯤 되어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길에서 이요한 목사를 만났습니다. 
이 목사는 대단히 노한 얼굴로 “어디 가면 간다고 이야기를 할 것이지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갔습니까? 집에 가 보십시오. 난리가 나 있어요.”라고 나를 책망했습니다. 나는 죄송한 마음에 제대로 얼굴도 바라보지 못하고 거듭 사과를 했습니다. 이 목사는 화가 많이 나셨는지 “집에 빨리 가보세요.”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를 가십니까?” 했더니 “친구 집에 갑니다.” 하고는 그냥 가 버렸습니다. ‘단단히 화가 났나 보다.’ 하면서 지나가던 그분의 얼굴을 보았는데,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얼굴에 새파랗게 멍이 들고 이마에는 누구에게 맞았는지 혹이 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에 정말 무슨 큰 일이 생겼나 보다.’ 하는 생각으로 급하게 집으로 갔더니 난장판이 되어 있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나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내가 저녁밥을 먹다 말고 누가 찾아왔다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자 식구들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걱정 끝에 “혹 대구 남부경찰서에서 형사가 와서 잡아간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강현실 전도사가 잡혀갔으니 이제 이 집에도 형사들이 올 수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 일단 짐을 정 집사 댁으로 옮기자고 의견을 모았다고 합니다. 부랴부랴 짐을 옮기고 있는데, 하필이면 정영수 씨가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 사람은 이삿짐을 옮기는 것을 보고 ‘내게 집 위치를 알려 주고는 이사를 하는 것 아닌가? 분명히 내가 저녁에 찾아가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도둑처럼 이사를 하는 건 무엇인가? 한때 교회를 반대했던 사람이라고 혹시 나를 믿지 못해 이사를 하는 건가? 내가 아직도 교회를 반대하고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고 오해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화가 치밀어 이삿짐을 옮기던 이요한 목사의 멱살을 잡고 “어디로 이사를 하는 거요?” 하면서 막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옆에서 강 집사가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간신히 틈이 났을 때 이 목사는 일단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순간적으로 뛰어 달아났습니다. 그런 행동에 더 화가 난 정 장로는 “도적 잡아라!”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근처에 있던 순경이 왔습니다. 일이 커지자 강 집사는 기지를 발휘해 순경에게 “부부 싸움을 하다 그렇게 되었으니 개입하지 말아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하고 사정을 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순경은 돌아갔지만 이요한 목사는 피멍이 들었고, 짐은 이러저리 파손되어서 집이 난장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옥세현 모친과 지승도 모친은 놀라서 식구 집으로 가서 주무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 두 분은 집으로 돌아와 나를 책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를 가면 간다고 말을 하고 가야지…. 어제 이요한 목사님이 돌아가시는 줄 알았소.”
“얼마나 놀랐는지 우리는 어젯밤 심장이 떨려서 벌벌 떨면서 잤습니다.” 하는데, 죄송해서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래, 어제는 어디를 다녀왔어요?” 하고 지승도 모친이 물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누구에게도 아버님을 뵈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에 나는 사실대로 말씀드릴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친구가 갑자기 찾아와서 그 집에 다녀왔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지승도 모친은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어제 선생님을 뵌 것 아니오? 나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선생님께서 대구에 오신다는 계시를 받았어요. 분명히 강 전도사는 어제 선생님을 뵙고 왔지요? 그런데 왜 우리에게 선생님 뵌 것을 숨기시오? 우리는 이북에서부터 선생님을 따라 이곳까지 온 사람들이오. 우리에게까지 선생님 만난 것을 숨기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하시며 너무나 크게 책망을 했습니다.
죄송스러운 마음 한편으로 ‘두 분은 지치지 않고 언제나 신념과 확신에 차서 사시니 하나님과 아버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무엇을 하시는지 다 아시는구나.’ 하는 부러움도 들었습니다. 하나님과 아버님을 언제나 먼저 생각하고 모시는 생활을 하던 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이요한 목사는 언제나 신앙적이었습니다. 매일 쫓겨 다니는 생활에 방 한 칸, 부엌 한 칸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집에 살면서도 늘 긍정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쫓겨 다니지만 조금만 더 지나면 뜻이 이루어져서 우리가 거쳐 갔던 이 기둥이 얼마나 귀한 기둥이 되고, 이 집이 얼마나 귀한 집이 되겠습니까? 먼 후일에 우리 후배들이, 역사가들이 우리가 거쳐 갔던 이 자리를 찾으려고 우리의 노정을 더듬을 때가 올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대구에 최 여사가 와서 아버님과 우리 일행을 경찰에 신고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쫓기는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죄 지은 것도 없는데 항상 마음 졸이는 생활이었습니다.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숨기부터 하고, 뒤따라오는 사람이 있다고 느껴지면 골목길에 한참 들어갔다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잘못한 양, 죄가 없으면서도 죄가 있는 양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쫓기면서 살았습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생활 속에서도 나중에 이런 생활이 역사가 될 것이라는 이 목사의 말씀이 나에게 감동과 힘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정말 신앙도 좋으시네요. 어떻게 이런 난관에서 그런 생각이 나는지 존경스럽습니다.” 하고 말씀드린 적도 있습니다. 그만큼 당시 우리 생활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힘들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아버님을 모시는 우리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아버님의 어려움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아버님께서는 얼마나 힘드실까?’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요한 목사의 말처럼 예전의 고생이 귀한 역사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 없는 지난 추억입니다. 대구에서 어렵게 살았지만 아버님과 함께 식사도 하고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꿈만 같은 일이었습니다. 하루는 저녁식사 준비를 시작하려는데 밖에서 “게 사세요, 게 사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침 조금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나가서 게를 사다가 저녁을 같이 먹었습니다. 아버님과 이요한 목사가 같이 젓가락으로 게살을 발라서 드시는데, 아버님께서 “아이고, 이 게가 강현실의 손만큼 크구나.” 하셔서 한참 웃었던 일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용문산으로 떠나다
1954년 3월 25일, 아버님께서 용문산에서 나운몽 장로가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있으니 함께 가자고 하셨습니다. 아버님을 모시고 옥세현 모친, 지승도 모친, 이요한 목사, 김재건, 정덕희, 정 신부(천주교 신부)와 나까지 8명이 출발했습니다. 
용문산으로 가는 길은 포장이 잘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참 걸어서 올라갔습니다. 나운몽 장로가 용문산에 큰 천막을 쳐 놓고 부흥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선 인근 마을에 방 두 개를 빌렸습니다. 
아버님은 집에 계시고, 우리 일행은 그날 밤 나 장로가 인도하던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우리는 그날 부흥회에 가면서 아버님께 “혹시 나 장로에게 선생님과 만날 의사가 있는지 물어볼까요?” 하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무슨 예감이 있으신지 “내가 만나는 건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나서 그가 이해를 잘 하여 감사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도 좋고 우리도 좋지만, 만약에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를 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그가 일생 동안 쌓았던 모든 공적과 기대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된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너희들이 만나는 게 좋겠다. 내가 직접 만나서 그 사람이 가는 길을 막게 된다면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통해 말씀을 접하고 난 다음에 그가 아버님을 찾아오게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 장로는 어떤 계시를 받았는지 설교시간에 “여기에 심령 도적들이 와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심령을 잘 건사하지 못하면 도적들에게 잃어 버리고 맙니다.”라고 했습니다. 
부흥회의 분위기에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모두 손뼉을 치며 큰 소리로 기도하는데, 회개하고 자복하며 통곡의 기도를 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부흥회를 끝내고 나오는데, 우리를 알아보았는지 청년들이 시비를 걸면서 긴 서까래를 들어 때리려고 했습니다. 청년들을 피해 내려오는데, 어떤 사람은 서까래에 걸려서 넘어질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날 밤 아버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많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신령한 부흥사나 대부흥사들의 사명은 길게 가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가 되지 못할 때는 7년을 넘기기 힘들며, 결국 모든 은혜의 역사는 거둬지고 만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사명이 끝난 뒤에도 자신들의 사명이 끝난 것을 모르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한국의 유명한 부흥사들도 자신들이 해야 할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 여러 방법을 통해 그를 치게 되고 은혜가 식어서 냉랭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아버님께 귀한 말씀을 듣고는 나 장로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 이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들도 함께 이 귀한 말씀을 들었으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하는 마음이 들자 더 사무치는 심정으로 그들을 위하여 기도드렸습니다. 

이튿날이었습니다. 아직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대구에서 임 집사가 용문산으로 찾아왔습니다. 임 집사는 오자마자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형사들이 선생님이 계시는 집을 습격해 왔습니다. 억지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 방안에 있던 모든 물건들을 경찰서로 가지고 갔으며, 그 방에는 출입엄금이라고 새빨간 글로 써 놓았습니다. 형사들이 다 어디로 갔느냐고 묻기에 용문산에 기도하러 갔다고 했습니다. 아마 오늘 오전 중으로 이곳에 형사들이 올 것입니다. 어서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날 아침 조반 후 우리 일행은 아버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찬송을 부르면서 눈물의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그날 아버님께서는 “내가 가는 곳은 싸움이요, 눈물이요, 핍박이요, 고통이다. 이 사탄의 세계를 하나님의 나라로 세우려니 사탄이 가만히 있지 아니한다. 무슨 방법으로든지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공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능력으로 하루아침에 사탄을 굴복시킬 수도 있지만 인간의 책임분담이 있기 때문에 못 하시고, 인간이 해 주기를 바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 후 기도를 드리는데, 또다시 울음의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가는 길에는 험산준령과 같은 가시밭길이 놓여 있습니다. 가도 가도, 넘고 넘어도 또 넘어야 할 고갯길입니다. 아버지, 한국의 교계와 사회가 반기를 들고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뜻을 조금이라도 알았던들 반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몰라서 반대하오니 저들의 잘못을 잘못으로 생각지 마시고 용서해 주소서! 아버지, 나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이것을 힘들다거나 어렵다고 생각지 않겠습니다. 염려되는 것은 하늘 아버지께서 반대 받고, 핍박을 받고 있는 나를 보고 염려하며 걱정하실까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아버님, 저는 아버지와 약속했던 그 뜻을 살아생전에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아버님, 나를 보시고 염려의 짐을 풀고 안심하시옵소서! 이 아들이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무서운 시험도, 환난도, 아픔도, 고달픔도 저는 감사한 마음으로 달게 받으며 극복해 나가겠습니다. 스승을 따르고 있는 이 불쌍한 무리를 아버지, 기억하시며 강하고 담대하게 함께 이길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뜻과 사랑이 길이길이 저들을 지켜 주실 것을 부탁드리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습니다, 아멘!” 하시며 아버님께서 기도를 드리는데, 우리 일행은 큰 소리로 울면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용문산을 떠나 김천까지 걸어왔습니다. 오면서 ‘한 나라를 독립시킨 독립군들도 생명을 내어 놓고 싸웠는데, 6천 년 동안 하나님이 원하시던 하늘의 뜻을 이루는 이 중대한 일에 왜 생명을 못 바치겠는가? 그들 이상의 심정과 담력을 가지고 싸워야 하겠다. 또 먼 후일 후대의 사람들이 “이 뜻을 이루기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고,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바치며 싸웠던 당신들 덕분에 이렇게 우리는 좋은 세상에 잘 살고 있습니다.” 하고 말할 수 있게 하자!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인류가 감사하면서 외칠 수 있는 그 날을 필히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이어서 김천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두 주먹을 꽉 쥐고 굳은 결의를 했습니다. “이 길에서 떠나지 말고 끝까지 뜻을 붙들고 싸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선생님의 손발이 되어 함께 고난과 즐거움을 같이 하자!”고 결심을 나누면서 헤어졌습니다.
아버님과 이요한 목사는 서울로, 옥세현 모친과 지승도 모친은 부산으로, 나와 김재건 권사는 대전으로, 그리고 정 권사와 정 신부는 대구로 흩어졌습니다. 나는 그때 대전으로 갔기 때문에 대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경찰이 대구에 있던 모든 짐을 압수해 가서 역사적인 기록이 없어진 것은 지금도 아쉽습니다. 경찰이 그 방에 있던 짐을 모두 가지고 가서 그동안 아버님께서 보내 주셨던 편지, 모아두었던 사진, 내가 몽시를 받아서 써 둔 수첩까지 모두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 없어진 것이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생활




대전에서 
말씀을 선포하다 
1954년 3월 26일, 대전에 도착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려고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전교회 개척을 위해 간 것은 2년 뒤인 1956년 6월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나를 대전으로 보내시면서 “선전포고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아버님, 전쟁도 나지 아니했는데 무슨 선전포고를 합니까?”라고 여쭤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버님께서는 “전도는 안 해도 괜찮아.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이라는 선전포고를 하라. 새로운 시대가 왔다고, 재림주님이 오셨다고 선전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나에게 신령한 목사, 장로, 교주, 신도들에게 새로운 시대와 말씀을 알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나는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 40일, 60일, 80일 동안 말씀을 전하다가 돌아왔습니다. 돈 한 푼도 없이 말씀을 선포하러 다니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지방의 어디를 가도 교회도 없고, 식구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외롭고 힘든 노정이었습니다. 식사는 얻어먹고, 잠은 사정해서 잠자리를 빌어서 잤습니다. 그러다가 돌아올 때는 신세 진 이들에게 입은 옷 한 벌만 남기고 가지고 갔던 모든 것을 나눠 주고 돌아왔습니다. 
고생을 하며 80일을 나가서 말씀을 전하다가 돌아와서는 아버님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너무도 흥미진진하게 보고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보고를 다 끝마치기도 전에 “그래, 또 나가야지! 언제 나갈래?” 하셨습니다. 그럴 때면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고생하다가 돌아온 제자에게 하루라도 따뜻한 방에서 쉬었다가 나가라고 하시지 않으시나?’ 하는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루라도 전도라는 생각 없이 지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대전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중앙장로교회로 갔습니다. 그 교회의 전도사가 나와 좀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채 듣지도 않고 화부터 냈습니다. “나는 예수를 잘 믿고 있는 전도사인데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떠드느냐?”고 하면서 내가 가지고 갔던 보따리를 마루에서부터 마당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그날은 비가 와서 땅이 젖어 있었습니다. 비에 젖은 보따리를 다시 집어 들고 “빨리 나가라!”는 고함소리를 들으며 쫓겨났습니다. 
그때부터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요, 밤이면 잠을 잘 수 있는 곳을 찾기도 힘들었고, 하루 세 끼의 밥을 얻어먹는 것도 퍽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잘 곳을 못 찾고 기성교회에 들어가 찬 마룻바닥에서 철야기도를 하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교회에서 자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대전장로교회에서 만난 한 집사의 집 골방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골방은 쌀을 쌓아 둔 곳으로 불을 뗄 수 없는 냉방에 다리를 뻗고 누울 수도 없을 정도로 좁았습니다. 나는 그 방에 앉아서 밤을 새우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대구제일교회의 한병혁 목사가 대전장로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병혁 목사는 대구에서 유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를 좀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나는 밤새워 한 목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중심하고 이루어지고 있는가, 주님은 어떻게 오셔야 하며 언제 어디로 오시는가, 세례 요한의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등 말씀의 핵심을 간추려 간곡하게 알아보기를 권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다 쓰고 나니 15매나 되었습니다. 
집 주인인 집사에게 부흥회가 열리는 날 오후에 한 목사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날 저녁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한 목사는 “부산에서 대구에 들어와 잘 믿는 권사와 집사를 다 빼앗아 간 여자 이단이 대전에 또 왔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그 여자 이단이 와 있는지 모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그 여자 이단은 성경에 없는 교리를 자기 마음대로 왜곡해서 설명합니다. 여러분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믿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단에 유혹되기 쉽습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편지에 적은 내용을 일일이 반박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가만히 설교를 들으면서 2천 년 전 예수님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이들은 평범한 유대인들이 아니라 제사장, 서기관, 바리세인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버님을 가장 반대하는 이들도 평신도가 아니라 지도층에 있는 이들이고 양떼를 이끄는 목자들인 것을 생각하면 답답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결국 그 부흥회 이후에 교회마다 여자 이단이 왔다는 소문이 나서 교회를 방문해 기도하는 것조차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낯선 젊은 여자가 교회를 방문해서 기도를 하면 ‘대전에 왔다던 그 여자 이단이 아닌가?’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쉬지 않고 강하고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하러 다녔습니다. 

하루는 한 성결교회를 찾아가 목사를 만났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크지 않은데 증축을 하려고 교회당 앞에 서까래를 많이 세워 두었습니다. 나는 강하게 마음을 먹고 목사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목사님도 기도 많이 하시고 정성을 많이 들여서 오늘 이때가 어떤 때라는 것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옛날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자기 눈으로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지 않습니까? 지금도 그러한 때입니다. 우리 목사님이 기도 많이 하시고 주님을 만나려고 애를 많이 써 왔는데 오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지금까지 일해 왔던 것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기도도 많이 하고 정성을 많이 들이는 분들에게 이런 때가 왔다는 것을 전하러 왔습니다. 옛날의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 넘어올 때 신앙의 전환기였듯이 지금도 신약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섭리시대로 전환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전환기를 알고 신앙의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우리도 2천 년 전 유대인들과 같이 불신의 후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말을 다 들은 그는 버럭 화를 냈습니다. “아니, 대전에 여자 이단이 들어왔다더니 당신이 바로 그 여자 이단이요?” 하면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들고 나를 때리려고 했습니다. 
나는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오며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공사를 위해 세워 둔 서까래를 가지고 나를 치려고 했습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자 도망가던 내 뒤로 서까래를 던지기까지 했습니다. 다행히 내가 맞지는 않았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웠으면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느냐?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책망을 하시며 ‘화가 있을지어다.’ 하고 화를 퍼부으신 그 심정이 느껴져 안타까웠습니다. 대전에서 40일 동안 고생하면서 뜻을 전하느라 애를 태웠으나 큰 소득은 없었습니다. 
대전에서 얻은 하나의 소득은 백신명 할머니를 만난 것입니다. 백 할머니는 영통한 분으로 수십 년간 영계와 통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분은 나를 보자마자 “당신은 천사장적 나팔사명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나를 보자마자 증거했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천사장이 공중에서 나팔을 불고 내려올 줄로만 알았습니다. 나중에 아버님께 그 말씀을 보고드렸더니 “강현실이 하고 있는 것이 천사장의 나팔 사명이야. 주님이 오시기 전, 나타나기 전에 먼저 천사장이 나팔을 불어야 되는 거야. 그 나팔이 무슨 나팔이냐면 정말로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것, 주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알리는 거야. 이런 것을 하늘의 나팔을 부는 것, 즉 천사장의 나팔 사명이라고 하는 거지. 그 사람이 그걸 말한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백신명 할머니에게 협회 창립기념으로 아버님과 여러 식구들이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님을 가리키면서 “여기에 종교를 통일하실 분이 계시다.”면서 기뻐했습니다. 나는 다시 “그분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백 할머니는 “이분은 재림주님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당신이 지금 가는 길은 무한히도 좁고 험한 길이어서 어느 누구도 가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멀지 않아서 세계인들이 다 가지 않으면 안될 길이니 힘들고 어려워도 꼭 이 길을 가야만 한다.”고 격려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그분의 말씀을 반신반의했습니다. 한국인 한 사람도 이렇게 전도하기가 힘든데, 세계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말은 선뜻 백 퍼센트 믿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세계 194개국에 선교사들이 나가서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60여 년 전의 예언이 현실로 나타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세계의 각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통일식구들은 한국을 진리의 조국, 신앙의 모국으로 동경하고 그리워하며 사모하고 있습니다. 살아생전에 신앙의 종주국인 한국 땅에 발을 디뎌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세계 각국에 많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나오며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됩니다. 

일심교와의 만남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와 1954년 5월 3일 협회 창립행사에 참석했습니다. 협회 창립행사는 5월 3일이었지만, 아버님께서 5월 1일을 창립일로 정하자고 하셔서 지금까지 5월 1일을 창립일로 기념해 오고 있습니다. 
협회 창립 사진을 자세히 보면, 갓을 쓴 노인 한 사람이 끼어 있습니다. 그는 일심교 대표로 협회 창립행사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일심교인들은 전북 김제에 모여 살면서 서울로 올라와 흰 띠를 등에 띠고 다니면서 외쳤습니다. 띠에는 ‘예수 재림 기별 왔소.’라고 써 있었습니다. 그들은 청와대, 중앙청, 관공서를 찾아다니면서 “예수가 한국에 왔다는 기별을 전하기 위해 왔소!” 하고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유효민 씨가 그들 중 한 사람을 세대문 집으로 모시고 와 일심교의 내력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 사람이 창립행사에도 참석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교주는 강대성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교주는 1945년 8월 15일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계시를 받고 예언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협회 창립행사 후 나에게 그들이 일 년에 한 번씩 올리는 대제에 참석하라고 하셨습니다. 음력 4월 8일이면 그들이 하나님께 대제를 올렸습니다. 대제일인 음력 4월 8일을 앞두고 삼일 전에 서울을 떠나 김제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전북 김제군 광활면 학당리라는 곳에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날 오후 새까만 비로도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강대성 교주는 풍채가 아주 좋은 사람으로 흰 한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강 교주는 나를 보고 “이 집은 하나님을 모신 집이기 때문에 새까만 치마를 입고는 들어올 수 없다.”며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당장 나가라!”며 나를 쫓아내려고 했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고 더 큰소리로 당당하게 “나는 교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먼 서울에서 일부러 찾아온 사람입니다. 이렇게 박절하게 대해서는 안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마지못해 그는 “정 그렇다면 방안에는 못 들어가지만 마루에 좀 앉으라.”고 했습니다. 
마루에 앉으니 그는 또 나를 꾸짖었습니다. “한국 사람이 왜 머리를 지졌습니까?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답게 비녀를 찔러야죠.”라고 했습니다. 
나는 주눅 들지 않고 “할아버지는 왜 남의 사생활을 가지고 걱정을 하십니까? 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물어보고 사는 사람이니 염려를 놓으세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 교주는 쿵 하는 소리를 내면서 그만 뒤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10분, 20분이 되어도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자 수제자 몇 사람이 나에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 들었습니다. 
“왠 여시 같은 여자가 서울에서 왔다고 하더니 그만 우리 선생님을 죽여 버렸다.”면서 그들은 당황한 모양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의원을 불러오라고 시키고 나에게 자기 교주를 살려내라면서 위협했습니다. 나는 속으로 놀랐지만 대담하게 “보시다시피 나는 이 마루 구석에 앉아 있었을 뿐 손 하나 대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가 요술을 하는지, 기압술을 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큰일 났다.”고 했습니다. 교주가 의식을 잃자 온 집안이 그야말로  뒤집어진 것입니다.  
다행히 잠시 뒤에 교주가 정신을 차리면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강 교주는 “내가 입신을 해서 영계에 가 보았는데, 이 부인의 영적인 위치가 내 위치보다 훨씬 높다.”면서 “이 부인이 여기 있는 동안 식사나 모든 대접을 내게 하듯이 잘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한 강 교주의 지시에 따라서 나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죽만 해도 잣죽과 깨죽이 나오고, 여러 가지 과일에 찜닭도 준비해 주었습니다. 그때는 고생을 하며 말씀을 선포하던 시절이라 그런 대접이 신기하고 놀랍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음력 4월 8일이 되었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일심교 신도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수백 명이 모였는데 어른은 상투를 틀고, 총각은 머리를 길게 땋아서 늘어뜨렸으며, 부인들은 흰 옷에 비녀를 찔렀습니다. 물론 처녀들도 머리를 땋아서 늘어뜨리고 있었습니다. 대제는 소와 돼지를 잡고 최대한 성대하게 차려서 지냈습니다. 
강 교주는 대제를 올리면서 나에게 청중들에게 한 말씀을 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와 한국’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했습니다. “택함을 받은 한국 사람들은 세계 앞에 으뜸이 되는 민족입니다. 따라서 모든 면에서 자랑할 수 있는 내용을 지니고 살아야 하며, 인륜적인 면에서 만민 앞에 본이 되는 개인과 가정과 민족이 되어야겠습니다.”라고 40여 분 말씀을 전했더니 청중들 모두 감명을 받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찾아갔던 그날부터 그곳에 환난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선, 그 가정에 큰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강대성 교주에게는 부인이 두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인과 둘째 첩 외에 18살 정도 되는 젊은 처녀가 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 젊은 처녀가 강 교주의 시중을 드는데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았습니다. 내가 도착한 날부터 교주와 부인이 그 젊은 처녀 때문에 부부 싸움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부 싸움 끝에 교주가 자신의 위치와 상황을 생각지 않고 부인을 때리려고 했습니다. 부인은 교주를 피해 도망을 치고, 교주는 부인을 잡으려고 뒤를 쫓기도 했습니다. 대제를 준비하는 곳에서 참으로 웃지 못할 광경이었습니다. 
기가 막혀 그 광경을 보는데, 이상한 환상이 보였습니다. 교주의 모습이 사람은 사람인데 머리가 없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 환상을 보며 ‘아, 이 사람이 뭔가 하나님의 뜻은 알았는데 인격 수양이 덜 되어서 중심이 없구나! 중심 없는 내용을 가지고 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제를 집전하기 전, 나는 강 교주에게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이야기는 수긍을 하지 않고 그저 자기 이야기만 옳다는 식으로 계속 말을 했습니다. 나는 창조원리를 중심으로 하나님에 관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일심교는 음양의 조화를 이야기하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음양으로 계신다는 것을 말했지만, 내가 하는 말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고 제동을 걸면서 자기 이야기만 했습니다. 
교주가 인격적으로 부족한 사람이다 보니 따르는 이들도 그런 한계가 있었습니다. 대제 이후에 제사에 차려 놓은 음식을 서로 나누며 잔치가 벌어졌는데, 잔치판이 아니라 싸움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도들끼리 싸움이 벌어지다 격해지니 낫을 들고 설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나는 ‘인격수양이 부족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전북 전주로 갔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결국 강 교주가 혹세무민한다는 혐의를 받고 유치장에 들어가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언론에서 강 교주가 사망한 이후에 18살 되는 젊은 여성과 영혼결혼식을 했다는 보도가 된 것도 보았습니다. 내가 갔을 때 부인과 싸움이 났던 그 처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습니다. 
그때 아버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강현실, 너는 언제나 용감하고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이기에 누구보다 담대하게 나가 싸워야 한다. 이 원리는 지금까지 숨겨져 있었던 비밀인데, 아버님을 중심삼고 나온 말씀을 이 시대 사람들이 믿으면 복을 받지만 반대하면 심판을 받는다. 때문에 말씀을 선포할 때는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당당해야 한다. 강현실이 말씀을 전할 때 듣는 이가 의심을 한다든지 반대를 한다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 좋지 않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후에도 전도 중에 일심교 교인을 가끔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일심교 교인은 집에 깃발을 꽂아 두었습니다. 전라도 지역에 많이 살았는데, 깃발이 있는 집에 가면 대제 때 본 사람들이 많아서 항상 대접을 융숭하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전라도 지역에서 전도를 할 때는 큰 고생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라도에서 만난 사람들
대제가 끝난 다음날부터 나는 전라북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전라북도 이리에서 있었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나는 대전에 가서 백신명 할머니를 다시 한 번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전으로 가는 기차표가 없어서 이리로 가는 표를 샀습니다. 이리는 예정에 없던 곳이었지만 그냥 이리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밤차를 타고 이리역에 도착하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이리역에 도착해 “하나님, 길을 인도해 주셔야 하겠습니다.”라고 기도를 하면서 걸어가는데, 어떤 소복을 한 아주머니가 나를 보고서 “선생님, 이제 오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모르는 사람이어서 언제, 어디서 나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나도 모릅니다만 오늘 새벽기도를 드리는데, 선생님의 얼굴이 환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 이런 사람이 너의 집에 올 터이니 기다리고 있다가 마중을 하라는 말씀이 있어서 지금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선생님이 오셨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너무 기뻐했습니다. 
그 사람은 이순희 집사로 그 집에 가 보니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화장품 장사를 하는데 평소에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히 계시가 있어서 장사하러 나가지 않고 나를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조반으로 좁쌀밥을 해 주어서 같이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실, 저는 성결교회에 다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도 못 나가고 있습니다.” “왜 교회에 나가지 못하세요?” 했더니 “계시 받은 내용을 이야기했더니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한다면서 교회에서 이단이라고 하며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때 어디에서 엽서 한 장이 왔습니다. 그 사람이 엽서를 보더니 “참부모님으로부터 온 편지입니다.”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 교회에서도 ‘참부모’라는 말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버님도 ‘선생님’으로 모셨지 ‘아버님’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성혼 전이었기 때문에 ‘참부모’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편지를 읽는데 6천 년간 아버지와 딸이 헤어졌다가 상봉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얼마나 절절하고 유식한 말로 되어 있는지 대단했습니다. 6천 년간 그리워하고 만나고 싶어했던 딸이 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아버지가 그 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서로가 서로를 찾기 위해 애달파 한 내용이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나는 그 편지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 엽서를 한번 보고 싶네요.” 하면서 엽서를 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내용이 이 집사가 읽은 내용과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친척으로부터 온 일반적인 안부편지였습니다. 나는 속으로 ‘참, 이상하다. 안부편지를 참부모님이 주신 편지라고 그렇게 감동적으로 읽을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에 아버님께 그 편지에 대해 말씀을 드렸더니 “지금의 때는 뜻도 모르고 의미도 모르면서 참부모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는 때”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집사는 나에게 “선생님, 사흘만이라도 머물면서 말씀을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담과 해와가 어떻게 타락했는지 기도해 보십시오.” 했습니다. 마루에 앉아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이 집사는 기도실에 들어가 기도를 하고 응답을 받아 나왔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온 이 집사는 “아담 해와가 타락한 것은 불륜한 사랑, 음란 때문이라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기도해 보십시오.” 했습니다. “부활이란 공동묘지에서 시체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합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그 사람은 원리를 알지 못했지만 기도로써 해답을 얻고 원리를 증거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주님이 언제 어디로 어떻게 오시는지 기도해 보십시오.”라고 말했더니 “어떻게 오시는가 기도를 했더니 수저가 한 벌 나타납니다. 수저가 보이는 걸 보니 우리처럼 진지를 잡수시는 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오시는가 기도했더니 동방인 우리 한국으로 오신다고 합니다.” 했습니다. 그렇게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려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광주의 이현필 선생
전북 일대를 거친 다음에 전라남도 광주를 가게 되었습니다. 광주에 가서는 이현필 선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인연이 된 사람은 오 장로였는데 이 사람이 이현필 선생을 존경하고 따르고 있다며 소개해 주었습니다. 오 장로는 자기 아들에게도 “진지 잡수셨습니까?” 하는 식으로 경어를 사용하는 분이었습니다. 그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오 장로뿐만 아니라 자기 동료끼리, 또는 부자지간에도 모두 다 서로에게 존칭을 쓰며 높임말을 쓰고 있었습니다. 요즈음은 자녀교육을 위해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1950년대만 해도 그런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내가 오 장로에게 “왜 아들에게 경어를 쓰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인간에게는 법보다는 영이 훨씬 더 중요한데 영적인 면에서 내 아들이 나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에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존경하며 존대어를 쓰고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나물밥을 먹고 땅을 파면서도 즐거워하며 주님 오시기를 갈구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인상 깊었습니다. 그런 오 장로의 모습을 통해서 ‘이곳에 뭔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90일 동안 금식을 한 사람으로 ‘동광원’이란 간판을 붙이고, 서양 사람이 준 좋은 건물에서 수십 명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라 그 동네에서는 성자라고 존경 받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생활했던 그대로의 생활을 해 보려고 무던히도 애쓰며 살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여자 순경을 지낸 가정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새 옷을 해서 입혀 주면 그날로 나가서 거지 옷과 바꾸어 입고 온답니다. 이가 득실득실한 거지 옷을 입고 오니 부인이 화가 나서 뭐라고 하면, 절대 안 그러겠다고 부인을 달래 놓고 다시 거지들에게 가서 이발을 해 주고 목욕도 시켜 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쌀밥을 해서 주면 깜짝깜짝 놀란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어찌하여 쌀밥을 맘 놓고 먹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루에 식사는 두 끼를 먹는데 아침에는 나물죽, 저녁에는 보리죽을 먹으며 직접 농사를 지어서 자립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설교를 하러 단상에 올라가서 1시간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무언으로 서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런 이야기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는데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니 거기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통곡을 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벌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6·25 전쟁이 났을 때는 90일 금식을 하던 중이었는데, 그때 한 미국 선교사가 미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를 지게에 지고 교인들과 함께 산으로 들어갔답니다. 산에서 미국 선교사와 함께 피신해 있었는데 밥을 짓는다고 하다가 그만 불이 나서 산을 다 태우게 되었습니다. 겨우 불을 끈 다음에 모두 모여서 회개를 했다고 합니다. 
모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잘못으로 불이 났다고 회개를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밥을 하는데 관심을 두고 살폈어야 했는데 잘못했습니다. 아닙니다. 내가 이 자리를 잡았는데 돌이 있는 다른 자리를 골랐어야 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불이 났을 때 당황하고 놀라서 불을 끄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면서 서로 울면서 회개하고 하나가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감명을 받아 나도 아침 예배시간에 참석했습니다. 처음 그 사람을 보니 몸이 말랐는데,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습니다. 열심히 설교하는 내용이 참으로 은혜로웠습니다. 그런데 내 귀에 분명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누군가 “현실아, 현실아, 현실아!” 하고 내 이름을 세 번씩이나 불렀습니다. 아버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 음성이 얼마나 또렷한지 나도 모르게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말았습니다. 예배시간에 정중앙에 앉아 있다가 누가 나를 부르는가 싶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러자 뒤에 앉아 있던 분이 내 치마를 당기면서 “지금은 설교시간이에요. 왜 서서 예배를 방해합니까?” 하고 나를 꾸짖었습니다. 그때서야 정신이 돌아온 나는 부끄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서울로 돌아와서 그 일을 아버님께 보고드렸더니 아버님께서 “하나님이 강현실을 참으로 사랑하고 계시는구나. 잘못될까봐, 뜻을 저버리게 될까봐 염려해서 이름을 부르셨구나.”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 행여나 다른 곳에 내 마음을 빼앗길까봐 아버님의 음성으로 나를 일깨워 주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신 것을 느끼니 감사의 기도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큰 기대를 거시고 직접적으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배 후 이현필 선생과 일대일로 마주앉아 복귀원리에 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 사람의 성경을 보니 빨간 줄이 쫙쫙 그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많이 보셨네요.” 했더니 “이이고, 아닙니다. 이건 제 성경이 아닙니다. 나는 책에 빨간 줄을 칠 줄도 모르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참, 겸손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대화를 이어 갔습니다. 
그러나 대화를 할수록 그 사람이 겸손한 것 같으면서도 자기가 있었습니다. 겸손하게 내 말을 듣고 있는 것 같다가도 자기 이야기만 반복해서 하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척 하지만, 사실은 자기 고집이 강한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보리농사를 지어서 타작을 하려고 쌓아 둔 곳에서 불이 났습니다. 기계에 무슨 잘못이 있어서 불이 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내가 그런 실망을 한 순간에 불이 났다고 하니 신기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 보고를 드렸더니 “지금은 심판하는 때이다. 선과 악, 참과 거짓을 가르는 역사를 하는 것이니 꼭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이현필 선생을 보면서 하나님이 사방에 성도들로 하여금 준비를 시켜 놓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심판이 직접적으로 일어난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명 감리교회의 조 권사
충청남도 공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공주 땅에 도착했을 때 무일푼이었습니다. 그래서 걸어가다가 앞에 보이는 어떤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이곳 공주에서 방 하나를 빌리고 싶습니다.”고 말하자 그 아주머니는 왜 방을 빌리려고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데, 이 곳에서 일주일간만 전도하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 그래야만 공주 땅에 남아 있는 모든 한이 풀릴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 전도를 하시는군요. 나는 감리교회에 다니는 조 권사라고 합니다. 전도를 하려면 우리 집으로 가시죠. 우리 집이 특별히 좋진 않지만 조용한 편이어서 기도하기에 좋으실 겁니다.” 하면서 자기 집으로 안내했습니다. 그 아주머니 집으로 가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권사의 남편이 서울에서 대학교수이면서 의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도 다 대학에 다니느라 서울에 있고, 지금은 그 아주머니 혼자 집에 있었습니다. 
집은 조 권사의 말대로 평범한 초가집이었습니다. 그 집에서 일주일 동안 지내는데 지성으로 나를 대접해 주었습니다. 첫날 도착하자마자 쌀밥에 고기반찬을 해서 대접해 주었습니다. 내가 원리내용을 말씀하니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서 좀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더니 다음날 나에게 “굴에 좀 같이 가십시다.”라고 했습니다. 
“굴에는 왜 갑니까?” 
“굴 속에서 15년 동안 기도하시는 장로님이 있는데, 그분에게 한번 같이 가 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굴에 도착해서 보니 정말로 굴 속에서 15년 동안 기도를 했다는 장로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보더니 “이분은 대단한 분입니다. 영적인 위치가 나보다 더 높은 선생님입니다.”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조 권사는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그런 조 권사에게 “조 권사님, 이 선생님은 대단하신 분이니까 머무시는 동안 최대한 잘 모시도록 하세요.” 했습니다. 
굴에서 그 장로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가 계시 받은 내용이 아주 많았습니다. ‘15년 동안 기도를 하면서 지금이 굉장히 긴박하고 중요한 때’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것도 계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모든 종교보다 새롭게 나오는 신흥종교의 말씀이 하나님 앞에 더 가까울 수 있다는 말씀도 하며 조 권사를 설득했습니다. 나는 대화를 나누면서 그 장로와 영적으로 굉장히 가깝게 밀착되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들에게 메시아론을 강의할 때는 모두가 통곡을 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이라고 생각하라고 하니 크게 회개도 했습니다. 
그때부터 조 권사는 더욱 나를 극진히 모시고 내 말을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교회의 권사와 집사들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덕분에 일주일 동안 말씀을 편안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초대된 사람들도 모두 말씀을 기쁘게 들었습니다. 조 권사는 나에게 뭐라도 하나 더 해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잘 지내며 원리강의 전편을 말씀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떠날 때가 되어 그동안 잘 지내다 간다며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뒤에서 “강 선생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하고 급하게 불러 세웠습니다. 그러더니 안에 들어가서 한참 있다가 돈을 한 뭉치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게 뭡니까?”
“두 달 동안 십일조를 하려고 차곡차곡 새 돈만 모아 둔 것입니다. 농 밑에 넣어 두었는데 떠나시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이 돈을 선생님께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안됩니다. 십일조는 무서운 돈입니다. 나는 이것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감리교를 위해 준비된 것이기에 내가 받아서는 안됩니다.”라고 나는 사양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조 권사가 “나는 감리교를 위해 십일조를 준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선생님께 드리라고 하니 내가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강권해서 어쩔 수 없이 그 정성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나를 사랑해 주시나 봅니다. 이렇게 다 인도해 주시고 협조해 주시고 지원해 주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강현실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둘은 서로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때 그 십일조가 얼마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꽤 많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천안에 와서 일주일 동안 방을 얻어 전도를 마치고 서울까지 여비를 한 뒤 선생님께 드리려고 케이크 한 상자를 사고도 돈이 남았습니다. 
그때 나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 꼭 나의 아버지, 즉 강현실의 아버지만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내 배후에는 살아 계시는 아버지가 동행 동사 동역하시며, 지칠 때는 용기를 주시고, 외로울 때는 위로해 주시며, 돈이 없을 때는 누구를 통해서든지 채워 주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심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내 생활은 정처 없는 나그네의 생활이었습니다. 오로지 마음에는 ‘언제 누구에게 이 소식을 전하느냐?’ 하는 것만이 중요하고 염려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남한 땅을 세 바퀴 이상 돌았습니다. 때로는 교회당에서 담요 한 장을 뒤집어쓰고 엎드려 밤을 새울 때도 있었고, 또 어느 때는 고아원에 들어가 하룻밤을 재워 달라고 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날은 우는 아이들 틈에서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또 어느 때는 남의 집 골방이나 헛간, 처마 밑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습니다, 
밥을 얻어먹는 것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때는 사람들의 인심이 좋았지만, 어디 가서 밥 한술 달라는 소리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정 배가 고파 일어서지도 못할 지경이 될 때에는 꼭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당시의 아버님께서는 조급하신지 나만 보면 “현실이 집에 들어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욕을 해주고 싶고 쫓아 내보내고 싶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지금도 택함 받은 준비된 성도들이 새로운 소식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찾아야 하고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려 주지 못하면, 먼 후일에 그들이 우리를 향하여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참소할 수 있는 때가 온다.”고 말씀하시며 “하루가 천 년 같으니 하루 빨리 말씀을 전하라.”고 재촉하셨습니다. 

서울에서의 생활
서울 성동구 북학동 391-6번지 세대문교회에서는 유효민 씨를 중심으로 풍경사진을 찍어 복사해서 파는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수경 씨는 길가에 앉아서 그림에 색칠을 해 주고 팔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때 복사한 사진이 그런대로 잘 팔려서 생활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판매할 사진을 준비하느라 밤늦게까지 사진을 복사하고 난 다음에는 그 사진을 씻어야 했는데, 약이 독해서 손이 물감을 들인 것처럼 노랗게 되고 갈라졌습니다. 
어느 날 아버님께서 콜드크림 큰 것을 사오셨습니다. 아버님은 “크다고 마구 쓰지 말고 아껴서 쓰라.”고 하시며 웃으셨습니다. 
그 집에는 수도가 없고 우물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물물을 식수로는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발소인 옆집에서 식수를 길어 와서 썼습니다. 그런데 남의 집에 아침부터 물을 길으러 갈 수 없어서 늘 조심하고 눈치를 보아야 했습니다. 
좁고 초라한 집이라서 옷을 갈아입을 공간도 없었습니다. 언젠가 어떤 식구가 나에게 “언니, 예전에 옷 갈아입을 곳도 없어서 부엌에서 갈아입으며 고생하던 때가 생각난다.”고 말해서 서로 웃은 적이 있습니다. 
유효원 전 협회장은 말씀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비스듬히 누워서 말씀했습니다. 아버님께서 옆에 앉아서 말씀을 들으실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말씀을 듣다가 답답하시면 직접 나서서 말씀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주로 예수님의 심정, 사정, 입장, 사명 그리고 하나님의 아픔에 대해서 청산유수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아버님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벅찰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쌀가게에 진 빚이 하루하루 늘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쌀가게에서 더 이상 외상을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참 걱정만 하고 있는데, 이득삼 형님이 밀가루 두 포대를 택시에 싣고 왔습니다. 그때는 득삼 형님을 보는 것이 구세주를 만난 것만 같이 기뻤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부딪칠 때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누구를 통해서든지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1955년 초, 동대문구 흥인동 251-44번지로 이사를 했습니다. 조그만 집에 있다가 큰집으로 이사를 해서 기뻤습니다. 흥인동 집에서부터 새 역사의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여대생들이 많이 들어왔으며, 새 식구들이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집회장소가 넓지는 않았지만 꽉꽉 차게 되었으며, 늦게 오는 이들은 밖에 서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피와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통곡을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최고의 경지에 달했을 때는 숨이 끊어지는 것같이 안타까워하며 서러워하셨습니다. 마음이 바른 자리에 서 있는 참다운 사람이라면 무릎을 꿇고 함께 동화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사진업을 해서 돈도 많이 모이고, 사람도 많이 모이는 정말 흥했던 곳이었습니다. 
세대문교회에서 연결되었던 최원복, 김영운 선생도 흥인동에서 결실로 맺혔고 황환채 씨 등 많은 식구들이 연결이 되었습니다. 세대문교회에서는 백 여 명이 말씀을 듣기는 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있을 때 유효원 협회장이 말씀을 아무리 전해도 결실이 맺어지지 않아 힘들어 했습니다. 하루는 나를 보고 “현실 씨, 왜 이렇게 전도가 안 될까요? 몇 개월이나 말씀을 전했는데, 한 사람도 식구가 되지 않네요. 어떻게 하면 전도가 될까요?” 하며 안타까워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흥인동에서 한 사람, 한 사람 결실을 맺을 때마다 아버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장충동교회와 7·4사건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모이자 흥인동에서 장충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를 가자마자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기독교계와 사회에서 색안경을 쓰고 작은 일에서 큰 일까지 문제로 삼았습니다. 매일같이 중부경찰서의 형사들이 드나들었습니다. 
한참 어수선하던 1955년 7월 2일, 최선길 여사가 장충동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오자마자 아버님이 계시던 방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갑자기 아버님과 대화를 나누던 최 여사가 고무신으로 아버님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도 모르게 고무신을 뒤로 감추고 방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맞고만 계셨습니다. 나와 김인주 권사가 옆에 있다가 달려들어 고무신을 빼앗았지만, 그때의 아버님 표정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최 여사를 야단도 치지 않으시고 그저 가만히 참고 계셨습니다. 그때 ‘무슨 사고가 생겨도 생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틀 뒤인 7월 4일, 아버님께서 경찰서로 연행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셨습니다. 최 여사와 기독교계가 하나가 되어 풍기문란 등의 혐의로 고발했지만 혐의는 적용되지 않았고, 병역기피의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셨습니다. 그 동안 신문에는 통일교에 대한 나쁜 기사가 말할 수 없이 많이 실렸습니다.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내용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아버님께서는 서대문형무소에 면회를 갈 때마다 전도에 대한 이야기만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데 미쳐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나는 “지금 바깥 상황은 전도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은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진리는 언제나 승리하는 거야. 그러니 쉬지 말고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모 교수, 모 장로, 모 목사 등의 이름을 거명하시며 만나러 가라고 재촉하셨습니다. 
그렇게 확고하신 아버님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런 상황에 기운도 빠지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막막함을 느낄 텐데, 아버님은 정말로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분이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아버님께서 서대문형무소에 계시는 동안 식구들이 하나로 뭉쳤습니다. 주일 설교는 처음에 안창성 선생이 인도하다가 차츰 내가 많이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스승을 잃어 버리고 외롭게 제단을 쌓던 모습은 진실로 하나님이 오셔서 역사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90일 동안 아버님도 계시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극한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뜰에 심은 호박을 따서 된장국만 끓여 먹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최 여사가 손수레에 이삿짐을 다 싣고 왔습니다. 아버님이 장충동교회에 계시니 자기도 장충동교회로 이사를 오겠다며 짐을 들여오려고 했습니다. 식구들은 “여기는 선생님의 집이 아니라 교회이고, 교회에 봉사하는 식구들이 지내고 있기 때문에 들어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최 여사는 흥분하면서 이삿짐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식구들은 이를 막으려고 하면서 한참 실랑이를 벌인 적도 있습니다. 그런 사진이 신문에 나기도 했습니다.
식구들이 아예 문을 걸어 잠그고 받아주지 않자 최 여사는 서대문형무소에 계시던 아버님께 찾아갔습니다. “나는 당신의 아내인데, 식구들이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당신의 집이고, 난 당신의 아내이니 당연히 들어갈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버님께서는 “그 교회는 내 것이 아니오. 우리 식구들이 돈을 모아 마련한 것이니 권리가 있다면 교인들에게 있지 나에게는 어떠한 권리도 없소. 그러니 교회에는 아예 들어갈 생각을 마시오.”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최 여사는 장충동교회로 이사 오는 것은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고통이 심했지만, 은사도 많았습니다. 김산 장로와 계룡산 도인 등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 찾아와 아버님을 메시아로 증거했습니다. 
하루는 김산 장로가 영적으로 계시를 받고 장충동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 “문선명 선생은 재림주 되시는 분이다. 지금은 옥중에서 수난을 당하고 계시지만, 먼 후일에 언젠가는 인류의 구세주로서 등장할 수 있는 날이 기필코 올 것이다.”라는 계시를 받고 장충동교회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처음에 교회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골목에 놀고 있던 아이들에게 “통일교가 어디 있냐?”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통일교가 뭔데요?”라고 해서 “문선명 선생님이 예배 보는 교회가 통일교다.” 했더니 “거기 가면 지옥 간대요. 거긴 이단이래요. 거기는 망했는데요.” 하면서 길을 가르쳐 주더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서 그 사람이 교회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주일예배를 드리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예배 중에 불쑥 “내가 할 이야기가 좀 있습니다.” 하면서 앞으로 나섰습니다. 처음에는 식구들이 깜짝 놀랐지만 그가 아버님을 인류의 구세주로 증거한다는 말에 식구들 모두 다 감동을 받았습니다. 외롭게 스승을 잃어 버리고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김산 장로를 보내서 우리에게 힘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교회를 찾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동네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도 알 정도로 통일교가 유명해졌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고 말해서 식구들을 웃게 만들었습니다. 

1955년 7월 초 어느 날은 지리산에서 천 일간 도를 닦던 도인 3명이 찾아왔습니다. 그 세 사람은 천 일 동안 지리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한 지 천 일 되던 날 응답이 왔습니다. “너희들이 천 일간 이곳에서 기도한 것은 통일교 문선명 선생을 만나기 위한 준비였다. 이제 기도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서울에 있는 문선명 선생을 만나러 가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세 사람 모두 똑같은 계시를 받았습니다.  
세 사람은 천 일 기도를 마치고 그동안 기른 머리를 땋아서 빙빙 틀어 올리고 그대로의 옷차림으로 장충동교회로 찾아왔습니다. 새벽부터 서둘러 서울에 와서 물어물어 찾아왔는데, 그때는 예배가 끝나 갈 무렵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서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면서 계시 받은 내용을 이야기했습니다. “지금은 문선명 선생님이 옥중에서 고생하고 계시지만, 그분은 세계 인류 앞에 구세주로 오신 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문선명 선생님이 세우신 통일교를 방문했으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하면서 세 사람이 발꿈치를 들고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꽤 넓은 예배당을 빙빙 돌면서 춤을 추던 광경은 장관이었습니다. 
‘우리가 침체되어 힘을 잃어 버리고 낙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외부 사람을 보내서 힘을 내도록 증거하게 하시고 격려도 해 주시고 춤을 추게도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출감과 청파동시대 
1955년 10월 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아버님께서 출감하셨습니다. 우리는 3개월 동안 고아와 같이 지내다가 아버지를 찾게 된 입장이어서 그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나오시자마자 장충동에서 청파동으로 이사하실 것을 서두르셨습니다. 그래서 출감하신 지 사흘만인 10월 7일 청파동1가 71-3번지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청파동에서 지낼 때 아버님께서는 나에게 하루에 세 집을 다니면서 증거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버님의 지시대로 하루에 세 집 이상 찾아다니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하루에 세 집을 찾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점심으로 먹을 빵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전도를 하는데, 문도 열어 주지 않는 집들이 많았습니다. 문을 열어도 “통일교에서 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면 어떤 집에서는 욕을 하고, 또 어떤 집은 몽둥이를 들고 나와 때리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양동이에 있던 물을 퍼부으면서 “이 이단아!” 하며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물 세례를 받고 온몸이 심하게 젖어서 다른 집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마음까지 힘이 빠져 교회로 돌아왔으나 죄송한 마음에 아버님께 보고도 올리지 못하고 방구석에 숨어서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강현실, 어디 갔나?” 하고 찾으셨습니다. 내가 조그만 목소리로 “여기 있습니다.” 했더니, “왜 그렇게 구석에 숨어 있나?” 하고 물어보셨습니다. 나는 더 작은 목소리로 “오늘은 낮에 전도를 나갔다가 물 세례를 받아서 그만 세 집을 다 돌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라고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아버님은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지금은 힘들지만 반드시 영광의 날이 온다.”고 위로해 주시고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어떤 날에는 교외로 나가고 싶어서 도봉동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하나님, 인도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하고 출발했는데 어떤 집에 들어가고 싶어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곱게 생긴 주인 아주머니가 너무나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나를 이렇게 반기실까?’ 하고 생각했더니, “나는 아무 교회에 다니는 집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기도하던 가운데 귀한 손님이 집으로 방문할 것이니 식사 대접을 잘 하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귀한 손님이 안 오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우리 교회의 교인들을 청했습니다. 그래서 막 음식을 먹으려는데, 선생님이 오신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니 교인들 여러 사람이 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성들여 준비한 음식이 상에 차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같이 먹으면서 오늘의 때에 대해 말씀을 했더니 다들 감동을 받으면서 좋아했습니다. 
“우리가 때를 모르고 믿으면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2천 년 전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민족이 얼마나 오시는 메시아를 기다렸습니까? 기다렸지만, 시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은 신앙 길을 갔기 때문에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놓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재림주님을 기다리고 있지만 이 시대에 맞지 않는 신앙 길을 가면 주님을 맞을 수 없을지 모릅니다. 어느 구름에서 비가 올지 모르는 것처럼 주님이 어떻게 오실지 모릅니다. 만약에 거지로 재림하셔도 우리는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마음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또 아주 비천한 입장에서 오시더라도 모실 수 있는 마음자세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항상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재림의 예수님을 맞아 들일 수 있는 마음자세가 필요합니다.” 내가 말씀하는 중에도 감동을 받아 교인들이 ‘아멘, 아멘’ 하면서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돌아와서 아버님께 보고드렸더니 “지금의 때는 마음문만 열어 놓으면 얼마든지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고, 길도 열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때가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전하는 생활을 8개월 정도 했습니다. 

1956년 6월 10일, 나는 아버님의 명을 받고 대전으로 개척전도를 떠났습니다. 대전으로 떠날 때만 해도 나는 의욕이 충만하여 소망에 불탔습니다. 노동휘 선생이 말씀을 듣고 감명을 받아 대전에 있는 자기 집을 교회로 내놓았습니다. 항상 갈 곳 없이 전도를 나가다가 준비되어 있는 교회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도착해 보니 노동휘 선생의 친구가 빈집에서 댄스홀을 하고 있었습니다. 친구가 쉽게 집을 비워주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40일 동안 하숙을 정해 놓고 전도했습니다. 
그렇게 하숙을 하면서 시내를 돌아다니며 전도했지만 생각처럼 전도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안타까운 하나님의 심정이 체휼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잃어 버리고 얼마나 안타깝고 서러워하시는가를 느꼈습니다. 가슴이 조여 들어왔습니다. 
나는 매일 대전 시내를 일곱 바퀴 돌면서 대전 복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이 가셨던 길도 이렇게 험난한 길이었고, 우리 참아버님이 가셨던 길도 이렇게 험난하고 어려운 길이셨겠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알라고 나에게 이런 길을 걷게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얼마나 기막힌 사연이 많았을까?’ 하는 생각에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지금도 대전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아픈 심정을 많이 체휼한 곳이라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다행히 40일이 지나니 노동희 선생의 친구가 집을 비워 주었습니다. 그뒤 매일같이 대학교 정문 앞에 서서 학생들을 기다리다가 한 사람을 만나서 원리강의를 해 주었습니다. 그 사람이 또 다른 대학생을 데리고 와서 강의를 듣는데, 어느 날은 여덟 시간을 한자리에 앉아서 강의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에 아버님께 올린 편지가 있어 첨부해 봅니다. 

선생님께 올립니다. 

그간도 뜻 안에서 만수무강하심을 비옵니다. 섭리하심에 큰 영광의 빛이 만천주에 비추이는 그 한날 지상의 만 인류는 다시 새 삶을 받는 기쁨을 마음과 몸에 이루어 놓을 것입니다. 
잊혀지지 않는 7월, 작년 7월 4일 땅 위에 사탄들이 총동원되어 하늘의 역사를 막고자 침입한 그날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이 시켜 맡겨 놓으신 이 하늘의 역사를 누가 파탄시킬 수 있사오리까?
말씀하시고 경륜하셨으니 완전히 승리하실 줄 믿습니다. 지금은 영국에서 온 여호수아 씨와 함께 전 식구가 즐길 것을 생각하고 저도 기뻐하고 있습니다. 
대전에서 말씀을 듣고 식구 될 분이 10여 명 있습니다. 장소 문제로 정식 집회는 못 하고 있습니다. 7월 10일까지 집을 비우겠다고 하였는데 또 모르겠습니다. 소문들이 퍼져 벌써 통일교회에서 대전에 교회를 세운다고 기성교회에서 떠드는 모양입니다. 앞으로 재미있는 결과들이 보여질 것으로 믿고 맡기고 매일 나가서 말씀을 전하며, 저녁에는 찾아오는 분들에게 강의하고 있습니다. 새 말씀이 나타나는 곳마다 기쁨이요 소망이요 능력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기성교인들은 예수님을 새로 고쳐 믿어야겠다고 실토하는 이도 있습니다. 
내일은 전 식구들이 모여서 7월 4일 입감하셨던 날을 기념하고 새 출발에 박차를 가하며 새로운 용기로 땅 위에 나타나신 재림주님을 증거하는 참된 모습을 전 세계에 보여 주는 날이 되어 주기를 기도하옵니다. 
지금 저는 혼자 외로운 입장에 처해 있기에 아버님께서 매일 나타나서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시며 동행·동사·동역하고 계십니다. 뜻과 사랑이 함께하심을 감사드립니다. 

1956년 7월 3일, 대전에서 강현실 드림

1957년 7월 20일, 제1차 공식 40일 개척전도 기간에 전남 광주로 가게 되었습니다. 박민숙 씨와 함께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강칠 권사가 광주를 자신의 친정이라고 하면서 광주복귀를 위해 방 얻을 돈을 헌금했습니다. 그것을 씨로 해서 방을 얻고, 새로운 심정으로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기뻐했으며, 어렵지만 조금씩 결실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광주에서도 이사를 여러 번 했습니다. 어떤 때는 전셋돈도 다 떼여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너무 놀라서 기절을 해 병원에 실려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광주에서 학생들이 많이 전도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한 남학생이 말씀을 듣고, 처음에는 이 길을 가겠다고 했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공부도 해야 하고 바빠서 공적인 길은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마음이 아팠습니다. 권면하고 또 정성을 드리고 해서 다시 결심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 후 그는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많이 썼고 축복도 받았습니다. 그 학생을 인도하고 양육하며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키우고 이끌어 오시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 정말 어렵구나. 6천 년 복귀섭리의 역사를 해 오신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을 것인가? 그리고 육신을 쓰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나타나신 아버님은 얼마나 큰 어려움을 감당하셨을 것인가?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신 선생님을 본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광주를 개척했습니다. 광주에서 오래 있으면서 목포까지 가서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전라남도를 순회하면서 순천에 갔던 일이 기억납니다. 순천은 교육도시인데다 물이 깨끗하고 좋아서 인상 깊었습니다. 손발을 씻고 앉아서 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전부 미인이었습니다. 잘생긴 얼굴에 피부는 뽀얀데 복숭아꽃이 핀 것처럼 볼이 붉어서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여긴 물이 좋아서 사람들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보다 잘생겼나보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아버님께 “순천은 물이 좋아서 그런지 사람들이 다 잘생기고 미남미녀가 많았습니다.” 하고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아버님께서는 “뭐 물이 좋아서 그래? 강현실의 심정이 최고도에 달해서 다 미녀로 보이고 미남으로 보였지. 심정이 좋으면 보는 것마다 아름다워 보이는 거야.”라고 하셨습니다. 

파고다공원에서 
원리를 전하다
다음해인 1959년 7월부터 7년 동안 탑골공원에서 노방전도를 했습니다. 그때는 이름이 파고다공원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나에게 “파고다공원에서 정식으로 강의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전도를 시작했는데, 재미있는 일이 많았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많은 기대를 가지고 매일 보고를 받으셨습니다. 매일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하시면서 나를 찾으셨습니다. 식사를 하시다가도 “강현실이 어디 갔나?” 하고 찾으실 때도 있었습니다. 진지를 드시다가도 숟가락에 밥을 뜬 채로 내 보고가 끝날 때까지 입을 벌리고 듣기도 하셨습니다. ‘진지를 드시면서 들으셔도 좋을텐데….’ 하고 생각한 적도 있을 정도로 관심을 많이 가지셨습니다. 
처음으로 강의를 시작할 때는 한여름이었습니다. 당시에 탑골공원은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던 유명한 곳이어서 강의를 시작하면 어느 때는 천 명도 넘는 인파가 모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이 시대를 향하여 하시려는 말씀을 대신 전한다는 심정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의 앞에서 강의를 하니 지방순회를 다닐 때 나를 알아보고 와서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노상에 칠판을 걸어 놓고 먼저 제목을 씁니다. 예를 들어 ‘타락론’이라고 쓰면, 남자들이 “그 여자, 글씨를 참 잘 쓰는구나.”하고 말을 합니다. 난 사실 글씨를 잘 못 씁니다. 글씨를 잘 못 쓰는데 그렇게 말하니 신기해서 아버님께 보고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님께서 웃으시며 “강현실은 글씨를 미친 사람이 춤추듯 쓰는데 뭘 그걸 잘 썼다고 해? 그게 자기 마음이 아닐 거야.” 하셨습니다. 
전도를 위해 탑골공원 근처에 강의실을 하나 얻어 두고 매일 오전에 공원 안에서 강의를 한 번 하고, 그 강의를 들은 사람들을 모아서 강의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강의를 더 깊이 듣고 싶은 분들은 저를 따라오십시오.” 하면 사오십 명의 사람들이 따라왔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키가 작은 여자의 뒤를 따라서 사람들이 단체로 걸어가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강의실에서 매일 낮 12시에 강의를 하고, 오후에 다시 한 번 탑골공원에서 강의를 한 뒤 5시경에 강의를 한 번 더 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강의를 들으면 신이 나서 강의를 했는데, 내 마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는 흑판에 필기가 잘 안 보여서 괘도를 걸어 놓고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전도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반대도 많았습니다. 우선 경찰에서 허가를 받고 하는 강의가 아니다 보니 초기에는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어 하룻밤 경찰서에 있다가 나온 적도 있습니다. 경찰들이 내용을 들어 본 뒤로는 다행히 묵인을 해 주었습니다.
간혹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흑판을 떼서 발로 밟는 사람부터 흑판의 지우개를 던지는 사람까지 난장판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고무신으로 뺨을 때리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같이 있던 권사들이 한마음이 되어서 싸웠습니다. 
날씨도 문제였습니다. 비가 오는 날은 그래도 나은데, 눈이 오는 날은 춥고 눈이 쌓여 있어서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님, 오늘은 눈이 오기 때문에 안 나가고 쉬어야 되겠습니다.” 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눈이 많이 와서 사람이 없습니다. 눈 오는 날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이 없어도 강의를 해야 돼.”
“아무도 없는데 혼자 강의를 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나를 미친 사람인 줄 알 겁니다.”
“그래도 해야지! 지금 파고다공원은 하나님과 사탄이 판가리싸움을 하는 곳이야. 그렇기 때문에 정 사람이 없으면 기도라도 하고 돌아와야지 거기를 그냥 비워두면 안된다.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과 싸움할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지 않았느냐? 그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중심은 서울이요, 서울의 중심은 종로요, 그 중심은 파고다공원이다. 그래서 파고다공원에서 지금 하나님과 사탄이 대결하고 있다. 그런데 파고다공원에서 하루라도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사탄이 얼마나 까불고 좋아하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없어도 거기에서 기도하고 강의하는 그 심정을 가지고 파고다공원을 한 바퀴 돌고라도 오라.”고 하셨습니다. 
하루는 목소리가 잠겨서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이크도 없이 실외에서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늘 목이 쉬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람이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더 신이 나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목이 더 쉬어서 목소리가 아예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 “선생님, 보시다시피 목이 쉬어서 소리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3일간만 쉬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아버님께서는 “말이 안 나오면 저 팔각정 위에 올라서서 손짓, 발짓, 몸짓이라도 하고 서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제가 파고다공원 팔각정 위에 서서 그렇게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강현실이 정말로 저들을 말씀으로 살려 주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마음, 그렇게 생명을 구원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에 미쳐 있으면 손짓 발짓 몸짓을 보고도 식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설령 식구가 될 이가 없다고 해도 뿌려 놓은 말씀은 우주 공간에 남아 있다가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열매를 맺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탑골공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정석온 할머니와 김희옥 권사하고 같이 정성을 많이 들였습니다. 그런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내가 탑골공원에서 강의를 오래 했다는 것만 알겠지만 그런 정성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매일 아침 일찍 빗자루로 공원을 쓰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에서 하나님이 승리하실 수 있도록 기도와 정성을 들였습니다. 
특히 탑골공원에서 강의하는 동안 사적인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강의를 하기 전에 필요한 것을 사느라 어디 들렀다 가면, 그 날은 강의가 실패로 끝났습니다. 누구를 잠시 만나고 가도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항상 하던 강의도 생각이 나지 않고 앞이 캄캄해지기도 했습니다. 사람들도 잘 모이지 않았고, 강의실로 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습니다. 정성을 얼마나 들이고 흑판 앞에 서는가에 따라서 강의가 잘 되고, 반응도 달라졌습니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가 너무나 민감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가 컴퓨터보다 더 세밀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후 나는 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무엇을 우선으로 해야 할 것인가를 잘 선택해야 된다고 여러 번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때 “강의를 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강의를 하는 마음자세가 잘못되면, 하나님이 받지 못하시고 사탄이 받게 된다. 그걸 조심해야 된다.”고 누차 강조해 주셨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강의실에서 저녁 강의를 하던 강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들 열과 성을 다해 강의를 했기 때문에 강의가 끝나면 힘들어 했습니다. 하루는 강의를 끝내고 돌아오는 전차 안에서 어떤 강사가 “강 선생, 오늘은 춥고 배고프고 피곤하네요.”라고 말했습니다. 몸도 약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아버님께 말씀을 드린 적도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보고를 들으시자마자 “그래? 몸이 아프면 안되지!” 하시면서 금일봉을 주시며 “내일 이걸 갖다 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아버님께서 약 지어 먹으라고 주셨다면서 그 돈을 전해 준 적도 있습니다. 
탑골공원에서 강의하던 7년 동안 전도활동과 부흥단 활동 등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나는 탑골공원 강의만 7년간 쉬지 않고 했습니다. 나는 아버님께서 늘 한 생명이라도 구해서 하늘 편에 세우려고 노력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람을 찾고, 생명을 살리고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전력투구해 나가시던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강의 중간에 시간이 좀 나면 통화당에 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통화당은 김관선 장로의 약국이었는데 종로2가에 위치해 있어서 탑골공원으로부터 가까웠습니다. 거기에 아버님의 기도실이 준비되어 있어서 그곳에서 강의를 준비하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옛날 베드로에게 주셨던 갑절의 은사를 네게 주마.”라는 큰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은사를 받기에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는 저보다 훌륭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그런 은사를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세 번이나 그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계속 “못 합니다. 나는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녁에 아버님께 보고를 드렸더니 굉장히 노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루에 3천 명을 회개시키고 구원했는데, 그 갑절이면 6천 명을 회개시키고 구원할 수 있는 은사다. 그런 은사를 준다는데 바보처럼 안 받겠다고 했느냐? 그렇게 주신 은사를 거역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시면서 나무라셨습니다. 나는 자격도 없고 그런 은사를 받을 입장도 아니었기 때문에 못 하겠다고 한 것이지만,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반성한 적도 있습니다. 

1966년에는 공원 강의를 끝내고 경상남도로 내려가서 승공강연을 열심히 했습니다. 부산에서는 주로 대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정성을 다하여 승공강연을 해서 표창장을 받았습니다. 마산에서도 승공강연을 한 공로로 표창장을 두 번 받았습니다. 면과 촌을 돌면서 승공강연을 했고, 학교 선생님들도 교육했습니다. 
그리고 1967년 마산지역장으로 2년 동안 활동했습니다. 마산에 있을 때 사업적인 면에서도 큰 공로를 세워 표창을 받기도 했고, 1969년에는 방 2개짜리 집을 얻어서 부산진교회를 개척했습니다. 
1971년에는 전국 특별순회사로 명을 받고 경기도를 중심으로 순회했습니다. 경기도 지역은 넓어서 전체를 다니려면 한 달이 걸렸습니다. 하루씩 가서 1박을 하며 신앙지도를 하고 다녔더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가는 곳마다 활동하고 있던 부인들을 격려하고 상담하는 것이 주된 나의 일이었습니다. 







제 3 부 
초교파의 최전선에서




종교 화합의 길, 초교파





죽어도 통일교 귀신
나는 1952년 아버님을 뵙고 60년 넘게 공적인 생활을 해 왔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공적인 생활을 참으로 오래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공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목회자나 공직자 혹은 헌신자들을 보면 가슴이 뭉클할 때가 많습니다. 그 분들을 보면 늘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헌신을 하면서 살아왔던 이 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외로운가를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모를 뒤로 하고, 형제를 뒤로 하고, 친구와 고향을 떠나 헌신하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들의 부모는 바람결에 어느 누구의 발자국 소리라도 들려오면 집 나간 아들이나 딸이 돌아오는 것으로 알고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여전히 통일교에 다니는 자식을 반대하지만, 속으로는 언제나 자식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부모를 두고 있을 것입니다. 나도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평범하고 나약한 사람이라서 사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아버님께서 공적인 길을 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셔서 지금까지 이 길을 올 수 있었습니다. 나처럼 통일가의 식구들은 모두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살기 위해, 형식적으로, 의식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아니리라 믿습니다. 제도에 얽매여 이 길을 마지못해 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 또한 지난 세월동안 한순간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공적인 생활을 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입교한 지 13년이 되었을 때 아버님께서는 “강현실, 이제 3년만 하고 좀 쉬어야지?” 하셨습니다. 그때 나는 탑골공원에서 혼신을 다해 강의를 하고 있던 중이라 그 말씀이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3년 뒤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4년이 다 되어 가도 아버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없었습니다. 
“아버님, 그때 저에게 3년만 더 하면 쉬게 해 주신다고 하셨는데 4년이 다 되어 갑니다.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님께서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일감이 없는 사람이야. 할 일이 많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복된 것인지 알아야 한다. 한번 놀아 봐라. 가만히 집안에 들어앉아 있어 보면 얼마나 따분하고 답답하고 의욕도 안 생기고 불쌍한지 모를 것이다. 그러니 공적으로 일할 수 있는 한 일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아버님!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할 수 있는 기력이 있는 한 뜻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버님은 “그럼 그래야지, 그래야 강현실이지!” 하고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뜻 안에 들어와서 살아온 나의 삶을 생각할 때 ‘나는 귀신이 되어도 통일교 귀신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닫힌 마음을 여는 
초교파의 길
1974년 10월 7일부터 초교파기독교협회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재석 회장 밑에서 일을 했습니다. 이재석 회장은 충청도 양반 집안의 후손답게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분입니다. 그때는 내가 입교한 지 22년째가 되던 해였습니다. 22년 동안 선포와 개척 그리고 전도의 사명을 하고, 그때부터 1996년 6월까지 22년 동안 초교파기독교협회에서 일했습니다. 
사실 기성교회와 통일교가 하나 된다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아버님께서는 통일교와 기성교회를 하나로 만드는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기성교인은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즉 목사에서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통일교를 반대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통일교라고 하면 나병환자들보다 더 무서워하면서 깜짝깜짝 놀랐습니다. 통일교인을 만나서 이야기만 해도 지옥에 갈 것같이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한마음이 되어 반대하던 것을 보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움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같이 그런 마음을 가지는 데는 뭔가 비밀이 숨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초교파운동을 하면서 많은 목사들을 만났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총회장부터 노회장과 총무까지 다 만났습니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통일교라고 하면 아예 만나 주지를 않기 때문에 만나기 전까지는 통일교라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차츰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통일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 차도 마시지 않고 쏜살같이 가 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반응도 사람마다 가지각색으로 다양합니다. 그냥 말없이 자리를 피하는 사람도 있고, 욕을 하는 사람도 있고, 물을 끼얹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냥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앉아 있습니다. 상대가 욕을 하든 물을 퍼붓든 상관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대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진리의 본체였지만 가장 믿음이 깊다던 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교법사들로부터 몰림을 당하고 이단의 괴수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를 생각하면, 내가 받는 모욕과 비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번은 나에게 욕을 막 하던 사람이 내가 그저 웃고 있으니 “아, 당신은 참으로 신앙을 하는 분입니다. 나는 아직도 혈기가 남아 있어서 이렇게 당신을 참지 못하고 증오하고 있습니다. 나는 목사이지만 가짜입니다.”라고 굴복한 일도 있었습니다.  

초교파운동을 하면서 통일교인이라는 간판 때문에 좋은 말씀을 해 놓고도 마지막에는 불신을 받거나 무시를 당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나는 기독교인들을 설득하기도 하고, 설교도 하고, 어떤 때는 진심으로 울면서 하나님께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고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드렸습니다. 
한 번은 “내 손으로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통일교를 없애고 말겠다.”고 큰 소리로 악을 쓰면서 달려들던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목사였지만 형식이나 의식 혹은 제도에 매여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목사였지만,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하나님의 심정과 뜻 그리고 사정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 목사를 보면 얼마나 가슴 아프실 일이었겠습니까? 나는 너무 통분하여 엉엉 울고 싶었습니다. 
그런 간절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적인 방향이 어떻게, 또 어디를 향해서 움직이고 있는지 목사님은 모릅니다.”라고 하며 원리공청회에 참석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랬더니 의외로 그는 미안해 하면서 “그러면 좀 알아보겠습니다.”라며 원리공청회에 참석했습니다. 
2박 3일 동안 말씀을 듣고 난 그의 반응은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통일교는 놀라운 교회이며, 신학교에서 말하지 못한 조직신학의 깊은 면을 갖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원리말씀에 머리가 숙여집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 간담회의 시간에 그는 “통일교는 앞으로 절대 망하지 않으며 쇠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놀라운 말씀이 체계화되어 있기 때문에 길이길이 남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목사 한 사람이었지만 통일교에 대해 절대적인 입장에서 원리말씀 앞에 굴복하던 것이 나에게는 꿈인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결국 원리말씀 앞에 세계의 많은 목사들이 머리를 숙이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새로운 희망으로 마음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결국 뜻이 성취될 것이라는 기쁨도 생겼습니다. 

초교파연합운동을 하면서 보람을 많이 느꼈습니다. 처음으로 목사를 만나기 전에는 통일교 교인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밝히면 만남 자체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나서 대화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아버님의 삶과 신앙 그리고 원리 내용을 소개하면, 차츰 듣는 사람의 얼굴색이 달라졌습니다. 말씀을 시작해서 10분 20분,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문이 열리면 자연스럽게 수긍이 가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한 번은 꼭 만나서 말씀을 전해야 되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장로교 총회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다른 목사들의 존경을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 “오늘 제가 예배를 드리러 가려고 하는데 교회 약도를 좀 알려 주십시오.”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친절하게 교회의 위치를 설명해 주면서 “꼭 예배드리러 오세요.” 하고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당연히 교회의 위치는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다음의 만남을 위해 그렇게 전화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러 가서 인사를 했더니 “나와 점심식사를 같이 합시다.” 하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김영운 선생과도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하면서 그 목사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총무 목사도 나와 대화를 한 후에 상당히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이고, 강 선생! 그만 장로교로 돌아오세요. 장로교에 강 선생 같은 이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제 돌아오세요.” 하고 진지하게 말해서 웃은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는 여영수 부장이 초교파협회에 와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 강의를 녹음해서 많은 이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습니다. 

1983년 초부터 나는 매주 화, 목, 토요일 3회 기성교회 교인들을 상대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때 설교한 원고가 지금도 몇 박스 집에 있습니다. 녹음한 테이프도 많지만 오래되어 못 쓰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그 설교들을 모아서 설교집을 내라고 권하기도 했지만, 참생명의 말씀인 아버님의 말씀이 있는데 부족한 나의 설교를 모아서 설교집을 낼 필요가 없을 듯해서 모아 두기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기독교인을 위한 성경강해’라는 명목으로 시작했지만 2년쯤 시간이 지나면서 무슨 말씀을 전하더라도 받아들일 정도로 참석자들과 교감이 이뤄졌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아버님께서 우리들을 앞에 놓고 피와 땀과 눈물을 쏟으시며 말씀하셨던 그 모습을 떠올리며 정성을 다하고 열심을 다하여 설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마음으로 감동을 많이 받고 기뻐했습니다. 
어떤 목사의 사모는 “강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 정말로 은혜가 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뜨거움이 느껴집니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권사는 “원리말씀 자체에 생명력이 있어서 강 선생님의 말씀에 더욱 큰 은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원리말씀은 보통 사람이 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입은 분이 기록한 것 같습니다.”라고 증거하기도 했습니다. 
말씀에 감동 받은 사람들은 초교파정신을 기성교회의 중진들에게 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열심을 다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볼 때, 이제는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들로부터 너무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여러 벌의 옷도 선물 받고, 집으로 선물을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님께 보고를 드리면서 “이 모든 영광과 감사는 아버님이 받으셔야 될 영광입니다.”라고 하면서 머리를 숙였습니다. 
기성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강 회장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체가 되어 계시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나는 신학자도 아니고 기독교 전문가도 아니어서 말씀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야 됐습니다. 말씀의 내용 준비도 많이 했지만, 그보다 말씀을 위해 기도와 정성을 들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참석자가 기성교인이나 영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내가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을 먹거나 준비가 미흡하면 통일교가 욕을 먹고, 그 영향이 아버님께 미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나를 통해서 아버님을 느끼게 된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것에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받은 
월급봉투에 울다
초교파기독교협회에 있었을 때의 몇 가지 일화가 기억납니다. 초교파기독교협회에서 한 달을 일하고 나니 사무실에서 월급봉투를 주었습니다. 봉투를 열어 보니 한 달의 월급이 15,000원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월급을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22년 동안 돈 한 푼을 안 받고 살았던 것입니다. 탑골공원에서 강의할 때는 청파동교회에 살면서 한 달치의 전차 회수권과 목욕표 4장을 받았습니다. 그게 받은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살아도 계절별로 입을 때는 입고, 또 먹을 때는 먹고 살았습니다. 물론 잘 먹고 잘 입은 것은 아니지만 생활에 불편함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월급을 받은 것입니다. 그 월급을 받으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내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고 헌신하며 살아왔는데, 이 돈을 받게 되면 이제부터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월급쟁이가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받으면, 내가 일한 대가를 돈으로 받게 되는 것이니 내가 일한 공은 다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하고 삯을 위해 일하는 생활을 하는 것같이 생각되었습니다. 
22년 동안 헌신하다가 월급을 받으니 아버님께서 보호해 주시던 생활이 끝나고 쫓겨나는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한없이 서러운 마음이 들어 기도실에 들어가 통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조금 진정이 된 후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사도 바울의 성경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일한 사람이 보수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굶으면서는 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보수는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구절이 떠올라 ‘아, 그렇구나! 그동안은 내가 교회에서 살면서 공적으로 신세를 지고 살았으니 이제는 공적으로 신세지지 않고 살아야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부터 교회로부터 나와서 살았습니다. 
사실 그 급여는 내 직책에 비해 적은 액수였습니다. 초교파협회에서 나는 부녀국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장보다 급여가 적었습니다. 그래서 강 부장이라는 분이 농담으로 항상 나에게 ‘강 과장, 강 과장’ 하고 놀렸습니다. 자기보다 급여가 작으니 국장이 아니라 부장 밑에 일하는 과장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나야 급여에 관심이 없으니 얼마나 급여의 차이가 나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루는 강 부장에게 “공적으로 헌신할 때 급여를 많이 받는 것이 좋은 게 아니에요. 나는 사실 이것보다 더 조금 받고 싶어요. 지금 일하고 있는 보수를 다 받아 버리면 영계에 가서 더 이상 받을 것이 없습니다. 지금 일하는 것보다 적게 받아야 영계에 갔을 때 받을 것이 있어요. 그래서 공적인 생활을 할 때는 급여를 안 받는 것이 제일 좋고, 피치 못할 생활의 문제가 있으니 최소한으로 받는 것이 좋은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강 부장이 “국장님은 언제나 하나님 같은 말씀만 하시네요.”해서 같이 웃은 적이 있습니다. 

집을 사 주신 아버님 
1976년 어느 날 아버님께서 찾으셔서 갔더니 어머님께 “통장과 도장을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님께서 통장을 가지고 오시니까 나에게 통장과 도장을 주시면서 “이거 어머님이 성혼식 이후 지금까지 조금씩 저금하신 돈이다. 이 돈을 찾아서 집을 한 채 사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갑작스러운 일이라 놀라기도 했지만, 어머님께서 예금하신 통장을 주시는 것이 송구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아버님, 제가 어떻게 이 통장에 손을 댈 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그 돈으로 어떻게 집을 사겠습니까? 제가 이것만은 못 합니다.” 하고 사양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님께서는 “그 집에서 더 열심히 일하면 되잖아?” 하시면서 계속 나에게 그 돈으로 집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계속 말씀을 듣지 않고 사양하니 아버님께서는 재단 사무총장을 찾으셨습니다. “강현실이 내 말을 안 들으니 네가 이 통장을 가지고 가서 집 한 채를 사 줘라.” 하셨습니다. 이수경 사무총장도 “아버님, 어떻게 그 통장으로 집을 사겠습니까? 우리 재단에서 돈을 대겠습니다.” 하면서 그 통장을 어머님께 돌려 드렸습니다. 
재단에서는 이촌동에 방이 3개 있던 아파트 한 채를 사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계약을 하기 전날 밤 나는 머리가 아프고 걱정이 되어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계시는 아버님께 편지를 드렸습니다. 
“아버님, 저는 이 집값을 받고 나서 마음이 지옥입니다. 마음이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집을 사야 되는지, 안 사야 되는지 고민이 많습니다. 제가 지난 세월 동안 헌신했던 것이 이 집 하나 받음으로 다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제가 헌신했던 것이 모두 없어지는 것 같아 허탈하기만 합니다. 공적으로 일했던 공로가 모두 먼지처럼 없어지는 것 같아 얼마나 괴로운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썼습니다.
최원복 선생이 내 편지를 아버님께 읽어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님의 입장은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그 집에서 더 열심히 일하면 되지.” 하셨다고 했습니다. 
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며칠 동안 고민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기도 중에 ‘이 집을 공관으로 쓰면 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이 집을 쓰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집으로 쓰자! 전도를 위한 집으로 이 집을 써야 되겠다.’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그 뒤로 나는 집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6일간의 미국 순회
1980년 6월 27일 금요일 10시 30분 JAL기 편으로 일본에 도착한 후 알래스카를 경유하여 영국에 들렀다가 7월 4일 미국에 도착하여 참부모님께 인사를 올렸는데, 내가 입교했을 때와 똑같이 밤을 새우며 말씀하셨습니다. 보스턴에서 두 달 동안 지냈는데, 아버님께서는 매일 새벽에 바다로 나가서 정성을 들이며 고기를 낚으셨습니다.
당시에 일본을 개척했던 최봉춘(최상익) 선생이 보스톤에 찾아왔습니다. 그는 아버님께 자기의 모든 삶을 보고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는데 같이 있던 다른 아이들은 괜찮았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아들만 사고를 당하는 것을 보고 그동안 살아온 삶이 잘못되었다고 반성하고 아버님께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최 선생은 아버님 앞에서 머리를 숙이며 회개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그동안의 삶을 회개하면서 무엇을 잘못했고 어떻게 잘못 살았는가를 고백했습니다. 최 선생은 아버님의 신발을 닦으며 제일 밑창에서 다시 출발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아버님께 최 선생이 찾아온 사실을 보고드렸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 보고를 들으시고 내가 기뻐했던 것보다 더 기뻐하시면서 “사실이야?” 하고 몇 번이나 물어 보셨습니다. 나도 기뻐서 “예, 사실입니다.” 하고 대답을 드린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최 선생에 관한 보고를 드릴 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것과 똑같은 아버님의 표정을 보았습니다. 그 표정을 보면서 아버님께서 얼마나 최 선교사를 사랑하시는가를 느낄 수 있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루는 아버님께서 그물을 만지시며 “이번에 온 김에 미국 여행도 하고 세계 여행을 하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하루에도 굶어 죽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선가루(피시 파우더)를 개발하고 있는데, 누구도 여기에 관심을 가지는 이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쓸쓸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 위에 누군가 인류의 내적인 심령 문제와 외적인 기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현실이 너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고기잡이가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살려야 할 목적이 있어서 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세계를 한 바퀴 돌아봐야 견문도 넓어지고, 세계가 얼마나 크고 아름다우며 인류의 기쁨과 아픔이 얼마나 깊은지 느끼게 될 거야.”라고 말씀하시는데, 아버지가 딸에게 무언가 중요한 것을 알려 주시려는 듯 간절한 심정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간간이 어머님과 쇼핑을 하기도 했습니다. 참어머님께서 6세가 되시던 해에 계시를 받은 사람이 어머님에 대해서 “장차 인류의 어머니, 하늘의 신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예언처럼 미국에서 어머님과 가까이 있는 동안 어머님께서는 세계의 어머니이자 천주의 어머니이심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 9월 3일부터 28일까지 26일간 미국 일주 관광을 하고 순회도 했습니다. 일행은 이정옥 선생, 이경준 선생 등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여행 스케줄을 직접 짜 주셨는데 정성을 많이 쏟으셨습니다. 미국 여행을 할 때에는 모든 것을 빼놓지 않고 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버님의 말씀처럼 미국이라는 나라는 가도 가도 끝이 없이 넓었습니다. 하루에 3천 리를 달리기도 했습니다. 얕은 산이 나오면, 수십 시간을 달려도 똑같이 아름다운 얕은 산인 데 감탄했습니다. 제일 인상에 남은 것은 유타주에서 방문한 몰몬교입니다. 예수님의 사진이 벽 한 면을 다 덮을 만큼 크게 걸려 있었는데, 많은 여행객들이 미국에 오면 유타주 몰몬교 본당을 관광하고 가는 것이 기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서 많은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귀한 은사로 
세계순회를 하다
1980년에는 참부모님의 귀한 은사로 세계를 순회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온 지 3개월 뒤 참부모님께서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 유럽 아시아를 돌아거쳐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1980년 10월 5일 유럽으로 향했습니다. 유럽에 도착하여 아시아까지 순회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11월 30일이었습니다. 약 2개월 동안 순회를 하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참부모님께서 1960년 세계 순회를 하실 때만 해도 식구가 한 명도 없었던 나라가 많았는데, 20년 만에 전 세계의 어디를 방문해도 식구가 있으니 그동안 얼마나 참부모님께서 수고하셨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여행의 하루 일정은 아무리 늦은 밤에 잠들더라도 다음날 새벽 6시, 늦어도 7시에 기도회로 시작됐습니다. 가는 곳마다 식구들이 너무나 크게 환대를 해 주어서 송구할 때가 많았으며, 무엇으로 보답해야 될 것인가를 알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짐으로 남을 때가 많았습니다. 다행히 참부모님의 심정과 생애에 대한 말씀을 해 주면 진심으로 은혜를 받고 감사했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습니다. 전 세계 식구들에게 받은 사랑에 빚지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한 번 더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순회한 곳 중에서 이스라엘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11월 5일, 바울이 전도했던 역사가 담겨 있는 고린도시에 도착했을 때는 그들이 쓰던 공동목욕탕과 화장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전도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절을 하며 섬기던 습관이 있어서 돌을 깎아 세워 두고 그것에 절을 하곤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리석으로 쌓아 올린 신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터전만 남아 있으며, 사람들이 살지는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시 역시 지진으로 터전만 남아 있고, 사람은 살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출발한 것은 다음 날인 11월 6일 저녁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옛날에 예수님이 이곳을 중심하고 유대민족에게 복음을 증거하며 설교했던 곳이라고 생각하니 감회가 참으로 깊었습니다. 그날은 밤늦도록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이튿날인 11월 7일 아침에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나사렛교회였습니다. 교회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자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막달라 마리아가 너무나 서러워했다는 성경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이 교회는 아랍인이 주관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다음에 나사로의 무덤에 가 보았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은 잘 꾸며져 있었으며, 많은 방문객들이 왔다 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성으로 갔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성 함락을 위해 일곱 번씩이나 성을 돈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곳에서 40일간 예수님이 금식하고 3대 시험을 받으신 곳도 가 보았습니다. 산이 메말라 있었으며, 풀이 한 포기도 없었습니다. 2천 년 전 이곳에서 많은 비소와 조롱을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니 불쌍한 생각이 더 들었으며, 영계에서 협조해 주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사렛으로 가는 도중에 요단강을 보았는데 너무 작아서 개울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식구 할아버지를 만나서 집단농장을 안내 받을 수 있었습니다. 1922년 집단농장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무 한 그루도 없는 황폐한 땅이었지만, 그동안 가꾼 결과로 지금은 많은 나무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화단과 병원, 수영장, 놀이터, 회의장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서 사는 사람은 식사와 의류, 병원비, 여행비까지 보장되어 돈이 필요 없는 낙원에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마을의 주민은 천여 명이었으며, 매일 집단농장에서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집단농장의 탁아소와 극장 그리고 박물관을 구경했으며, 이스라엘의 전통과 생활을 담은 마을의 그림들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산상설교를 한 곳으로 가 보았습니다. 지금은 이탈리아에서 주관하고 있는 천주교회가 세워져 있었으며 갈릴리 해변의 언덕에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써 오천 명을 먹였던 곳에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 도시가 모자이크로 되어 있었습니다. 갈릴리 해변에 가서 예수님이 고기를 잡았던 곳도 가 보았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가 보고 싶었는데, 이제는 다시 가기가 힘들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그때의 순회 중에 오랜만에 만나게 된 식구들도 있었습니다. 세계의 곳곳에서 선교를 하는 식구들을 만나면 밤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런 날은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잘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한국을 그리워하고 참부모님의 소식과 심정을 전해 듣고 싶어하는 식구들이 있기에 마음 한편으로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아버님께서 
큰 축복을 해주시다
초교파기독교협의회에서 일하고 있을 때 아버님께서 나에게 큰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어느 날 아버님께서 찾는다고 하셔서 한남동으로 갔습니다. 내가 도착하니 아버님께서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진지를 드시는 중에 인사를 드리니 “강현실, 이리 좀 오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아버님 앞으로 갔더니 “이제부터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고, 말한 대로 되고, 마음먹은 대로 될 것이고, 생각한 대로 되고, 행한 대로 다 성취될 것이다.”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나는 감사의 경배도 제대로 못 올리고 나왔습니다. 나오면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고 옆에 있던 777가정 어느 부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부인이 “아이고, 순회사님! 그건 보통 은혜가 아닙니다. 이제는 그렇게 다 순회사님이 마음먹는 대로 될 것입니다.” 하고 부러워했습니다. 그날 참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저녁에 초교파 회원이며 장로교인 모 집사가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그 전화를 받는데, 음성이 좀 이상했습니다. “강 국장님, 저를 좀 만나 주세요. 내일 꼭 만나야 돼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일은 시간이 없는데요.” 하니, “안됩니다. 내일 꼭 저를 좀 만나 주셔야 됩니다.” 하며 매달렸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정을 조정해서 다음 날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무슨 일로 나를 그렇게 찾을까?’ 하는 생각으로 약속을 했지만, 썩 마음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전화를 한 그 집사는 초교파 모임에 나오면서도 항상 가시같이 불신하는 태도로 “통일교가 어때요? 문 선생님이 정말로 그렇게 좋은 분이세요?” 하는 식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내가 그 사람을 보면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약속장소에 나가니 그 집사의 얼굴이 완전히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입이 돌아가서 인상이 달랐습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했더니, “모르겠어요. 그저께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 물을 마시려고 하니 물이 쭉 흘러 내리더라고요. 그래서 ‘이상하다. 왜 물이 이렇게 흐르나?’ 하고 거울을 보니 입이 이렇게 삐뚤어졌지 뭡니까? 그래서 어제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병원도 가 보았는데 효과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걱정이 되어 어제 저녁에 기도를 해 보았더니 강 국장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제가 잘못했으니 국장님, 저를 좀 살려주십시오.” 하고 매달렸습니다. 
평소에 아버님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일이 생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불쌍하지 않습니까? 앞으로 초교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하니 이 사람의 입을 바로 만들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해 주고 헤어졌는데, 이틀 뒤 전화가 왔습니다. “강 국장님, 입이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전화를 받으니 내 마음이 참 기뻤습니다. 그때부터 ‘내가 믿는 대로, 말한 대로,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더욱 굳게 믿게 되었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참회의 기도
1984년 6월 6일, 사무실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날은 아버님께서 미국에서 탈세혐의로 재판을 받으신 날입니다. 아버님을 생각하면서 ‘이제는 하나님께 이 일을 맡기고 간절한 기도로 부탁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님을 좀 돌봐 주셔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고 뜻 안에서 좋은 길을 열어 주십시오.” 하는 내용으로 새벽부터 저녁까지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마치고 보니 밤 10시였습니다. 
그날 나는 3천 번 하나님께 아버님을 돌보아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 3천 번 속에는 간절함과 애통함 그리고 안타까움이 기가 막히게 담겨 있었습니다. 나는 다른 생각을 하나도 하지 않고 미친 사람처럼 “하나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하고 애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하나님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거역하였도다.”라며 탄식하셨습니다. 아버님께서 많은 날 동안 귀한 말씀을 전하셨지만 미처 깨닫지 못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식구들이 회개하지 않으니 아버님께서 몸소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형극의 길을 가시게 되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댄버리 고난을 통해서 나는 통일교 식구들이 지은 죄가 하늘에 사무칠 정도로 크다는 걸 느꼈습니다. ‘나의 잘못으로 아버님께서 옥중의 탕감 길을 가시다니…. 용서해주십시오!’ 하는 기도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기도시간마다 뜨거운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내용을 다 알려 주셨지만 인간이 책임분담을 다 하지 못해서 다시 오신 주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우리들이 대역죄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버님의 심정을 위로해 드리고, 아버님께서 승리하실 수 있도록 정성을 모으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께서 재판을 받으시고 댄버리에 수감되셨을 때, 나는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원치 않으시는 곳에서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내실까?’ 하는 걱정이 되었지만, 나는 멀리서 기도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정성 들이는 일만이 우리들이 해야 할 책임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은 자유가 없는 구속의 생활입니다. 그러나 아버님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그러셨듯이 당신의 입장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과 인류의 장래를 염려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 아버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게 된 것은 전적으로 식구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성이 부족하여 아버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식구들이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재판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잘못한 일들이 너무 많았고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아서 아버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실체로 오신 아버님을 그런 고난에 처하게 했으니 천백 번 죽어도 모자라는 불효를 저지른 것입니다. 용서도, 용납도 받을 수 없는 불효였습니다. 심정적으로, 생활적으로 아버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과 같은 아픔을 드렸습니다. 
나는 남한에서 제일 먼저 뜻 앞에 인도된 사람으로서 깊은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아버님께서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이 고통을 당하시고 기도하셨던가를 생각하니 더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버님께서 댄버리에서 무사히 승리하시고 나오실 때까지 할 수 있는 책임분담을 다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철야기도와 냉수욕 등을 쉬지 않았고, 초교파연합운동도 더 열심히 했습니다. 
1985년 참부모님께 올린 서신과 1987년 초교파운동을 하며 쓴 일기 중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참부모님께 올린 서신 

1985년 새해를 맞이하여 아버님의 딸 현실은 마음과 몸, 정성을 다하여 세배를 드렸습니다. 아버님 성체 만강하옵시며, 하늘부모님의 크신 사랑이 함께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생명을 구원하셔야 하는 크신 책임을 지시고 이들에게 하늘의 사랑을 주입시키기 위하여 60여 성상을 피와 땀과 눈물 그리고 모든 진액을 다 쏟으신 아버님이셨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아버지는 귀한 분이시며, 6천 년 역사의 오고 간 모든 사람의 가치를 합한 가치보다도 더 크시고 더 높으신 가치를 지니고 계심을 절감합니다. 세상은 어두워서 보지 못하며 또 느끼지 못합니다만, 저는 이처럼 크신 아버님을 알고 믿고 모시고 살고 있음이 진실로 꿈과 같은 현실입니다. 
세상이 다 아니라고 해도 저는 수백 퍼센트의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무지한 이들에게 참부모님을 증거하겠습니다. 
아버님, 어느 정도 저희들이 진실로 참회하고 회개해야 할지를 몰라서 그저 가슴이 답답하며 미칠 것만 같습니다. 자녀된 저희들의 잘못으로 아버지가 고생하시며 제물된 자리에서 형극의 길을 가신다고 생각하면 “죽여 주십시오.” 하고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남의 죄가 아니고 내 죄이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놓기 위하여 죽음의 고빗길을 넘고 가시밭길을 헤치면서 걸어오셨습니다. 그렇게 살아오신 아버님의 대신자가 되기 위하여 필사의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겠습니다. 통일 식구들은 그동안 하나님도 불신하고, 부모님도 불신하고 불순종하면서 효도하지 못하고 형제들끼리 서로 불목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마지막 기회를 한 번 더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제는 통일 식구들이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우리 부모님을 전심을 다하여 믿느냐는 것입니다. 식구들 중에는 당대에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못 박아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뜻은 우리가 하기에 따라 이루어지기에 반드시 우리 아버지의 당대에 이루어진다고 설득을 시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지금 저의 마음에는 이미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또 환경과 전체에 뜻을 이루어 놓아야 하겠습니다. 가나안은 믿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강하고 담대하여, 또 신념과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2세들과 함께 가나안에 입성했습니다.
오늘날 통일 식구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이상의 신념과 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저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신앙의 수십 갑절을 달라고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는 그들보다는 더 큰 신앙이 피와 살과 뼈 속에서 솟구쳐 나오고 있습니다.
아버님, 안심하세요. 원하시고 바라셨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을 저는 전심(全心)으로 믿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쫓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며, 전심을 하나님께 향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능력을 베풀어 주시는 것으로 확신합니다. 
아버님, 초교파활동에 많은 기대와 소망을 두시고 계심을 압니다. 너무 위에서 반대를 했기 때문에 한동안 외면하며 두려워했던 기성교회의 목사, 장로, 여신도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초교파운동에 끌려오고 있습니다. 계획하고 목적했던 수에 달하고 있습니다.
영계에서 협조하고 있음을 저는 확신합니다. 집회 때마다 우리의 배후에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심을 저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또 굳게 믿습니다.
금년에는 더욱 크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저희들이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믿는 만큼 또 일을 진심으로 하는 만큼,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저의 소원은 신앙의 종주국인 한국의 교계가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우리 아버님을 오신 주인공으로 믿고 모실 수 있는 그 날을 보는 것입니다. 온 세계 앞에 참부모님의 그 밝은 빛을 비추며 현현하시는 그 날을 이루어 놓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 쏟겠습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함께 일하고 있는 식구들에게 저는 늘 이야기합니다.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마라.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안 되는 결과가 온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안 되는 것이 없으니 꼭 된다는 확신과 자신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자!”고 말합니다. 기독교와 통일교가 하나 안 된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가 힘들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버님, 때는 다가오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있는 성녀회 회원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너무도 기뻐하며, 또 미친 사람들처럼 날뛰고 있습니다. 그들은 통일 식구가 아니고 기성교인들인데도 제가 말씀하는 중에 큰 소리로 ‘아멘, 아멘’ 하며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을 볼 때 ‘이것은 한국 한 모퉁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앞으로 세계가 부모님의 말씀 앞에 굴복되어 들어올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저는 연말에 기성교인들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영광은 제가 받을 것이 아니라 참부모님께서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성교인들의 마음이 돌아가는 것을 볼 때 머지않아 세계의 기독교가 부모님 앞에, 원리말씀 앞에 머리 숙일 것으로 저는 확신합니다. 저 자신이 진실과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또 참부모님을 위한 일심에서 움직이면 하나님이 꼭 찾아오셔서 크게 역사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32년이란 세월 동안 기성교인들로부터 많은 반대의 화살을 받아 왔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화살이 박히어 이제는 더 이상 찔릴 부분도 없습니다. 그들이 아버님을 반대하여 시기하며 질투하고 핍박할 때마다 그것을 내가 대신 받겠으니 그 화살을 내게 돌려 달라는 마음으로 받아 왔습니다.  
저에 대해서 좋지 않게 말할 때는 과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으나 아버님에 대해서 욕을 들을 때는 너무도 속이 상하고 분한 마음도 생겨서 밤잠을 자지 못하고 울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렇지만 곧 저는 마음을 돌려서 고마운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저들이 몰라서 그러하오니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이제는 그 터 위에서 기성교인들의 사랑을 저의 마음과 몸에 지니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정성의 제단을 쌓고 있는 식구들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될 것입니다. 머지않아 그들이 저희들과 함께 정성들이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이 우리 참부모님과 길이길이 함께 해 주시기를 두 손을 모으고 꿇어 엎드려 빌고 있습니다. 참부모님의 만수무강을 빌면서 이만 줄입니다. 

1985년 1월 16일 밤 11시 30분
서울 한모퉁이에서 여식 현실 드림
1987년 7월 21일 화요일의 일기

오늘은 아침 7시 30분 비행기로 부산 범냇골로 향했다. 미국 목사 200여 명과 함께 동행했다. 너무나도 깊은 감회 속에서 오래 전 범냇골에서 지냈던 날들을 회상했다. 
옛날에 아버님께서 홀로 뜻을 이루기 위해 애태우고 눈물지으며 원리원본을 집필하셨던 그때를 생각하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의 아버님 모습과 심정을 30여 분 동안 정성을 다하여 설명해 주었다.
목사들은 눈물의 바위에 올라가서 간절한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기도가 끝난 후 어떤 목사는 평소에 물체를 보기 힘들 정도로 시력이 안 좋아 안경을 썼는데 기도 후 안경을 쓰지 않아도 잘 보인다면서 춤을 추며 기뻐했다. 또 어떤 목사는 다리가 아파서 걷기가 힘들었는데 기도 후에 다리가 가벼워지고 걸어보니 기도 전과 후에 완전히 달라졌다고 하면서 기적이 일어났다고 증거하기도 했다. 
나는 “이들로 하여금 아버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고 갈 수 있도록 영적으로 협조해 주십시오.” 하고 온 정성을 들여 기도하였다. 창원공단을 시찰하고 새마을호로 서울에 도착했다.

1987년, 환갑을 맞다
1987년 환갑을 맞았으나 특별히 환갑잔치를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참부모님께서 특별히 환갑잔치를 열라고 하셔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환갑 축하연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 환갑 축하연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올린 감사의 인사말씀과 축하연이 끝난 뒤 참부모님께 올린 감사의 편지입니다. 

환갑 축하연의 인사말씀

공사다망하신데도 불구하고 부족한 이 사람의 이날을 축하해주기 위하여 재단 이사장님을 비롯하여 기관장님, 기업체장님, 식구님들, 그리고 친지와 친척들에게 먼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특별히 제가 정을 많이 쏟아 왔고, 또 저를 아끼고 사랑해 주셨던 성녀회 회원님들에게 어떻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려야 할 지 몰라서 그저 이렇게 머리 숙여 예를 드리는 것으로도 표현을 다할 길이 없습니다.
이 시간에 저는 60년간 살면서, 그 중에서도 통일교 36년 생활에서 제일 난처하고 고통스러웠던 제 경험담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교회 몇 곳을 개척하면서 이사를 많이 했습니다. 제일 이사를 많이 한 경우에는 하루에 두 번까지 한 적도 있으니 얼마나 많이 이사를 했는지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손수레 하나 쓸 형편이 못 되어 장작을 새끼로 묶어서 머리에 이고 다녔으며, 숯 포대를 이고 다닌 기억이 새롭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도 마찬가지로 전전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하루는 교회의 어른 되시는 분이 그렇게 이사만 다니다가는 전도도 할 수 없으니 변변한 방이라도 구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참으로 기뻤습니다. 이사 안 하고 전도할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1976년 동부 이촌동에 20평짜리 아파트를 계약한 날 저녁에는 좋았던 것보다는 고통이 더 컸습니다. 왜냐하면 25년 동안 일한 공적이 20평짜리 아파트 하나로 탕감이 되어서 다 무너져 없어지고 내게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 후일에 하나님 앞에서 청산할 때, 하나님이 “너는 이미 네가 일한 것을 다 찾아가지 않았느냐?”고 꾸지람을 하시게 될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집은 너 개인의 집이 아니야. 아버지의 집이니 공관으로 써라. 전도하는 데 쓰면 되지 않느냐?” 하시던 말씀으로 해결을 받고, 최원복 선생님께 편지로 그 내용을 보고드린 적이 있습니다. 
1976년 음력설에는 어떤 식구가 이불 한 채를 선물로 가지고 왔습니다. 연초록색인데 솜도 제일 좋은 것이고, 이불 위에는 백 마리의 학으로 수를 놓았는데 기계수가 아닌 손으로 수를 놓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불을 덮으면 백수를 한다고 해서 사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기쁨보다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정성들인 이불을 나는 덮을 자격이 못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진심에 보답할 만한 일을 못 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참으로 괴로웠습니다.
그 이불은 제가 참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닮고, 참부모님을 증거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자격이 되었을 때 덮으려고 아직도 그냥 싸 두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그 두 내외가 찾아와서 “순회사님, 그 이불을 덮고 계세요?” 하기에 웃으면서 “아직은 내가 그 이불을 덮을 마음의 준비가 못 되어 있고 자격이 안 되어 있어요.” 했더니 웃으면서 “그럼 안 덮으시겠어요?” 해서 그 이불이 저를 난처하게 만들고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을 때 그 이불을 덮겠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이 근래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회갑은 60년 만에 돌아오는 날입니다. 우리 식구 중 한 사람이 저의 환갑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 몇 년 전부터 적금을 넣었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어느 날 저를 좀 만나자고 연락을 해 왔습니다. 저는 그런 속사정도 모르고 만나러 갔더니 그날 적금을 찾았다며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선물을 많이 사줬습니다. 저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거절했더니 그 사람이 화를 내면서 “내가 강 선생에게 선물을 사 주려고 적금까지 들었는데, 기어코 안 받겠다고 하면 내 마음이 어떻겠느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진정으로 화를 내는 모습을 보니 ‘내가 남의 진심을 유린하는 죄를 짓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선물을 받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계속 ‘너는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아직은 못 되어 있어.’라는 소리가 들려와서 ‘이 선물들이 나를 난처하게 만들고 괴롭히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그날 선물 받은 것을 다 기도실에 갖다 놓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참부모님! 저는 이 모든 것을 받을 자격이 못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받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괴로움이 좀 덜했습니다. 
지금 저 자신에게 이렇게 반문해 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느냐?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느냐? 시대적인 사망권 내에서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갈구하며 절규하는 내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느냐? 하늘땅 앞에 부끄럽지 않느냐? 내 마음은 재촉하는 천지의 대운세 앞에 부끄럽지 않느냐?”하고 반문해 보니 진실로 부끄러운 이력서만 남겨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가식이 아닌 저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이제 환갑이 넘었으니 등골에 땀이 바싹바싹 납니다. 왜냐하면 남은 날들이 얼마 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일을 한다고는 했지만 내놓고 자랑할 만한 내용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나 자신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 놓은 일이 있느냐? 역시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간에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산 것으로 하나님께서 간주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하고 억지를 쓰면서 위안을 받기도 합니다. 오늘 여기에 오신 귀하신 분들의 정성이 담겨진 마음과 물질로 인하여 생명의 인연을 맺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정성들인 것은 제물과 같습니다. 제물을 잘못 먹거나 잘못 쓰면 벌을 받는 것이 천리입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내가 사랑하는 하늘부모님, 참부모님께 드린다는 생각으로 편안하게 마음을 가지겠습니다. 여러분의 심정을 유린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진심을 잘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987년 10월 12일 강현실


참부모님께 올린 감사의 편지

아버님 어머님께 

참부모님, 감사합니다. 
죄악에서 구원해 주신 참부모님, 남은 여생도 더 열심히 참부모님께서 하명하시는 일에 모든 것을 다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축하금을 올립니다. 축하금 외에 기념품도 많이 들어왔습니다. 기념품은 다 가져 오지 못하고 축하금만 부모님께 올립니다. 
이 축하금에는 통일교 식구, 기성교인들, 친지와 친척들, 외국인들의 마음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헌금이 참부모님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조건물이 될 것으로 믿고 올리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정성이 담긴 것이니 저는 쓸 자격이 없습니다. 부모님만이 받으실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앞으로 지난 36년간 일한 것보다 더 많이 크게 일하겠습니다. 

1987년 10월 12일
여식 강현실 드림 





제 4 부
세계에 말씀을 전하다 

눈물 바다를 이룬 일본

1990년 12월 아버님께서 초창기의 식구들 22명을 부르셨습니다. 김영휘 회장으로부터 이요한 목사, 최원복 선생, 이정옥 선생 등 22명을 부르시고 일본을 순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보름 동안 일본에 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 뒤 1991년 7월에 다시 사길자, 정대화, 서명진 순회사와 나를 부르셔서 “지금 일본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이다. 가서 식구들의 심정을 부흥시켜 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일본으로 갔는데, 거기서 김명대 회장이 제비를 뽑으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정대화 순회사는 한일교회, 서명진 순회사는 천지정교, 사길자 순회사는 교수아카데미와 승공연합, 나는 기업체와 일본 교회를 순회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일본 교회와 기업체를 맡아서 전국을 순회했습니다. 다른 분들은 1992년 세계평화여성연합 창립 이후에 여러 일들이 많았고, 아버님께서도 말씀이 없으셔서 더 이상 일본에 가지 않았는데 나에게는 일본 순회를 계속 하라고 하셔서 1996년까지 몇 회나 순회를 했습니다. 
그때 내가 일본을 순회하면서 느낀 것이 많습니다. 일본 식구들의 신앙이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한지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자신의 삶보다 공적인 것을 우선시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심지어 일본 식구들 중에 교회에 헌금을 할 때 빚을 내서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당장 내일 먹을 쌀이 없는데도 헌금을 합니다. 이가 상해서 치료를 해야 하는데 건강을 살피지 않고 헌금을 하는 식구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식구들을 보니 눈물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 순회를 할 때는 가는 곳마다 눈물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내가 아버님께 일본을 순회한 결과를 보고드리면서 “아버님, 참 이상합니다. 한국 식구들을 위해 기도할 때는 그렇게 눈물이 안 나는데, 일본 식구를 위해 기도하면 뜨거운 눈물이 막 쏟아집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아버님께서 “나도 사실 일본 식구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많다. 불쌍하게 생각될 때도 많다. 자기가 있는 것을 다 헌금하고도 식구들은 오히려 부족함을 느끼고 죄송하게 생각할 때 참으로 기특하다. 한국 식구들이 일본 식구들을 볼 때 얼마나 수고하고 있는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를 알아줘야 해. 한국 식구들은 일본 식구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수고하는지 실감을 못 하겠지만 심정적으로라도 빚지지 말고 알아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로 나는 일본을 순회하면서 가는 곳곳마다 정말로 정성들이고 심정적으로 빚지지 않은 내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식구들도 심정적으로 그걸 느끼고 가깝게 대해 주었습니다. 나는 일본 식구들의 정성, 심정을 유린해서는 안되겠다는 마음으로 기도와 정성을 들였습니다. 내가 일본 식구들 이상 정성을 들여야 은혜를 줄 수 있지 정성을 적게 들이면 심정적으로 은혜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빚을 지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1992년 12월에 아버님께서 부르셔서 갔더니 김원필 선생도 같이 있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순회사 제도를 없앴는데, 이걸 부활시켜서 다시 하도록 해라. 120명의 순회사를 세워서 각지에 파송하고 원리강의와 순결강의를 하도록 교육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성실하게 일본 전국을 몇 차례나 순회했습니다. 그래서 가끔 일본 식구들이 “일본에 사는 저희들보다 일본에 대해 강 회장이 더 많이 아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사실 일본 식구들은 자기가 사는 지역밖에 모르지만, 나는 일본 전역을 다 순회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1994년 2월 4일에는 일본의 체제를 리전(region: 지역) 체제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리전의 리더들이 뽑혀서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국에서 온 리전 리더들을 모아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나도 한 지역을 맡아야 한다고 하셔서 일본 동동경지역을 맡았습니다. 제일 큰 리전이어서 사람도 제일 많고, 책임도 무거운 곳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직접 전화를 주시며 격려해 주시고 지시도 해 주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늘 전화로 “너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워낙 막중한 책임이 있는 지역이라서 힘들게 4년 여를 보냈습니다. 
그런 다음에 러시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마지막으로 이임식의 자리에서 이임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내가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아쉬움이 많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버님의 말씀을 다 지키지 못하고 흘려 버리고 잊어 버리고 말았지만, 아버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믿고 국가메시아라는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사실 메시아라는 말만 들어도 섬짓했습니다. 메시아의 자격이 없어서 그 호칭을 붙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끄러운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책임을 미루지 말고 꼭 이룹시다. 만약 이번에도 책임을 못 하게 되면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서 다 함께 죽든지 해야 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이임사를 말하는 나부터 듣는 모든 사람들이 울었습니다. 가미야마 회장도 울면서 “어떻게 그렇게 조용조용 이야기하면서도 사람을 다 울리고 마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한국 사람들은 책임을 못 하면 자발적으로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일본 사람들은 구덩이를 파라고 해야 파지, 그렇지 않으면 구덩이도 못 팔 것”이라고 해서 함께 웃은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이취임식의 사진이 나온 것을 보니 모두 얼굴이 눈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그만큼 일본에 있을 때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가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일본 식구들이 나를 기억하고 잘 대해 주고 나도 일본 식구들을 만나면 참으로 반갑습니다. 
세계복귀의 기반, 러시아





1996년 4월에 국가메시아를 위한 수련이 있었을 때는 여러 모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처음에 수련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나는 나이가 많아서 외국에 나갈 수 있는 체력이 안 되고, 영어도 사용한 지 오래되어 잘 쓰지 못하니 수련에 참가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 “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니 이번에는 좀 빠졌으면 좋겠습니다. 외국에 나가서 선교를 할 입장이 못 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아버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다행이다.’ 하고 마음을 놓았습니다. 최종적으로 아버님께 결제를 받으려고 “그럼 이번에는 빠지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막 화를 내시면서 “그 정도로 수련회를 통해서 이야기했으면, 너는 알아들을 법도 한데 아직도 못 알아들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련이 끝날 무렵에 국가를 추첨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제비를 뽑을 때 나는 사양을 해야 되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담당자에게 “이요한 목사님도 제비를 뽑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 물론이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나보다 10살 이상 연배가 높으신 분이 제비를 뽑으신다는데 내가 나이를 핑계로 빠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기 전 칠판 한구석에 아주 작게 이름을 적었습니다. 어떤 국가도 안 뽑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칠판 구석에 이름을 적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추첨하는 사람이 제비를 뽑더니 “강현실 순회사님, 이건 하나님의 뜻입니다. 러시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러시아라니…! 나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국가여서 당황했습니다. 그 사람은 이어서 “강 순회사님, 러시아는 아직 신앙이 어린 식구들이 많아 신앙 지도를 해 줄 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러시아 식구들을 위해 강현실 순회사를 보내 주시니 감사한 일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나라입니다. 미국이나 중국보다 두 배나 면적이 넓고, 인구도 중국과 인도 등에 이어서 세계의 6위인 대국입니다. 특히 공산주의 국가의 종주국으로 오랫동안 철의 장막 속에 가려져 있던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러시아를 임지로 배정 받고 러시아를 위해 정성을 들일 때 신비로운 국가라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습니다.
참부모님께서는 얼마 전까지도 러시아를 소련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소련이라고 하면 소련 연방 15개국을 포함한 말이지만, 이제는 연방이 해체되면서 개방이 이루어지고 독립된 국가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구 소련이었던 16개 국가들 중 러시아를 뺀 15개국을 합한 것보다 면적이 더 넓고 인구도 많습니다. 당연히 통일교 식구들도 많습니다. 예전에 한국 선교사가 “1997년 축복에 참여할 사람이 러시아 360명, 구 소련이 240명입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나라로 보면 러시아가 하나의 나라이지만, 비중으로 보면 다른 15개국을 합한 것보다 큰 것입니다. 구 소련지역의 선교 활동 본부가 러시아 수도인 모스크바에 러시아의 본부와 함께 있었고, 석준호 회장이 전체를 주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륙 차원의 활동과 러시아의 활동을 분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구 소련 지역에서 선교 활동이 시작된 이후부터 국가메시아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5~6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석 회장의 지도 아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한 활동이 전개되면서 각 국가의 협회가 모두 세워지고, 선교 기반이 닦여져 있었습니다. 러시아만 해도 내가 도착했을 때 10개 교구 본부가 세워져 있었으며, 전국적으로 선교 기반을 다지고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와 세인트 피터스버그를 중심한 서부교구, 중앙교구, 남부교구, 우랄교구, 서시베리아교구, 극동교구 등으로 나뉘어 적극적인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참부모님께서는 1976년 워싱턴 모뉴먼트 대회 후 우리의 다음 목표는 모스크바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렇게 선언하시며 모스크바를 영어로 ‘머스트 고(must go)’라고 발음하셨다. 당시에 참아버님께서는 몇 번이나 “내가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소련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내가 꼭 증거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것이 내가 앞으로 꼭 해야 될 일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소련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힘들 때였고, 그곳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증거한다는 것도 불가능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때만 해도 그 말씀이 실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하고 아버님의 사명이 그러하다는 것만 말씀으로 알았습니다. 그 누구도 참부모님께서 1990년에 모스크바에 입성하여 여러 대회를 성공리에 개최하시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1990년에 아버님께서 모스크바를 방문하시고 당시의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 앞에서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고, 이 나라가 하나님을 중심삼은 정치를 하지 않으면 망한다.”며 책상을 치면서 열변을 토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님께서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가를 다시 한 번 실감했습니다. 러시아가 아버님께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실 만큼 섭리적 의미가 있는 곳이니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더욱 열심히 증거해야겠다는 마음이 더 많이 생겼습니다. 
설레임과 기대를 안고 1996년 8월 28일 오후에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모스크바 교구장과 선교사를 비롯한 러시아 현지 식구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고 공항 한 곳에서 도착 보고기도를 올린 후 러시아 활동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전도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아버님께서 몇 사람을 보내셔서 그 사람들이 지하선교를 하고 있었지만 서로 모를 정도였습니다. 영국 여자 선교사, 미국 남자 선교사, 독일 남자 선교사 등 세 사람이 1980년대 구소련에서 선교 활동을 했는데 1990년 아버님께서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셨을 때에야 그들이 서로를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세 사람의 선교사들과 그해 5월 참부모님의 명을 받고 러시아 선교를 지도한 석준호 회장 그리고 세계 각국의 선교사들 덕분에 1990년대 초반부터 선교가 조심스럽게 시작되어 1994년 본격적으로 전도활동이 활성화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러시아에 갔을 때는 입교한 지 3~4년밖에 안 된 식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나마도 1995년 36만 쌍 축복 때 젊은 식구들이 많이 축복을 받고 폴란드나 독일 등 다른 나라로 떠나고, 남은 식구들은 2백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적은 식구들이었지만 처음 만난 날, 나는 ‘아버님께서 러시아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가? 러시아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명을 다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특별히 참부모님께서는 자주 러시아 식구들을 향해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하시면서 앞으로 공산주의자들의 2세 청년들은 참부모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셨기에 더욱 단단히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갔을 때 러시아에는 참부모님의 말씀처럼 식구들의 90 퍼센트 가량이 젊은 대학생들이었으며 그들이 활발하게 전도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의 동서남북에 대학가를 중심한 전도 센터가 운영되고 있었으며, 매일 젊은 헌신자들이 치열하게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원리강의도 센터마다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전도되는 젊은이들은 철저한 원리수련과 만물복귀 그리고 전도 활동 등의 훈련과정을 거쳐서 헌신자가 되기도 하고 핵심식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우수한 축복후보자로 양성됐습니다. 그러한 젊은 식구들의 역동적인 전도 활동이 러시아를 넘어 독립국가연합(CIS)의 각 국가와 몽골 그리고 중국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런 기반 위에서 통일교회뿐만 아니라 원리연구회, 국제교육재단, 천주평화연합(UPF) 등을 러시아 정부에 정식으로 법인단체로서 등록했습니다. 그 단체들이 러시아에 유익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통일운동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특히 국제교육재단의 교육 활동과 학생들을 위한 윤리도덕 교재 발간은 러시아 교육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실시한 청소년 순결교육과 순결 캠페인이 러시아 청소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편 러시아는 개방이 이루어진 자유국가이지만, 국교와 같은 러시아정교회와 정치권력에 의한 케이 지 비(KGB; 국가보안위원회)의 방해공작이 끊임없이 선교의 기반을 흔들었습니다. 20여 차례의 법정 투쟁을 진행하면서 많은 소송비용을 감당해야 했고, 아울러 여러 선교사들이 추방되기도 하는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러시아 통일교회는 1992년 5월 22일 정부에 종교법인으로서 등록되었습니다. 그러나 1997년 러시아 정부는 무차별적으로 유입되는 외래 종교들을 억제하고 러시아정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새 종교법을 제정했습니다. 그 법령에 의거해 외래 종교들이 러시아에서 추방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러시아 통일교회는 여섯 차례의 등록 거절을 극복하고 3년 동안 끈질긴 노력 끝에 2000년 12월 21일 러시아 법무부에 재등록을 이룩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에서 함께 일한 일본의 아오키켄지로 부부와 미국의 달라스 스태프드 부부가 헌신적으로 활동했습니다. 현지에서 활동하지는 못했으나 오하네스 퓨지도 러시아를 위해 많이 협조한 사람입니다. 또한 일본에서 파송된 여성 선교사들의 수고도 많았습니다.

처음에 러시아에 갔을 때 영어를 못 해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예전에 영어를 좀 배웠지만, 그때는 다 잊어 버리고 입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일본 식구들이 선교 활동을 하고 있어서 내가 일본어로 말하는 것을 통역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식구들도 러시아어가 능통한 건 아니어서 영어로 통역해 주었습니다. 내가 일본어로 말하는 것을 일본 식구가 영어로 통역해 주면 러시아 식구가 다시 러시아어로 통역해 주는 순서로 말씀의 내용이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씀을 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영어와 러시아어를 공부했습니다. 
통역을 잘해 준 현지 식구 샤샤 에르초프가 많이 도와주었지만, 내 스스로 러시아어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미흡한 영어 실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매일 아침 영어 원리강론을 독해하면서 연필로 줄을 긋고 주석으로 새까맣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러시아 선교사였던 박신재 목사와 함께 공부했습니다. 그는 러시아어도 잘했지만 러시아에 선교사로 와서 영어공부를 해서 원리강론에 나오는 단어는 한 단어도 모르는 것이 없으리만큼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식구들도 원리적으로 잘 교육시켰습니다. 나는 박 선교사가 러시아에 와서 함께 생활하며 영어 원리강론 한 권을 다 공부하게 된 것을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국가메시아로서 젊은 식구들이 일선에서 활동하는 데 기도와 정성으로서 도움을 주고, 선교 경험이 적은 식구들에게 내가 체험한 참부모님의 역사를 간증하고 신앙의 뿌리와 전통을 교육하는 데 주력하면서 보탬이 되고자 애썼습니다. 그렇게 매일 0시 기도회와 새벽 훈독회를 통해서 러시아 복귀를 위해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처음에는 아버님의 생애노정을 말씀하는 데 8주 정도가 걸렸습니다. 아버님의 심정과 사상, 아버님의 가슴 속에 묻혀 있는 뜻을 설명하다보니 그렇게 시간이 걸렸습니다. 

러시아 식구들은 여름마다 계몽전도를 했습니다. 길가에서 노방전도를 하고 만물복귀도 하는 등 참으로 열심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활동하니 노방전도를 통해 한 해 여름이면 40~50명이 전도되었습니다. 처음에 내가 갔을 때는 예배를 보던 장소의 뒷자리에 여유가 있었는데, 1년 만에 예배당이 꽉 차게 되었고 축복도 많이 받았습니다. 신기한 것은 내가 짧은 시간 동안 핵심적인 말씀만 강의하는 데도 식구들이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오랫동안 사상적인 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가 좋고 순수해서 말씀을 잘 받아들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창성 강사도 러시아 식구들이 착실하고 머리가 좋다고 했습니다. “순회사님, 러시아 사람들이 머리가 좋습니다. 40일 수련을 시킨 뒤 시험을 봤는데, 백 점을 맞은 사람들이 많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심지어 러시아에 와서 활동하고 있는 유럽 선교사들보다 성적이 좋은 사람들도 있습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성들 가운데서도 동시통역을 잘 하고 머리가 비상한 청년들이 많았습니다.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은 일은 모스크바 근처에서 재림주님을 만나기 위해 50년 동안 제단을 쌓고 준비한 이들을 만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50년 동안 예수님의 사진을 걸어 놓고 기도와 정성을 들였습니다. 신기한 것은 기도 중에 예수님의 사진이 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표정이 웃고 있는 날에는 좋은 일이 생기고,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날에는 꼭 문제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50년이 지났는데, 갑자기 계시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이제 지상으로 오실 때가 되었다. 주님은 동방으로부터 서쪽으로 오신다. 그 분은 세계 인류로부터 경배를 받을 분이며, 세계 인류가 오시는 주님께 경배를 드려야 할 때가 되었다.”고 계시가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오시는 주님께 경배를 드리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대표가 참부모님의 존영을 보더니 “아, 이분이 오시는 주님입니다.”라고 증거했습니다. “주님을 만나다니…. 50년 소원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 대표가 그렇게 기뻐해서 식구들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50년 동안 우리만 준비 해 온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주님을 모시고 경배하니 기쁠 따름입니다. 우리와 함께할 동지가 많으니 고맙습니다.”라고 소감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들 모두 다 원리수련에 참석한 뒤 축복에 참가했으며, 지금도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신기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 식구가 길거리나 공원에서 전도 활동을 계속하다가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를 받아 경찰에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취조를 당하게 되었는데 그 식구는 당당한 태도로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내용을 전하고 있는가를 경찰에게 설명했답니다. 
경찰은 그 설명을 다 듣더니 “나와 같이 갑시다.” 하면서 어디론가로 그 식구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 식구는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몰라서 걱정했지만 경찰의 태도가 신뢰가 되어서 믿고 따라갔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집 앞에 서서 “이 집은 우리집입니다. 우리부터 축복을 좀 시켜 주십시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집을 방문해서 축복설명회를 갖고, 그 경찰 부부가 축복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다음에는 경찰이 은혜를 받아서 자기 부모를 축복받게 하고 주위에 있는 다른 경찰들까지 전도해서 축복을 받게 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그런 예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원리를 모를 때는 반대했지만 알게 되면 그런 큰 역사가 벌어졌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도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1990년 이후에 등록한 종교법인을 다시 등록하라는 공표가 있었습니다. 러시아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우크라이나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정부에서 종교법인 허가 담당을 맡고 있던 사람이 우리 교회에 대해 오해를 하고 계속 허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직접 그 사람을 만나서 통일교의 교리와 사상을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을 했답니다. 이 사람이 말씀을 듣고 나서 큰 감동을 받고 “그러면 나부터 축복을 시켜 주시오.” 하고 나섰습니다. 
얼마 뒤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여기에 30쌍 정도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준비를 했는데 와서 축복을 좀 해 주십시오.”라고 전화를 해 와서 식구 두 명이 축복을 하러 갔답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보니 천 명도 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축복식에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그 두 명의 식구는 30쌍 축복식을 예상하고 준비해 갔는데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곧 상황을 파악하고 12쌍을 대표로 뽑아 단상에 세워서 축복식을 진행했습니다. 
그랬더니 나머지 사람들도 축복을 받게 해 달라고, 축복식에 참가하게 해 달라고 난리를 피웠습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2천 쌍, 3천 쌍, 5천 쌍씩을 모아서 축복을 해 줬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역사가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은 너무 크게 은혜를 받아서 원리강론을 세 번이나 정독하고 1997년 8월부터 30만 쌍을 축복시켰습니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우크라이나 국가메시아인 정수원 회장이 정성을 많이 들이는 분이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면서 감탄을 했습니다.
그런 역사들이 러시아를 중심한 동북대륙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동북대륙의 여러 나라들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축복식을 열었습니다. 국가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패밀리 페스티벌(Family Festival)’을 개최해서 사람들을 모으고 거기에 참가하는 부부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부부나, 아이를 많이 낳은 부부에게 선물을 주고 축제를 개최했습니다. 그런 축제를 교회가 주최한 것이 아니라 감동을 받은 국가 지도자들이 직접 주최하고 행사의 경비로부터 일체를 책임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역사를 접하면서 나는 아침저녁으로 박신재 목사와 함께 기도의 제단을 쌓고 정성을 들였습니다. 동북대륙, 그중에서도 러시아는 아버님께서 국가적으로 복귀되기를 바라셨던 곳이고, 미국의 두 배에 달하는 면적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에 러시아가 복귀되면 세계의 절반이 복귀된다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러시아 식구들에게는 늘 “러시아가 복귀되면 중국과 북한도 복귀될 수 있고, 동북대륙을 중심으로 세계도 복귀될 수 있다. 우리가 세계 복귀의 중심이라는 생각으로 정성을 들이고 열심히 하자!”고 격려했습니다. 더불어 “러시아와 동북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를 보면, 천운이 우리에게 왔다. 우리가 이 천운을 타지 않으면 안된다. 2천 년 전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했지만, 우리에게는 지금 참부모님께서 승리하신 천운을 타고 러시아를 복귀해야 되는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러시아 식구들은 참으로 열심히 활동했고 심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70년 동안 하나님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이 우리의 말씀을 듣고 축복을 받아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주위에서 신앙적인 핍박을 받기도 하고 무시를 당하기도 했지만 쉬지 않고 노방전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겨울에는 추위가 심해서 전도 활동을 못 하기 때문에 여름 동안에 최선을 다해 전도를 하는데, 그 기간 동안 식구들이 한마음이 되어서 정성을 들이며 노방전도를 하는 모습은 참으로 은혜로웠습니다. 

러시아에 있는 기간 동안 나는 지방교구를 순회하며 전도 센터를 방문해 참부모님을 증거하는 데 혼신을 다했습니다. 또한 거대한 러시아의 국토와 자연 그리고 역사적인 도시들을 둘러보며 많은 것을 느꼈고, 특히 공산 시절에 무참하게 희생된 수많은 한맺힌 영들의 애환을 생각하며 기도했습니다.
내가 러시아에서 잊을 수 없던 것은 오랫동안 고국과 가족을 떠나 개척선교의 일선에서 희생적으로 수고하던 선교사들의 활동이었습니다. 그들의 활동에 감격하여 머리가 숙여진 적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며 살아 온 공산주의 국가의 젊은이들이 원리말씀을 통하여 눈물 어린 감동을 받고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참자녀가 되어 혹한 속에서도 노방전도와 만물복귀의 활동을 하던 모습과 가정의 핍박으로 인해 부모형제를 떠나 학교도 휴학하고 뜻을 위해 헌신하던 모습을 볼 때 하나님께 감사하며 참으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매주일이면 모스크바의 한 장소에 60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어디에선가 지하철을 타고 예배장소를 향해 대부분 무언가를 등에 짊어지고 줄지어 모여왔습니다. 나는 그런 광경을 바라보며 ‘저들이 원리말씀에 감동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저렇게 모여 올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종교를 말살하고 피의 혁명으로 시작된 공산주의 국가의 심장부인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과 참부모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꿈만 같은 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참부모님 그리고 원리말씀의 위대함에 다시 한 번 두 손을 모아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1996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창설과 더불어 이어진 세계적인 360만 쌍 축복을 향한 활동은 러시아에서도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나도 역시 공공장소에 함께 나가 성주축복을 나누어 주는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2000년이 되면서 참부모님께서 국가메시아들을 한국으로 부르셨습니다. 나도 종족메시아의 활동과 조국광복에 임하라는 명을 따라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지금까지 현지 지도자들과 관계를 유지하며 정성을 쏟고 있습니다.  

요즘에 러시아에서 2세들이 밤낮으로 태어나 그 수가 날로 증가하여 러시아를 축복의 나라로 만들 수 있는 희망의 소식이 계속 들려 옵니다. 
18년간 긴 세월 동안 선교의 황무지였던 러시아와 공산권 세계에 선교의 씨를 뿌리고 확실한 기초를 다진 석준호 회장 내외분의 형언할 수 없는 물심양면의 수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선교사님들 러시아 협회장 알렉세이 부부, 윌리엄 씨와 후지고 씨의 다 헤아릴 수 없는 수고는 하나님과 참부모님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제는 나이가 많고, 러시아어도 모르지만 뒤에서 러시아 식구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기도해 주는 것이 내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좋은 실적을 남길 수 있도록 잘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것은 2005년 5월 26일 동북대륙 본부의 헌당예배에서 말씀했던 설교문입니다.

동북대륙 창립 15주년 기념과 본부헌당예배 격려사

오늘은 이 동북대륙에 속해 있는 모든 국가와 식구님들이 어느 누구 예외 없이 참으로 기뻐해야 할 날입니다. 왜냐하면 이날은 창조주가 되시고 전지전능하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평화의 왕 되시는 참부모님께서 기뻐하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쁜 날을 빛내 주시고 또 축하해 주시기 위하여 참부모님을 대신하여 오신 회장단들과 내외 귀빈 그리고 식구 여러분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심정으로 감사드립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이었던 1976년에 아버님께서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공산국가인 소련에 가서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셔서 역사를 움직이고 계신다는 것을 증거하지 않으면, 내 한이 풀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그 말씀을 듣고 있었던 우리는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소련과 국교도 맺어지지 않은 때였기 때문에 소련으로 간다는 말을 하면 법적으로 구속되어 감옥으로 가야 될지도 몰랐던 때였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소련을 구원하시기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신 입장이었습니다. 그만큼 소련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을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기적 중에도 기적입니다. 한반도에 강림하신 재림주님이 1990년에 모스크바에 직접 오셔서 이 나라가 하나님을 중심삼은 말씀 위에 서지 않으면 미래가 비참해질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레닌의 동상을 다 없애야 하고, 레닌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화폐도 바꾸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던 혁명적 말씀으로 소련을 개방하고 혁명하셨습니다.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여러분은 우리를 위해 오신 참부모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 이후 많은 청년들이 이 원리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자랑하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오늘 여기에 이렇게 웅장하고도 큰 본부를 세우고 하나님과 참부모님 앞에 봉헌하게 됨은 하나님과 참부모님께서 함께해 주시고 영계가 총동원되어 역사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 처음 들어와 지하에서 선교를 시작한 선교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노고를 진심으로 찬양합니다. 그 이후부터 초창기의 모든 책임을 지고 내적·외적으로 참으로 수고하신 석준호 회장께 두 손을 모아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한국 선교사로서 동북대륙의 부협회장이신 박신재 선교사의 물불을 가리지 않은 수고에 더욱 감사드립니다.
이제부터 이 새 성전인 동북대륙의 본부를 중심하고 하나님과 천지인 참부모님을 만국에 자랑하고 증거하여 세계가 하나님의 조국인 한국을 향하여 머리를 숙이며, 새로운 부흥의 역사가 불길처럼 일어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이 본부의 헌당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축하드립니다. (2005.5.26)




어거스틴과 축복결혼





참아버님께서 나의 축복 문제를 두고 고민을 많이 하신 것 같았습니다. 1999년 초 한남동에서 있었던 훈독회 시간에 아버님께서 “축복 때만 되면 강현실의 축복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998년 말에 1999년 하나님의 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남미에 갔습니다. 그때 참어머님께서도 나의 축복 문제를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축복을 받아야 하는데, 전 세계를 돌아봐도 나이 든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영인과 축복받는 것은 어떠하냐?”고 물으셨습니다. 나는 “저는 아무와 해도 무관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참어머님께서 다시 한 번 “영인과도 괜찮겠느냐?”고 하셔서 나도 모르게 “예!”라고 답을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참아버님과 참어머님께서 밝게 웃음을 짓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좋겠느냐?”고 다시 물으셨습니다. “저는 통일교의 첫 번째 개척자이고,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첫 번째 개척자로 성경을 13권이나 쓰신 분이며 개신교인은 어느 누구 예외없이 존경하는 분이니 사도 바울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이 기도해 보더니 “바울은 결혼하신 분인데 지상생활을 하던 동안 이교도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고 무시를 당했으며 욕을 먹은 분으로 감옥에도 투옥되는 등 고난을 많이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도 바울의 부인은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런 고비를 넘기기가 힘들었는데, 그때마다 바울 선생이 위로하고 권고하며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답니다. 그런 일이 많았기에 미안해서도 부인을 떠나 새로 축복을 받기가 힘들 것 같다.”고 했습니다. 
참부모님께서 “그렇다면 성 어거스틴과 축복을 받는 것이 어떠냐?”고 하시기에 나는 “예, 좋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1999년 2월 7일 잠실체육관에서 영육축복으로 어거스틴과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참아버님께서 영계는 혼자 가는 것이 아니고 부부가 자식을 데리고 함께 가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나는 괴로운 마음에 표정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내게 제일 좋은 길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축복을 받고 나서는 마음이 편안해졌으며, 아버님의 말씀을 이루어 드릴 수 있어서 더욱 감사했습니다. 축복은 내가 받았는데, 참부모님께서 훨씬 더 기뻐하시는 것 같아서 더욱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참자녀로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은 친자식을 잃어버리시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잃어버리신 것보다 더 무섭게 그 자식이 죽어 버렸습니다. 그때에 느끼신 하나님의 슬픔, 아픔, 괴로움과 고통은 말로써 표현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 고통 때문에 미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미치신 심정을 아버님께서는 그대로 체휼하셨습니다. 눈에서는 피눈물이 쏟아지고, 가슴은 숨이 끊어지리 만큼 답답하며, 귀에서는 하나님의 탄식 소리가 들려오고, 코에서는 끊임없는 콧물이 쏟아져 나오며, 입으로 “내 아들과 내 딸은 어디로 갔나? 어디에 있나?” 하시며 통곡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참부모님께서 체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서러움의 크기와 높이와 깊이는 절대로 측정할 수 없고 저울로 달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고통과 서러움 그리고 답답함을 우리 참부모님만큼 체휼한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본래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였는데 사탄의 자녀로 변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혈통이 사탄의 혈통, 원수의 혈통으로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아버님께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고는 미치셨습니다. 이후로 참아버님의 삶은 미친 생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자녀가 하나님의 순수하고도 고귀한 생명록에 기록되어야 하는데 사탄의 혈족이 되어 사망록에 남게 되었으니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한이 하늘에 닿은 것입니다. 그 혈통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혼자서 불가능합니다. 그것을 체휼하신 참부모님이 아니고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참부모님께서 귀하고 소중하신 분입니다. 하나님도 참부모님이 아니시고는 당신의 섭리를 종결지으실 수 없으니 하나님께는 형언할 수 없으리 만큼 크신 분입니다. 
그렇게 귀하신 참부모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것은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다. 축복을 받고 나니 참부모님께서는 수십 번 나를 세워 간증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루는 청평수련소에 만여 명이 모인 곳에서 “강현실, 성인과 축복을 받은 게 사실이냐?” 하고 물으시기에 “예, 사실입니다.”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왜, 목소리가 작으냐?”라고 나무라셨습니다. 그래서 큰 목소리로 “사실입니다.” 하고 외쳤던 적도 있었습니다. 청중들은 내 대답에 박수를 치며 화답했습니다. 그러자 참아버님께서는 축복을 받은 소감을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가는 곳마다 간증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한국에서도 수십 번 간증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이미 여러 번 간증을 했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그래? 나는 한 번도 못 들어봤다.”고 하시면서 웃으셨습니다.
어거스틴은 서기 354년 11월 13일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카스에서 이교도 파트리시우스와 그리스도교인 모니카의 아들로 출생했습니다. 그는 카르타고의 감독이자 수사학 교수, 주교, 힙포교회의 신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 입문하기 전이었던 청년시절에 방탕한 인생을 보냈다고 참회록에 고백했습니다. 참회록 8장에서 소나기와 같은 눈물을 쏟으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를 질책하시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열어서 로마서 13장 13~14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전 영혼을 변화시켰으며 친구와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성경의 그 구절에서는 “낮과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에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읽지 않았습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광명한 확신의 빛으로 그의 마음을 비추어 모든 의심의 어두움을 물리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참회록 8장에서 그는 33세에 기독교에 입문하여 수많은 책을 내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유명한 참회록과 신국론 등 수많은 대작과 서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430년 8월 28일, 76세로 지상의 삶을 마무리했습니다. 그의 참회록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찾게 되었습니다. 교황들과 칼빈이나 루터도 큰 문제가 발생할 때 어거스틴이 쓴 책을 읽고 해결책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지금의 천주교인들은 어거스틴을 참으로 존경할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기고 간 글을 수천 년이 지난 오늘도 생명시하며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를 갖게 해 준다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신학도들이 지금도 졸업논문을 쓸 때 어거스틴의 저작을 연구대상으로 합니다. 
그의 어머니도 기독교사 가운데 유명하고도 위대한 어머니상을 남겼으며,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는 선망의 대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는 청소년시절에 불량한 생활을 많이 해서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매일 눈물로 정성을 들이며, 아들이 바른 신앙을 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마침내 어거스틴이 33세에 기독교에 입문하여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또 어거스틴은 영계에서 통일교회로 입문했습니다. 그렇게 입문하고 보니 자신은 너무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모르고 살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고, 자기 자신이 시대적 혜택을 받지 못한 것을 너무도 안타까워했습니다. 제일 아쉬운 것이 있다면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 참부모님과 더불어 세계 복귀의 전선에 서지 못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생존시에 뼈 속 깊은 데서 사무치게 우러나는 심정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영계에 가서는 많은 이들 중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었고, 참부모님의 은사로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알았으며, 그의 섭리에 직접 동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계에서 개종한 어거스틴은 또 다시 참회록을 썼습니다. 그는 분명하게 영계에서는 종교와 인종 그리고 국가의 국경선이 다 철폐되고, 참부모님을 중심하고 지상의 모든 종교의 경계선도 무너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참회록을 읽은 통일교회 식구들 중에서 어떤 이는 “어거스틴 주교님이 더러 찾아옵니까?” 하고 나에게 묻습니다. 나는 “예, 찾아옵니다. 예고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축복 이후에는 자주 찾아왔으나 지금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만 찾아옵니다.” 
“이야기도 합니까?” 
“그럼요. 20대의 사랑이 어떠하다는 것, 30대와 40대의 사랑이 어떠하다는 것을 체휼케 해줍니다.” 
“대화는 어떻게 합니까?” 
“나는 우리 한국을 세계의 종주국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조국어인 한국어로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한국어를 모르지 않습니까?”
“영계에서는 생각이 결과로 나타나니 한국어로 생각만 해도 이미 대화가 서로 통합니다.”
“축복을 받기 전과 받은 후가 어떻게 다릅니까?”
“기쁜 일이나 좋은 일이 있을 때 그것을 두 사람의 행복으로 합하게 되니 행복이 두 배로 커지게 되어 더욱 행복합니다. 속상하고 언짢은 일이나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둘로 나누게 되니 반으로 줄어서 더 가벼워집니다.”
축복을 받은 후부터 진실로 나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신비한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식구들 가운데 나에게 와서 “어거스틴의 영계에서의 참회록을 읽고 영계를 다시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식구는 참회록을 여러 번 읽어서 암기할 정도라고 합니다. 
통일교회는 인생의 근본문제와 주의 근본문제가 해결되는 곳입니다. 모든 제반 문제가 해결되니 사랑의 궁전, 생명의 궁전, 혈통의 궁전 안에서 참사랑을 주고받으며 참사랑을 중심삼은 세계를 창건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거스틴 선생을 소개해 주신 참부모님께 참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신앙이 좋고 바르게 살아왔던 분을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배필로 정해 주신 것을 생각할 때마다 내적인 심정과 외적인 전부를 다 드리고 쏟아도 부족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기도할 때 언제나 하나님, 참부모님, 예수님, 흥진님, 대모님과 어거스틴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어거스틴은 아버님을 하나님이 준비해서 보내 주신 메시아, 구세주, 재림주, 천지인참부모님으로 믿고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참부모님을 굳게 잡았으니 절대로 놓치지 않겠습니다. 반대하는 자들 앞에 증거하는 데 선구자가 될 것을 맹세합니다.” 하고 서원했기에 그대로 할 것으로 믿습니다. 복귀의 동산에서 어거스틴은 억만세를 부르며 “참부모님의 고귀한 피와 눈물과 땀방울의 심정적 동역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이 엄청난 새 진리 앞에 두 손과 두 무릎을 모아 굳게 맹세한다.”고 했으니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거스틴은 나보다 1,577세가 더 많습니다. 누가 들어도 미친 사람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참부모님이 축복해 주셨으니 나는 감사하고 황송할 뿐입니다. 세상에서는 아무리 부부의 나이 차이가 있다고 해도 20년이 넘으면 많이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1,577년의 차이가 납니다. 절대적인 신앙으로 신비한 체휼을 생활 속에서 경험하게 해 줍니다. 
어거스틴은 애정 표현도 잘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여, 들으소서! 당신은 참으로 아름다워요. 아무리 목소리를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고 또 듣고 싶은 살아 있는 목소리입니다. 언제나 그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왠지 피곤하다고 생각될 때 그대의 미소지은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 나는 내 모든 것을 잊으며 달려가서 잡고 싶은 생각입니다. 그대의 아름다운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될 때 하나님과 참부모님이 찾아오셔서 아버지도 되시고, 어머니도 되시고, 오빠나 언니도 되어서 함께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언제나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며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며, 저주는 무덤과 같이 잔혹합니다. 사랑은 아무리 많은 물을 가지고도 끌 수 없을 만큼 뜨겁고 높고 깊습니다.”라고 표현합니다.
내가 이런 내용을 글로 남기는 것은 참부모님께서 축복해 주신 영계의 영인과 지상의 실체인이 이렇게 깊은 사랑을 실천했다는 것을 후대에 전하기를 바라시고, 어거스틴도 그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가는 곳마다 이 놀라운 사실과 소식을 전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미국 애틀랜타에서의 축복활동





2004년 나는 참부모님의 명에 따라서 미국 애틀랜타 지역에 가서 축복 활동을 했습니다. 애틀랜타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고향이어서 영적으로 많은 협조가 있을 것으로 믿었기에 특별히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수십 년간 흑인의 인권 회복을 위한 활동을 하면서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흑인 목사로서 백인들로부터 무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인종의 벽을 철폐하고 평등과 자유를 외치다가 순교를 당했기 때문에 축복 활동에 크게 협조하리라고 믿었습니다. 지금은 그가 영계에서 인종차별은 물론 교파나 나라 간의 갈등과 마찰이 하나님을 중심한 본연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참아버님의 사명을 영계에서 알고 영적으로 많이 협조하고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실제로 애틀랜타에서 활동하며 영계가 크게 역사해 준다는 것을 매일 느낄 수 있었습니다. 
5월 1일부터 2차에 걸친 후반 활동은 전반에 뿌려 놓은 씨가 자라나듯이 성직자들의 심성이 더욱 하나님뿐만 아니라 참부모님과 가까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전반기에는 교회에서 축복식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후반기에 들어가서는 정성을 들이고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말씀을 전할 때마다 기적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말씀을 들은 목사와 교회 신도 전체가 축복을 받아야 되겠다고 기쁜 마음으로 청원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적이 지상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참부모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만 하면, 모든 것이 뜻 속에서 좋은 결과로 맺어진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애틀랜타에서 일본 선교사들 38명이 활동을 했지만, 그당시에는 20명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정성과 열성에는 아무리 마음이 굳은 사람이라도 다 녹아나지 않을 수 없는 참사랑을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심는 심정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목사의 가정들을 방문할 때 쿠키를 만들어 선물로 가지고 가서 무언으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들의 진실된 마음과 눈물 어린 기도 앞에 나 자신도 우러러보며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당시에 교회 사택에서는 성직자 부부와 가족들을 초청하여 식사 대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대접을 받은 목사들은 눈물로 감사하며 진심어린 심정으로 대접을 하던 선교사들로부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식이 아닌 참된 마음으로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때로는 눈물로 화답하기도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목사가 그레이스 맥핸이었습니다. 그 목사는 여성 목사로 시무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100개 이상의 교회를 가지고 있으면서 목회를 하던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기독교 가문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나중에 미국 성직자 리더십 컨퍼런스(ACLC)와 연결되어 월례회에 참석했는데,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어서 활동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활동을 그만두기 전 마지막으로 4월 27일에 14만4천 쌍 축복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적인 협조 아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녀 자신이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순결을 지켜 온 선남선녀가 하나님과 참부모님으로부터 영원한 결혼, 즉 위대한 축복을 받는 모습에 감동한 것입니다. 이미 결혼한 부부들은 마음대로 살아왔던 과거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회개한 후 다음부터는 부부가 불륜을 저지르지 않고, 이혼하지 않으며, 자녀들에게 혼전순결을 교육하여 순수한 혈통을 전수하기로 맹세하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의 가정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지 못한 것을 절감하고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사실 2년 전부터 남편과 서류상 이혼은 하지 않았지만 별거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교회에 전화를 걸어 “이번에 하나님께서 나의 결혼을 치료해 주실 것을 믿으며 남편과 다시 결합하기를 원하나 내 힘으로는 되지 않으니 도와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교회에 데리고 오기로 약속한 며칠 후 교회로 찾아왔습니다. 이후로 일주일에 한 번씩 내외가 같이 와서 원리강의를 듣었습니다. 매주 1회씩 모이던 원리강의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두 아들이 강의를 듣고 매우 기뻐하며 부모가 하나님 편으로 변화된 것이 너무 좋고, 자신들도 순결을 결의하고 원리말씀을 더 진지하게 듣겠다고 했습니다. 
참부모님에 대해서도 말씀을 했더니 참으로 훌륭한 분이시며 세계를 살리기 위하여 사시는 분이니 그들도 더 깊이 알아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머뭇거리면서 그녀 자신도 가정연합에서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바람이며, 우리의 바람이기도 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심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 뒤 7월 3일 그레이스 목사 부부와 두 아들이 함께 축복을 받고 새롭게 출발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또 다른 여자 목사도 기억납니다. 그녀는 ACLC 활동을 적극적으로 환영했으며 예언을 하고 계시도 많이 받았습니다. 내가 일본 선교사들과 함께 그녀의 교회를 몇 번 방문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 기반 위에서 5월 12일 어머니 주일을 맞아 전 교인들에게 축복식을 거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축복식을 거행하고, 마지막 기도를 내가 한국말로 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아멘 소리가 쏟아져 나오며, 박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날 50여 쌍이 축복을 받았는데, 축복식 이후에 그 목사가 앞으로 나오더니 나와 일행을 가리키며 “지금 이 분들은 중요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큰 일을 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오늘은 귀한 날이며 귀한 행사를 거행했습니다. 지금 이곳은 성별된 자리이며, 하나님과 예수님이 운행하고 계십니다. 축복을 통하여 가정은 거룩하게 되며, 만사가 형통하게 되며, 이 땅 위에 태어난 목적이 성사되었으니 할렐루야 아멘이 아닙니까?”라고 하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리고 “죄악의 굴레에서 해방된 여러분 자신들임을 확인하고 믿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예배 후 교인들이 나에게 찾아와서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참으로 가까워진 것으로 믿는다.”며 나를 붙들고 감사하다고 하면서 포옹하고 땀 냄새 나던 볼을 마주 댔습니다. 옛날 같으면 흑인과 볼을 맞대고 인사하는 것을 상상도 못 했을 텐데, 참사랑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나도 기쁜 마음으로 호응하게 되었습니다. 
감리교 브라운 목사의 교회에서도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브라운 목사는 영적인 경험을 많이 했는데, 예배 시작부터 분위기가 영적이었습니다. 목사뿐만 아니라 신도들도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영적인 현상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한 뒤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먼저 축복식에 대해 설명했을 때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부부가 성주를 마시고 성혼을 하게 된 기념으로 키스를 했습니다. 마지막 기도를 한국말로 했는데, 교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끝까지 은혜 속에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영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이기에 영적으로 지상인들과 통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한국어로 한 기도였지만, 미국 사람이 영어로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기도를 들었던 사람들이 ‘아멘, 할렐루야!’를 연속적으로 외쳤던 것은 은혜를 받은 까닭이었습니다. 
그런 경우들을 통하여 영계가 참아버님께서 뜻하시는 일에 백 퍼센트 협조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미국인들은 담당 목사가 하자고 하는 대로 따라서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만약 자기들이 빠지면 무슨 일이 생기는 것처럼 앞다투어 축복식에 참석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자기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영계의 성인들이 협조하고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땀으로 젖어 있었던 빰을 내 빰에 갖다 대고 포옹할 때도 더욱 강한 사랑을 표시하고, 절대적으로 헤어지지 않고 영원한 세계까지 함께 가고 싶은 마음과 다짐을 보이는 것으로 느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은 그 나라만의 문화와 전통, 풍습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아름다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루 속히 하늘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풍습이 이 땅에 나타나 그대로 기뻐하면서 함께 즐길 수 있는 시대가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세계를 이루어 하나의 세계, 선의 세계, 참사랑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사명이라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혼율이 50퍼센트 정도라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제대로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낳고 사는 정상적인 가정이 귀합니다. 축복활동을 하면서 많은 가정들이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된 것을 하나님과 참부모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차츰 ACLC 운동이 무르익어 감에 따라서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에서 신도들이 반대하고, 심지어는 타교회로 적을 옮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부정적인 전화와 이상한 이메일을 보내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ACLC의 간부 되는 목사는 그러한 핍박을 통하여 이 운동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더욱 깊게 확신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이 아니면 원수가 나를 그대로 방치해 둘 것이지만, 적이 나에게 가까이 접근해 오는 것을 볼 때 반드시 이곳은 뜻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절감했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간증했습니다.  
그 목사는 “ACLC가 하나님의 운동이라는 것과 하나님이 직접 말씀해 주신 것을 우리는 확실히 믿어야 한다.”고 담대하게 말하면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이 운동을 계속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은 살아 계시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큰 힘을 베풀어 주십니다.”라고 분명히 이야기하며 “나는 많은 시련을 극복했는데, 그때마다 나의 영적인 기준이 점점 더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내가 세미 크리스탈 교회에 갔을 때, 그는 그날이 특별한 은혜를 받는 날이라고 생각이 들어 어떤 증표를 달라고 기도했는데 축복 후 목사 자신의 가정부터 새롭게 부활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부 관계가 좋지 못했던 가정들에서 부부의 사이가 좋아졌으며,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사랑으로 회복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내려 주셨던 증표라고 하면서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도 화목한 교회가 되었고, 새로운 신자들도 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중에서 엘더 로날드 존스 장로 가정은 부부 사이가 나쁘지 않게 32년을 지내 왔으나 축복을 받은 후 비약적으로 부부 간의 사랑이 깊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제2의 허니문을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그 교회 목사 부부와 그리고 제직회 그리고 전 식구들에게 축복을 해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교회의 중심이 되는 한 가정은 부부 사이가 너무 나빠 부인이 남편을 때려서 몇 바늘을 꿰맨 적도 있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별거 생활을 해 왔는데, 축복을 받고 나서 관계가 급속도로 좋아졌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각자가 살던 집을 팔고 함께 살 집을 샀다고 말했습니다. 며칠 전에는 장미꽃 다발을 한 손에 들고 부부 간에 다정하게 손을 잡고서 애틀랜타 가정교회에 찾아왔습니다. 
축복식 이후로 그동안 교회에 나오지 않고 쉬었던 신도들까지 속속 불어나서 “지금은 교회에 새로운 의자를 내어 놓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발전은 성주를 통한 축복이라고 감사의 인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가 애틀랜타에서 축복 활동을 펼치며 나라와 인종 그리고 교파를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섭리역사를 직접 체휼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종족메시아의 선포와 양자 입적





인간은 누구나 사탄의 혈통을 받아 태어난 사탄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창조되었으나 타락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과 질곡의 늪에서 허덕이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인류의 참부모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시고, 참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참된 혈통으로 다시 중생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참사랑의 삶을 통해 개인 완성을 실현하고, 참된 가정을 통해 참된 종족과 국가 그리고 세계를 이룰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참부모님을 따라서 모든 인류가 메시아, 참부모가 될 수 있게 축복해 주셨으니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합니다. 특별히 참부모님께서는 모든 축복가정을 하늘이 주신 천륜의 혈연관계인 종족을 복귀하는 ‘종족메시아’가 될 수 있는 귀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종족을 구원하는 메시아가 될 수 있게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주신 은사에 감사하며 2004년 10월 28일 타워호텔에서 ‘강 씨 종족메시아 선포식’을 개최했습니다. 다음은 그날 강 씨 종친들 앞에서 행한 인사말씀입니다. 

바쁘신 가운데도 이 자리를 빛내 주시기 위하여 참석해 주신 황선조 협회장을 비롯하여 내외 귀빈과 강 씨 종친 여러분 그리고 강호준 회장과 강희만 선생, 모든 종친들께 먼저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이 시간은 진주 강씨의 이 자와 식 자인 강이식 선조의 은덕을 존중하고, 그 후손들이 정성을 한데 모아 인류의 구세주요 메시아요 참부모이신 문선명 총재님 양위분께 강 씨 종족을 대표하여 평화의 왕 즉위식을 올려 드리는 뜻 깊은 날입니다.
특별히 오늘 이와 같은 섭리적인 큰 뜻을 지니고 있는 이 자리에 강 씨 종친 일가분들 앞에서 인사말씀을 드리게 된 것을 무한한 기쁨과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문 총재님께서 부산 범냇골 시절에 단칸방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미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혼신을 다하시며, 인류의 장래 문제를 놓고 정성들이시던 때부터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평화운동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총재님 내외분께서는 참가정 운동을 통해서 한 하나님 아래 세계 대가족주의를 실현함으로써 분열과 투쟁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시고 진정한 인류 평화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쳐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경과 종교와 인종을 뛰어넘어 오색인종을 한 형제로 묶어 주시고 사상적 장벽을 허물어 진정한 화해와 평화의 세계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강 씨 종친 여러분, 역사 이래 이 땅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이 세상 존재의 기원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인류의 구세주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시고 믿고 모신 분이 바로 문 총재님 양위분이십니다. 그 증거는 총재님 양위분께서 2001년 1월 13일에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하나님 왕권즉위식’을 해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2003년 12월 22일에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예수님 왕권즉위식도 해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모든 한을 풀어 드리신 인류의 참부모요 참스승이요 참주인으로서 만민이 존경하고 찬양하는 세계평화 실현의 중추적 사명을 다하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강 씨 종친 지도자분들이 거의 모였다고 봅니다. 우리 강 씨 성은 인류 최초의 성으로서 고대의 인황 씨, 즉 염제 신농 씨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5,300여 년이란 유구한 세월을 이어온 뿌리 깊은 씨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우리나라에서 단일 본으로는 최대로 번성한 씨족임을 자부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강 씨는 130여 만 명에 달하고 있으며 286성씨 중 6대 성씨 가운데 하나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조들의 업적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효와 의가 특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외침을 물리치고 민족과 국토를 멸망에서 구한 우리 시조 강이식 장군과 강감찬 장군 그리고 강민첩 장군이야말로 오늘날 단일민족으로서 한민족의 역사가 있게 했던 분들입니다. 또한 강 씨의 오늘을 있게 한 스승이요 장군님들입니다. 
강 씨 성을 가진 이들의 대다수는 오로지 옳은 것을 밀고 나가는 고집스러운 성격, 옳지 않은 것에는 굽히지 않는 고집이 있어서 세인들은 강 고집이라고 말합니다. 이 모두가 의의 사상이 우리 성 씨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진주 강씨의 조상들 진산 땅 밝은 정기를 받은 빛나는 씨족이며 나라를 위한 충성과 부모님을 공경하는 효도로 이름난 조상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도덕과 의리로써 번성한 문중이니 이제부터 우리 진주 강씨 일가들은 대대로 강 씨 문중의 친목을 지켜 가며 후천시대에 천일국 창건과 세계평화운동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는 이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총재님 양위분께 강 씨 문중이 정성을 모아 평화의 왕관을 봉정하고자 하오니 부디 감축하시고, 참석하신 어르신들께서는 행사가 원만히 진행되도록 많은 협조를 부탁드리면서 인사에 대신합니다.


성 어거스틴과 축복결혼을 시켜 주신 참부모님께서는 2005년 나에게 귀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귀한 가정에서 신앙적으로 잘 성장한 아들을 주시어 부모의 심정을 체휼하게 해 주셨으며 손주 강친남을 통해 인생의 큰 기쁨을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참부모님께서는 2011년 손주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면서 ‘강친남(康親男)’이라고 이름을 직접 작명해 주셨습니다. 이후 나의 생활에서 손주 친남은 너무나 큰 기쁨이자 자랑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귀여운 얼굴을 보면, 손주를 위해 더욱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참된 가정과 아들, 며느리, 손주를 주신 참부모님께 무한한 감사를 올립니다. 

양자 입적식 인사말씀

이렇게도 바쁘신 때 이 자리를 빛내 주시기 위하여 참석해주신 황선조 회장님, 이재석 회장님 내외분, 정대화 회장님, 특히 일본에서 오신 박인택 선생 가정을 비롯하여 이곳에 참석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마음속 깊은 데서부터 우러나는 심정으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특히 이 자리에는 강민구 군의 부모님이 참석해 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이 시간은 저희 어거스틴 가정에 강민구 군을 아들로 입적해 주신 하나님과 참부모님께 감사드리면서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많은 분들을 모시고자 했습니다만 워낙 바쁜 때이기에 폐가 될 듯하여 몇 분만을 모셨습니다. 
이 양자 문제는 수십 년 전 옥 씨 어머니께서 두 번이나 작은 어린 아이라도 얻어서 길러 봄이 어떻겠냐고 이야기한 때부터 제기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나 혼자 살기도 이렇게 힘든데, 남의 자식을 데려다가 고생만 시킬 텐데….’ 하는 생각에 거절했습니다.
지난 2002년 미 건국 226주년 기념일이었던 7월 4일 8천 쌍 축복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미국 워싱턴에 갔을 때 부모님께서 양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저녁 참부모님과 양 회장을 비롯한 간부 몇 명이 저녁식사를 하는 시간에 제가 애틀랜타에서 활동했던 내용을 보고한 이후에 참아버님께서 “현실이, 양자가 필요하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전에 참부모님께서는 누누이 천국은 부부가 자녀를 거느리고 들어가는 곳이라고 말씀하셨기에 저는 엉겹결에 “예, 필요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생각할 여지도 없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경죄에 걸리는 듯해서였습니다. 
그때 참아버님께서 종족 가운데 양자 될 사람을 세 사람 추천해서 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고는 “현실이, 또 큰 걱정거리가 생겼구나.” 하시면서도 그 자리에서 세 번씩이나 “양자가 필요하지?”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렇게 제가 양자를 들이게 된 것은 참부모님께서 동기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의 고향은 경상북도 영주입니다. 고향에서 민구 군의 어머니를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요즈음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어요.” 했더니 걱정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참부모님께서 종족 가운데 양자를 세우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강민구 군의 어머니인 김정희 사모의 이야기가 “그럼 우리 아들을 데려 가세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들을 내어 놓을 수 있습니까? 어려운 일일 텐데요.” 했습니다. 그러자 김정희 사모는 “참부모님께서 원하신다면 우리야 영광이지요.” 하고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1년 가까이 정성을 들였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해놓으신 좋은 아들을 보내 주실 줄 믿습니다.”라는 기도였습니다. 
그후 참아버님께 보고를 드렸더니 최선의 방법은 어거스틴 후손에서 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이메일을 통해서 찾아 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거스틴의 후손이 없으면 차선으로 강 씨 종족 가운데서 항렬로 보아 맞는 항렬을 찾아 양자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금년 1월에 참부모님께 민구 군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더니 “그거 좋구만!” 하셨습니다. “사실 항렬은 제가 하나 낮습니다.” 하고 보고 드리니 “3대까지는 괜찮다.”고 하시면서 결정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결정에 감사를 올렸습니다.
4월 2일부터 민구 군이 저의 집으로 와서 같이 생활하고 있는데 저는 부모의 심정 등 많은 것을 배우고 또 실감하고 있습니다. 제가 일본에 갔었을 때 “자기 몸으로 지었던 아담과 해와를 사탄에게 빼앗겼을 때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아프고 답답하고 원통하고 애타했을 것인가? 자녀를 잃어 버리고 서러워하시는 불쌍하고 억울한 아버지 하나님, 분통하고 한으로 가득차 계시는 아버지가 지금도 내 이름을 부르면서 찾아오고 계시는데 나는 이 아버지를 거역하고 배반하고 있지 않느냐?” 하고 말씀을 했더니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내 심정과 민구 군이 들어온 이후에 느끼는 차원은 많이 다릅니다. 이것은 이론도 교육도 아니고 진짜 내 피와 살 그리고 뼈 속 깊은 데서 우러나는 모자의 심정을 체휼했기 때문입니다. 참부모님께서 저에게 지상에 살고 있을 때 모자의 참된 사랑을 느끼고 영계에 가라고 이렇게 양자를 세워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못 느끼고 영계에 간다면 내가 설 수 있는 자리의 폭이 얼마나 좁으며, 또 그 비참함은 형언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서 드리는 기도는 어떤 형식이나 의식이나 제도나 법에 매여서 하는 기도가 아니고 진실로 피와 살, 뼈 속에서 폭발되어 나오는 진실한 기도입니다. 유독 고마우신 참부모님과 육신의 부모가 저에게 그 마음을 심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여기에 계시는 여러분들께서는 수십 년간 자녀들을 사랑해 오셨습니다. 저는 팔십이 거의 다 되어서 이 사랑을 시작했으니 이 짧은 기간에 수십 년 자녀를 사랑한 여러분의 입장에 서려면, 저는 그 몇 배를 더 사랑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며 퍽이나 바쁜 날들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여기에 머리카락 만큼의 조그만 불신, 불순, 불의가 섞이지 않고 진실된 것이 동기가 되고 과정과 결과도 참이냐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평생을 거짓 없이 살려고 애써 온 저는 그렇게 가식으로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민구 군이 온 이후로 제 마음이 참으로 기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민구야, 내가 요즈음 젊어지는 것 같구나.” 하고 말하니 민구 군이 “왜 그렇습니까?” 하기에 “네가 와서 내 마음이 이렇게 좋고 기쁘니 이것이 밖으로 표출되면 당연히 젊어지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앞으로, 뒤로, 옆으로 민구를 보아도 아주 귀엽게 보였습니다. 민구는 사실 도둑이 들어와서 다 가져가도 모를 정도로 잠을 잡니다. 그렇지만 옆방에서 아들이 잠을 자고 있다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든든하고, 왠지 기대고 싶은 자세가 되고 맙니다. 
특히 오늘 제일 먼저 하나님과 참부모님께 “감사합니다.” 하고 두 손 모아 경배드리고, 다음은 민구 군의 아버지와 어머니께 “감사합니다.” 하고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드립니다. 이 모두가 여러분들의 기도의 결과이기에 여러분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들을 26년간이나 길러서 어디로 보낸다는 것은 누구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오늘 이 두 분께 “안심하세요. 내가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희 가정에서 지금까지 지구상에 있었던 어떤 자식 사랑보다 훨씬 뛰어넘는 참사랑, 참부모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참사랑의 아름다움을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수 있는 꽃으로 피울 것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 어거스틴은 지금으로부터 1651년 전에 계셨던 분으로 명성을 남겼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우러러보는 참신앙을 해 오신 분입니다. 지금도 기독교 역사에서는 그의 어머니인 모니카를 아들을 훌륭하게 길러낸 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 후일의 역사가 성 어거스틴 가정에 강민구라는 아들이 입적되어 그의 어머니와 짧은 기간 함께 지내면서 참부모님을 사랑하고, 또 증거하는 증인으로서의 가정을 이루었고, 그 모자의 참사랑은 많은 사람들이 본받아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후손들 앞에 또 역사 앞에 영원히 자랑할 수 있도록 하렵니다. 감사합니다. (2005.4.22)

제 5 부 
참부모님이 가셨던 그 길을 가리이다

참부모님이 가셨던 그 길을 가리이다

언젠가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 문선명 선생이 이 땅 위에 안 나타났다면 어떻게 할 뻔했느냐? 내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내가 땅 위에 나타나서 역사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선명 선생이 이 땅 위에서 역사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땅에서 역사한 모든 것이 성사되고 성취되고 이뤄질 수 있게 되었으니 내게는 너무나 고마운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버님을 사랑하고 고맙게 생각하시는지 그때 나는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 기도 중에 받은 내용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버님을 얼마나 고맙고 기쁘게 생각하시는지 기도 중에 나타나서 저에게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했더니 아버님께서는 일본어로 “소레와 혼또니 소데아루요.”라고 하셨습니다. 한국어로 말하자면 “그것은 정말로 그렇다고요.”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는 “지금 해를 동쪽에서 서쪽까지 다 볼 수 있는 것처럼 참부모님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볼 때가 온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참부모님을 애타게 찾으러 다닐 때가 곧 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참부모님께서 전 세계 앞에 천지인참부모님으로 현현하시고, 하나님과 참부모님이 상봉하셔서 만왕의 왕으로 등극하시던 날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려 주신 대로 참부모님께서 모두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 통일교에서 ‘전도사’ 하면 강현실 회장이 떠오릅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식구들이 강회장을 생각하고 건강을 걱정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고마운 말이지만, 내가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책임을 다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말씀은 하시지 마세요.”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왜냐하면 통일교를 대표하는 전도사라고 하기에는 해 놓은 일이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으로부터 교회에서 여러 번 상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 1956년 아버님의 생신을 맞아 받은 ‘졸업증’이 나의 큰 자랑입니다. 그 졸업증은 제2회 원리시험을 보고 받은 것입니다. 1회에는 아버님께서 대전의 영통인이었던 권 장로를 만나러 가라고 하셔서 시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2회 때 시험을 보고 졸업증을 받았는데 1호가 김원필 선생, 2호가 유효원 선생, 그리고 3호가 강현실이었습니다. 그 졸업증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의 이름으로 아버님께서 직접 주신 상이라서 더욱 감격스러웠습니다. 아버님의 함자가 쓰여진 졸업증을 3호로 받았다는 것이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리고 1964년 4월 12일에 아버님께서 주신 ‘3년 노정 모범상’과 1968년 2월 4일에 받은 ‘7년 노정 대상’도 아버님으로부터 받은 상이라 기억이 납니다. 그 외에도 모범상과 표창장을 받았지만, 특별히 초창기의 어려울 때 받은 세 개의 상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승공연합에서 강의를 할 때 도지사로부터 받은 감사장도 몇 장이 있지만, 그것보다는 교회에서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표창장이 제 인생에 더욱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은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고 있기에 교역자들이 괴이한 예수를 전하고 있습니다. 기독 정신의 본질은 다 잃어버리고 형식과 제도만 취하고 있으니 하나님 섭리의 방향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이런 교회에 재림주님이 오신다면 또다시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가장 보수적인 종단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보수적인 법의 굴레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그런 내가 이렇게 주님을 만나고 새 생명을 얻었으니 이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기적입니다. 
참부모님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또 돈이나 학식도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참부모님은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내 삶의 중심은 오직 참부모님이십니다. 기도에도, 찬송에도, 생시에도, 꿈속에서도 참부모님뿐입니다. 먹어도 참부모님, 입어도 참부모님, 일할 때도 참부모님, 쉴 때도 참부모님뿐입니다. 참부모님보다 더 귀한 것은 나에게 없습니다. 
심정의 본체이시고 참사랑의 실체이신 참부모님, 내 마음속에 찾아오시어 사시옵소서! 불신하며 반대하고 돌아서던 마음에 새로운 심정을 주시고, 슬퍼하며 돌아서던 마음 위에 새로운 소망과 담력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참부모님, 이제 내 마음을 받아 주실 줄 믿습니다. 참부모님은 나의 근본이요, 힘이요, 위로요, 소망이요, 생명이십니다. 범사에 참부모님을 위하여 살겠습니다. 
참부모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지금보다 더 부유하고 명예롭게 살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나의 영인체는 사망의 길을 헤매며 방황하고 외로웠을 것입니다. 참생명과 참사랑, 참신앙을 하지 못하고 거짓된 생명, 거짓된 사랑, 거짓된 신앙 속에서 질식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첫째도 참부모님, 둘째도 참부모님, 셋째도 참부모님이십니다. 참부모님은 나의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참부모님께 맡기고 참부모님의 명령대로만 순종하면서 죽는 그 날까지 내 생명도 기쁨으로 드리겠습니다. 
이제는 내 나이 팔십이 훨씬 넘었습니다. 어느새 아버님을 모신 지 만 61주년, 새 생명을 가지고 산 지 환갑을 맞았습니다. 기력도 쇠하고, 육신은 약해졌지만 참부모님을 향한 내 마음은 더욱 뜨거워집니다. 언젠가 떠날 세상, 버리고 가야 할 육신에 대한 미련은 버리고 거룩하고 깨끗한 영인체를 위해 살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시험과 환란이 내 앞에 오더라도 나는 참부모님의 손을 잡고 앞으로 전진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자취가 없어지고 의미를 잃을 것이지만, 참부모님을 위하여 고생하고 충성한 것은 청사에 길이길이 빛날 것이며 영계에서 영원한 자랑이자 영광으로 보존될 것을 나는 압니다. 아직도 이런 사실을 모르는 이들에게 참부모님만이 영원, 불변, 유일, 절대의 가치이시며 진리이심을 전하고 싶은 마음 가득합니다. 
나를 비롯한 통일교 식구들이 참부모님과 원리에 좀 더 미쳤더라면, 오늘날 뜻이 좀 더 진전되었을 것입니다. 참부모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등극하셔서 인류의 천지인참부모님으로 정착하시는 날도 좀 더 단축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은 마음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결심은 수도 없이 하였으나 몸은 변명만으로 가득합니다. 육신의 나약함을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용서하옵소서! 나는 불초한 여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내 안에서 찾아 보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입으로 말은 하지만, 실상은 희미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과 생명으로 나의 심장이 뛰게 하시옵고, 나의 피가 끓어오르게 하시옵소서!”
나는 하나님과 참부모님께 늘 회개의 기도를 올립니다. 
“참부모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부족하기만 합니다. 말로는 식구들을 6천년 만에 만난 형제라고 하면서, 저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저들의 사정이 내 사정으로 느껴지지 않으며 저들의 아픔도 내 아픔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번민이나 고통이 나의 번민과 고통으로 감응되지 않았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저들의 눈물과 슬픔과 가난, 아픔이 내게 상관없이 다가오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참부모님께서 주신 참사랑을 따르고 실천하지 못하니 용납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회개의 기도를 매일 하면서 삽니다. 눈물과 한숨의 기도가 끊이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 나는 결심의 기도를 올립니다. “하나님, 참부모님! 내가 참부모님을 본받으려는 심정마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참부모님을 따라서 살려고 애를 쓰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과 참부모님께 미치지 못하는 부족한 영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눈을 감는 그 날까지 참부모님을 알고 믿고 본받으면서 살게 하시옵소서! 참부모님을 완전히 따르며 모시며 증거하게 하소서!”
이제 통일교 식구들은 천지인참부모님을 어떻게 알고 믿고 모시며 살 것인가 하는 문제만 남아 있습니다. 참부모님을 잘 모시지 못한다면, 통일교 식구들은 하나님 앞에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시대가 얼마나 절박하고 중요한 시기인가를 알고, 이에 맞춰서 마지막 이 기간을 후회와 부끄러움 없이 후대에게 남겨야겠습니다. 
통일교회는 살고자 하는 데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죽고자 하는 데서 출발한 것입니다. 오관의 모든 감각이 살아 있어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시체와 같이 되어 가는 길입니다. 아무리 때려도 맞으면서 참아야 하는 길입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경험 속에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옛날에 아버님은 아무리 무서운 시련과 고통이 덮쳐 오더라도 사탄 앞에는 굴복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많은 무시와 혹독하고도 무서운 핍박 그리고 짓밟힘을 당하시면서도 하나님의 위신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어기지 않으셨습니다. 아버님은 무서운 중노동을 하시던 자리에서도 누구에게 지지 않고 꺾이지 않으시고 억만 사탄과 싸워 승리하셨습니다. 
끝으로 나는 이것만은 알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다 왔다가 갑니다. 오래오래 이 땅에 계실 줄 알았던 아버님도 가셨습니다. 영계에 가는 데도 수속이 필요합니다. 즉 증명서가 필요합니다. 먼저 그 증명서를 어디로부터 받아야 합니까? “나는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뜻대로, 원하시는 대로 살았습니다.” 하는 승리의 증명서가 필요합니다. 그 증명서는 자기 자신이 만들 수 없습니다. 사탄이 만들어 줘야 합니다. 사탄으로부터 그 증명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3년 공생애 노정을 출발할 때 40일간 사탄을 불러내어 증명서를 받는 싸움을 했습니다. 그것이 3대 시험입니다. 천하제일의 모든 영광을 보여 주면서 ‘나에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면서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라.’고 했습니다. 그때 사탄은 예수님께 ‘당신은 민족적으로, 세계적으로 승리하셨습니다.’ 하면서 ‘내가 증명서를 만들어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머리를 숙이며 물러나고, 천사가 예수님께 수종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첫 번째로 사탄으로부터 증명서를 받고 난 다음에 예수님으로부터, 다음은 참부모님으로부터 증명서를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증명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소생적으로 인정을 받고, 장성적으로 결정을 받고, 완성적으로 ‘너는 참 나의 것’이라는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즉 너는 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도장이 찍힌 증명서를 받도록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아버님의 성화와 
우리의 자세
천기3년 천력 7월 17일(양력 9월 3일) 오전 1시 54분 참아버님께서 성화하셨습니다. 이재석 회장이 전화로 알려줬는데 꿈만 같았습니다. 인생은 다 세상에 왔다가 영계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거짓말 같았습니다. 그렇게 빨리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적어도 기원절까지는 문제없이 이 세상에 계시리라. 좀 더 욕심을 부린다면 100세까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영통인과 식구들이 아버님께서 이 세상에 오래오래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버님께서 오래오래 이 세상에 계시리라고 나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습니다. 
생시에 말씀하시던 모습, 음성, 내용, 그 중에서도 불호령을 내리시던 아버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내가 너무 꾸중을 많이 들은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잘못한 일들만 생각나서 “아버님, 참으로 잘못했습니다.” 하고 몇 번이나 회개했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훈독회 때 “강현실!” 하고 내 이름을 늘 부르셨습니다. 1999년부터 2012년까지 부르신 것만 해도 120여 회나 됩니다. 잊을 수 없는 내용은 “강현실, 내가 축복식 때마다 강현실을 축복해 주지 못해서 가슴이 얼마나 철렁철렁했는지 아느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한두 번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한남동에서 “이제 축복시키고 나니 나는 참으로 안심이 된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그 애절한 부모의 사랑을 주시는구나!” 하고 감사했습니다. 내가 순회를 갔다가 와서 보고말씀을 드릴 때면 진지를 잡수시다가도 입을 여신 채 그 보고가 끝날 때까지 진지를 잡수시지 않고 들으셨습니다.  
내가 아는 아버님은 완전히 뜻에 미치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 외에는 모르셨던 분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세계를 이루시겠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위해 미치셨던 분입니다. 그 거룩한 뜻을 기어코 살아생전에 이루고자 몸부림치신 파란만장한 일생, 이 강현실이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아버님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인 것같이 보인 것은 상대의 마음이 인간적으로 생각한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던 것입니다. 아버님을 인간적으로 생각한 사람이 있다면 그 생각을 고쳐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복을 받을 것이요, 또 후손들에게도 길이 열릴 것입니다. 
이렇게 내 마음이 아픈데, 아버님을 53년간 모셔 왔던 어머님의 마음이야 무엇으로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지상에 많은 여인들이 왔다 갔지만, 어머님만큼 크신 참사랑을 받은 이는 없었습니다. 가식이 없는 참사랑, 인류의 참아버지와 참남편으로서 해 주셨던 최대의 사랑을 받으신 분입니다.   
참어머님께서는 1960년 3월 27일(음력 3월 1일) 아버님과 약혼하시고 4월 11일(음력 3월 16일) 성혼식을 하신 뒤 고귀한 어머님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에게 있어서 성혼식 이후부터는 힘들고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 ‘아버님은 메시아, 구세주의 사명을 가지고 오신 분이니 어머님은 얼마나 행복하실까?’ 하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주의 어머니로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즐겁고도 기쁜 생활만 하실 것으로 식구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버님 자신이 구세주, 메시아의 입장에 서시기까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의 십자가를 지시고 외롭게 가시밭길을 헤매시며 피와 땀과 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리셨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님도 아버님이 통과하셨던 가혹하고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셔야 했습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사연들이 있었습니다. 역사의 비밀스러운 밑창에서부터 출발하여 완성이라는 최고의 높은 상봉까지 올라가서 승리하시기까지 너무도 힘이 드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은 한 마디의 불평이나 변명도 하시지 않고 굴하지 않는 인내로써 묵묵히 감수하셨습니다. 7년 기간에 내적인 면에서나 외적인 면에서 세상의 어떤 사람도 넘어갈 수 없는 시련, 비난, 핍박을 극복하시고 희생과 제물의 입장에서 아버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믿어 오셨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아버님이 바라시던 뜻대로 살아오셨기에 최후에는 모든 사람들이 어머님 앞에 서 머리를 숙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어머님은 가정의 어머니로서, 교회의 어머니로서, 천주의 어머니로서, 당당하신 참어머님으로서 보다 크신 책임을 완수하시고 모든 책임을 지시게 되었습니다. 
우리 어머님께서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은 하나님을 믿고 모시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모실 때 언제나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절대적으로 믿으십니다. 또한 절대적인 참사랑을 가지고 식구들을 사랑하시며, 무엇이든지 주고 또 주시려고 애쓰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어머님은 영적인 면에서는 아주 섬세하시며 민감하시고 정확하신 분입니다. 무엇이든지 어머님의 마음에 반영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언제나 아버님을 대하실 때도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복종하시던 어머님이십니다. 어머님의 생활 자체가 하나님과 참아버님, 인류를 위해 헌신해 오신 것이었습니다. 
어머님은 어떠한 때에도 자신의 소유라는 관념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무사(無私)의 생활을 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가지고 계시는 모든 것을 어머님 자신의 것으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과 천주의 것으로 생각하십니다. 아무리 귀중하고 비싼 것이라도 ‘이것은 내 것인데….’ 하고 생각하시는 소유관념을 초월해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든지 모든 것을 주고서 기뻐하시며, 또 누군가가 받아서 기뻐할 것을 생각하시며 무엇이든지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생활을 해 오셨습니다. 아버님께서 어머님이 그런 심정과 성격을 가지고 계심을 언제든지 감사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시던 것을 들었습니다. 어머님께서 그런 심정으로 생활하시는 것에 통일 식구들은 모두가 참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어머님의 앞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보였습니다. 그때 나는 깜짝 놀라서 “어머님, 어머님의 앞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보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어머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이것은 자연현상이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님, 저는 어머님의 머리카락은 언제나 검은 색이지 하얗게 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말씀드리자 어머님께서 웃으셨지만, 나는 며칠 동안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나는 아버님께서 오래오래 지상에서 우리와 함께하실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만 영계로 가셨습니다. 그날의 슬픔, 외로움, 아쉬움, 그리움을 차마 글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토록 인류의 참부모님 입장에서, 주인의 입장에서, 스승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셨던 아버지였습니다. 영계가 지상과 통할 수 있는 곳이어서 모든 사람이 왕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영계와 소통하는 자리까지 우리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 어머님께 세계 복귀의 모든 위업을 계승 완성하여 승리하실 것을 믿고 상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명을 상속받으신 어머님께서 오른쪽으로 향하실 때는 오른쪽 방향으로, 왼쪽으로 향하실 때는 왼쪽 방향으로, 몸을 바로 하시면 우리도 바로 하여 어머님의 심정과 하나 되고 뜻과 하나 되며 정성이 하나 된 자리에서 남아진 뜻을 완성해 드려야 할 과제가 남아 있음을 확실히 알아야겠습니다. 
우리 어머님께서는 과제를 다 이루시고도 남을 것입니다. 우리 통일의 식구들은 여기에 힘이 되어 드리며 우리를 통해서 승리하실 수 있도록 사생결단, 전력투구의 책임적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때때로 주위에서 신앙의 길이 힘들어 지친 식구들이 어려워서 더 이상은 못 가겠다고 쉬고 있는 경우를 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아버님께서 홀로 가시밭길을 헤치며 십자가를 지고 나오셨던 고난의 노정을 생각하면서 참고 나가자고 격려합니다. 아버님께서는 여섯 번이나 감옥에 가시면서 이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아버님의 옥중노정을 생각하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나 시험은 없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참부모님과 맺은 인연은 영원하므로 우리의 심정도 영원한 불변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언제나 감사하면서 살겠습니다. 내게서 물질을 빼앗아 가고, 건강을 빼앗아 가고, 또 내 모든 것을 다 가져간다고 하더라도 부모님을 만나 뵙게 해 주셨으니 영원히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남은 날들을 하나님 앞에 참효녀, 부모님 앞에 충성을 다하는 딸로서 살겠습니다. 그동안 부족하여 지은 죄가 많습니다. 모두 용서해 주실 것으로 믿고 참가정 위에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이 함께하시어 만대에 길이길이 빛나는 역사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라고 기도의 고백을 드리게 됩니다.





부  록
심정의 교류들




김원필 선생으로부터 받은 편지





현실 누님 앞
저는 염려 덕택으로 몸 성히 잘 있습니다.
부모님의 명으로 몇 분 순회사와 함께 약 천 명의 구라파 식구들이 산재하여 전도하고 있는 영국 전역을 매일 순회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입이 열리고 귀가 뚫릴 거라 희망하면서요. 그리고 ‘청파동에서 영어공부 하시던 때가 누님이 몇 해 되시던 때였지?’ 하면서 자신의 기억력이 너무 쇠퇴한 데 놀랐습니다. 아버님께서 3년이 지나니까 겨우 귀가 뚫리더라는 말씀에 힘입어 이제 겨우 외마디 하는 어린 아이를 연상하면서 ‘나는 한 살 난 아기다. 그러니 나에게는 어린 시절, 사춘기, 완성기가 있겠구나.’ 하니 더욱 어려진 것 같고 모든 식구들이 나의 선배같이 느껴졌습니다. 모든 것이 배울 것뿐이라는 마음으로 지난날 아버님을 처음 만났던 나를 회상했습니다. 
지방을 돌아보니 구라파 여러 나라 국제기동대원들이 하려는 일에 열심은 있으나 고양이가 소머리를 맡은 격이라더니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나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소상히 아버님께서 말씀해 주셨지만 새벽에는 기도방에 들어가 자기를 책하며 조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린 저의 마음에도 동정이 가는데 하늘의 마음이야 어찌 덜할 리 있겠습니까? 나는 저 기도를 유린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아버님의 지난날의 이야기와 우리 교회사에 최초의 개척전도와 개척교회의 첫 손가락이 되시는 누님의 이야기를 많이 해드렸습니다. 아버님께서도 말씀이 계셨지만 영국이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미국과는 달리 영국에서는 거의 반대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뜻을 남몰래 염려하시는 누님의 갸륵한 뜻이 어찌 헛되겠습니까? 섭리역사에도 언제나 누님 같은 심정을 지닌 소수의 무리에 의해서 전통의 토대가 되어 내려옴을 알 때 많은 무리보다 핵심이 있느냐가 더욱 문제시되리라 믿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초교파운동에 중점을 두고 밀고 나가실 뜻으로 이재석 목사님께 하신 줄 아옵니다. 존귀한 값으로 하늘 앞에 팔리운 몸이 어찌 자기주장이 있겠습니까? 가라 하면 가고 오라면 오고, 오직 순종의 도리를 다하는 데서 수많은 선지선열이 넘다 못 넘은 고개를 되씹으면서 오늘도 묵묵히 차 안에 몸을 싣고 순회의 길을 떠납니다. 
하늘의 그리고 아버님께서 당신을 맞아 줄 한 사람을 찾아 온 세상을 두루 다니시며 내쫓김도 잘 자리 없어 추운 들에서 먹을 것 먹지 못하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그래도 맞아줄 한 사람을 찾아 헤매시던 그 길을 연상하니 내가 마치 아버님이 된 것처럼, 하나님이 된 것처럼 서러웠습니다. 
몇 번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였으나 ‘정성 된 식구 앞에 하늘이 아끼고 키우신 한국 식구를 대할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었는가?’ 그 생각이 날 때마다 가고 싶다는 마음 감히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러다가도 영영 못 돌아가는 것일까 하는 불안마저 느낍니다. 내가 이전에 집사람과 아이들과 한 집에 살 때는 밤낮으로 쉽게 만났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책임 다하지 못하고서는 함부로 만날 수 없는 하늘 같은 분들처럼 느껴졌을 때 하늘이 기뻐하시는 내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곤 하였습니다. 
건강은 어떠세요? 병이 없어도 쉬이 피곤이 오고, 피곤이 왔다 하면 쉬이 풀리지 않는 때이오니 무리하지 마시고 건강에 유의하심을 비옵니다. 마음이 거리끼는 일을 못 하시는 성품이시니 꾀를 부릴 줄 모를 것이고, 그러다 보면 꼭 무리하시기 마련이시니 각별히 주의하십시오. 정의 씨네 가정도 잘 있는지요? 안부 전해 주십시오.
한국은 무더운 날이 계속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곳 영국은 여름이라는데도 길에 나가 보면 털옷이나 오바를 입고 다니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전혀 더운 줄을 모르고 지내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1시가 되어서 잠자리에 드시는 일이 한국에서나 꼭 같으십니다. 어머님의 해산 후의 조리는 좋은 편으로 많이 원상회복되셨습니다. 아버님께서 아기님들 보고 “아버지는 직업이 늘 늦어진다.” 하시는 것을 볼 때마다 아기님들 보기에 죄송스러웠습니다. 하루 빨리 나라 일이 잘 되어서 세계에 나오셔서 범냇골에서 말씀하셨던 약속을 이루어 받는 날이 누님 위에 함께하시기를 빌면서 이만 난필을 놓나이다. 

1978년 8월 12일 김원필 올림
유효원 선생으로부터 받은 편지





현실 씨
글월을 드린다는 맘이야 날마다 품었던 것이었지만 이 시간에야 붓을 들게 되니 미안한 생각이 앞섭니다. 유난히 더운 이 여름철을 혼자 싸우시느라고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이제는 식구도 많이 늘었다고 하니 좀 활기가 펴질 것입니다. 
얼마 전에 아주 씻은 듯이 맑은 얼굴로 현실 씨가 나타난 것을 보았습니다. 아직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채 가슴에 묻어두고 있습니다.
지난 31일에 효영이가 공사하던 광산에서는 노다지가 터졌으니 아버지 약속하신 재물의 축복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제 인재가 많이 들어온다고 하는데 어서 인재, 물재가 많이 들어와야 할 것입니다. 현실 씨 고생하신다고 아버지 많이 걱정하십니다. 끝내 참고 견디어 약속하신 영광의 날을 맞으십시오. 옥 씨 어머님이 여행의 길을 떠나십니다. 지금 많이 외로운 중에 계시오니 위로하여 드리기 바랍니다. 참말 매일 바쁩니다. 짧은 글이오나 그 중에서 많은 의미를 깨닫기 바랍니다. 날마다 강녕하시어서 잘 싸우십시오.

1956년 9월 3일 유효원
이재석 목사님으로부터 받은 편지





강 선생님
그간 바쁜 나날을 보내셨을 줄 압니다.
자주 편지 보내 주셨으나 언제 떠나실지 몰라서 회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New Hope의 그 소식 정말 반갑습니다. 
참부모님께서도 안녕하옵신지요. 저와 저의 직원들은 두루 평안하며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큰 실적을 세워 참부모님께 기쁨을 돌려 드리고, 또 뜻 성사에 크게 헌신해야 하겠는데 참으로 걱정입니다. 
참부모님의 사랑 많이 받으시고, 또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1980년 9월 12일 이재석  
김영운 선생이 참부모님께 올린 편지





참아버님 참어머님께 드립니다. 
아버님 어머님 만수무강 만수무강 하시기를 영운은 두 손 모아 빕니다. 자녀님들께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함께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불효 딸 영운은 35년간 참부모님의 크신 참사랑 속에서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저는 참부모님으로 인해서 영과 육이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입교할 때도 건강치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부모님의 은혜로 지냈다는 것을 더욱 절감하옵니다. 
돌이켜 볼 때에 그간 뜻 생활에서 잘한 점보다 못한 점이 더 많은 것 같아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버님 뜻을 위하여 사심 없이 염려하며 또 아버님을 증거하느라고 동분서주했던 지난 날들이 정말 그리워지옵니다. 
아버님 지난 번 전화로 주신 말씀을 저의 마음에 지금도 귀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영운 씨, 나 만나서 고생도 많이 하고 수고 많이 했지? 내가 다 알고 있어. 또 내가 모든 것 다 용서해 주었으며 내가 알아주면 되지 않아?”
아버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 기력을 다 잃고 나니 일할 수 있었을 때 좀 더 많이 일하지 못했던 것이 참으로 후회스럽습니다.
저는 참부모님께서 만국의, 만민의 참부모님으로 나타나시며 만왕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그 날을 소망했습니다. 참부모님께서는 이미 영계를 원리로 통일해 놓으셨습니다. 저는 영계에 가서 흥진님을 중심하고, 또 앞서가신 식구들과 함께 영계의 통일된 기반 위에서 원리강의를 하겠습니다. 저는 영계에 가서도 할 일이 너무도 많은 것같이 생각되어집니다. 지금까지 지상에서 원리를 알지 못하고 간 모든 석학들에게 참부모님을 바르게 증거해 드리겠습니다.
35년간 길러 주시고 지켜 주셨던 참부모님의 그 놀랍고 크신 은사, 진실로 저의 마음에 사무쳐 오는 감격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저 머리 숙여 눈물로써 감사드립니다. 
참부모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저는 참아버님을 하나님 아버지의 실체로, 참어머님을 하나님 어머니의 실체로 확신합니다. 자식이 부모와 함께 지내고자 함은 천리입니다. 영계에 가서 부모님 주변에서 모시고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지상에서 정성들여 모셔 드리지 못했던 것, 영계에 가서 참부모님의 참자녀로서 도리를 다하겠으니 받아 주세요.
참부모님 생전에 지상 인류가 참부모님에 의해서 해방받고 축복받기를 두 손 모아 빕니다. 참부모님께서 하셨던 크신 역사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소원하셨던 일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너무 참부모님을 좋아하시고 계십니다. 
참아버님 참어머님, 자꾸 부르고 또 부르고 싶습니다. 영계에 가서 지상에 속히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전력을 기울여 저는 꼭 협조하겠습니다. 
참아버님 참어머님, 지극히 적은 것입니다만 생전에 참부모님께 드리고 싶어서 드리오니 저의 정성을 받아 주세요. 
다시 뵙는 그 날까지 참부모님, 만수무강하시며 승리의 깃발을 이 지상에 꽂으시며 천주의 부모님으로 나타나시옵소서!
참아버님 참어머님, 안녕히 계세요.

1989년 7월 28일 여식 영운 올림
(강현실 대필)


김영운 선생은 성화하기 전 기력이 부족하여 나에게 참부모님께 드릴 편지를 대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대필한 편지를 읽어 드렸더니 “늘 동생같이 생각해 왔던 현실 아우,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 내용을 잘 써 주어서 참으로 만족합니다.”라며 감사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계에 가서 참부모님을 많은 영인들에게 전하자고 둘이서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저세계에 가서 반가운 얼굴로 만나자고 이 편지를 들고 서로 인사를 했습니다. 
김영운 선생은 대학에서 퇴직을 당한 후 미8군에 취직하여 첫 월급을 받았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김 선생은 첫 월급을 받은 기념으로 참아버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흑석동까지 택시로 모시려니 택시비가 많이 들기에 택시 대신 전차로 모셨답니다. 그런데 그만 전차 안에서 소매치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전차를 탈 때 월급 받은 돈을 지갑 안쪽에 넣고 택시비는 그 옆쪽에 넣었는데 소매치기가 그 택시비를 가지고 간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김 선생은 크게 회개하면서 ‘내가 왜 아버님을 전차로 모셨을까?’ 하고 후회를 하며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회개하고,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답니다.
또 김영운 선생은 영적으로 특별히 민감한 분이셔서 교회에서 식사를 하면 소화가 잘 되는데 집에 가면 소화가 되지 않아 병원으로 가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김 선생은 이불을 싸 가지고 와서 교회에서 사셨습니다. 아버님께 이 말씀을 드렸더니 “영운이는 특별히 하나님이 사랑한 사람이기에 하늘이 직접 역사를 많이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참아버님의 표정은 ‘이 뜻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작은 일부터 큰 일까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김영운 선생으로부터 받은 편지





현실 씨
오늘 고대하던 편지 받았습니다.
바쁘신 중에 그 회답을 보내 주셔서 몹시 감사했습니다.
제 일신을 못 받으셨다니 이 글을 곧 써서 보냅니다. 다름 아니고 정석온 씨의 연세와 그분의 어머니 김성도 씨가 어느 해에 출생하고 어느 해에 타계하셨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김백문 씨에 대해서는 그만하면 됩니다. 
그런데 백문 씨가 직접 못 받았지만, 그분이 가르치던 진리의 내용이 어디에서 왔을까요? 몹시 궁금한데, 이기완 씨에게 한번 물어 보세요. 그리고 유명화 씨가 한국 재림을 받았다는데 확실한 말입니까? 
선생님이 이곳에 오시면 자세한 것을 여쭈어 보겠지만 현실 씨에게 알아보아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한준명 씨를 만나는 일은 그리 필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유명화 씨가 받은 계시 내용을 좀 더 확인할 수 있다면 유익한 일이겠죠. 
가을 학기가 12월 15일에 끝나면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가서 겨울 석 달을 지내게 됩니다. 수고스러우신 대로 교회에 가시면 석온 씨와 기완 씨에게 조용히 위에 몇 가지를 물어보아 주세요. 
이번에도 크게 축복이 있으신가요? 조찬회의 결과는 어떠한 것이며, 탁명환 씨의 공개사과 여파는 어떠한 것입니까? 교계에서 다소 태도를 달리하는 경향은 없는지요? 백문 씨 집단의 이름이 이스라엘 수도원이었던가요?
요새 우리 교회 분위기는 어떠합니까? 활기가 많이 생기고, 열심히 일들 하시겠지요? 축복결혼식 때문에 굉장히 바쁘시겠지요?
그럼 늘 건강하세요.

김영운 배상
박봉애 회장이 보내 준 편지





그리운 현실 씨!
떠나온 지 도 20일이 됩니다. 시차로 인함인지 아직도 머리가 흔들리고 몸이 정상이 아닙니다.
그동안 승리의 영광을 안으시고 귀국하신 부모님을 맞아 얼마나 감격과 감사의 환영대회를 가지고 기뻐했습니까? 동참하지 못하고 떠나온 이 몸은 지난 주일 미국인 교회에서 일본·한국교회 전국예배를 보고 이성수 교구장님의 보고를 들으면서 그리움을 달래면서 집으로 왔습니다. 
최금순 씨가 주일이면 교회로 안내해 주어서 오랜 식구들도 만나고 반가워했습니다. 금순 씨는 며느님이 출산을 한다고 하며 뉴욕으로 떠났는데 아들 손자를 보았습니다. 위로 두 아들은 뉴욕 가서 대학을 다니고 집에는 다섯 아들과 두 딸을 데리고 생활하는데, 그 아홉 남매만 바라보아도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복 받은 분입니다. 6월쯤 뉴욕으로 이사를 한다고 하여 섭섭하기도 합니다. 남편은 없어도 일곱 아들이 아버지처럼 잘 자라고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더군요.
어제 최계순 씨가 왔다고 전화를 주어서 다음 주일에 만날 것을 기대합니다. 오랜 식구들과 일요일에 만나는 것을 낙으로 알고 손꼽아 기다립니다. 너무도 맑은 공기, 조용하고 아름다운 환경, 교통난이 무엇인지 느끼지를 못하고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은 축복받았어요. 집 주위의 아름다움이 바로 산책하는 오솔길이고, 이름 모를 작은 새들이 날아다니는 것이 심산 속에 들어온 듯합니다. 친구만 있다면 별천지일 것 같습니다.
서울의 탁한 공기와 소음, 복잡한 교통을 생각하면 오히려 죄송함을 느낄 정도입니다. 그동안 특별히 사랑해 주시고 아껴 주시던 현실 씨의 따뜻함을 날이 갈수록 더욱 그리움으로 느끼게 됩니다. 
3년이 지나야 한국을 가 보게 되었으니 외로움과 그리움을 씹으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더욱 활동하셔서 종교 통일은 한국 여성의 힘으로 높은 깃발을 들고 앞서시기 바랍니다. 
이곳은 부인 식구들이 얼마 없습니다. 있는 힘과 정성을 다 쏟아 보려고 하나 아직 여건이 허락지 않아서 자신은 없습니다마는 힘껏 해보려고 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더욱 정열을 불태우셔서 유일한 통일교회의 여걸로서 앞장서시기 바라오며, 성녀회 간부 여러분의 사랑의 옷을 입을 때마다 나도 힘을 내려고 합니다. 
부디 안부 전해 주세요. 이만.

1987년 박봉애 드림 
김필교 선생이 보내 준 편지 





강현실 어머님께 드립니다. 
이름모를 새소리와 더불어 창가에 조용히 찾아오는 밤을 환영하면서 펜을 들었습니다. 제대로 쉬시지 못하시면서 옛날부터 마냥 뛰시는 어머님을 생각해 봅니다. 언제나 다정하시던, 마치 아버님을 뵙는 기분을 갖도록 하여 주시던 바로 어머님이십니다. 필교는 너무나도 부족함 속에서 계속 일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아버님을 가장 많이 위로해 드릴 수 있을까 생각은 하지만 아직 최상의 답을 얻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식구님들을 대할 때마다 부족함을 실감하곤 합니다. 항상 부족의 구덩이를 메우느라 안간힘을 쓰지만 쉬이 채워지지를 않는답니다. 
원리강의 때나 말씀을 대신해야 할 때면 마치 초죽음을 당하는 기분을 느낍니다. 아직 한 번도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의 말씀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부족한 실력에 원리강의를 해야만 하는 입장이니 하늘아버님만 의지할 뿐입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제대로 밖에 나가서 전도활동을 하지 못합니다. 인연된 식구님들을 붙들고 몸부림을 칩니다. 너무나 외딴 집이라 밤이면 간이 마치 콩알처럼 작아지기도 했습니다. 
3일 전부터 처녀 식구가 같이 와서 저의 생활을 돕고 있습니다. 외적 환경에 대해서는 통일교회의 목회자로서는 너무나 과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이미 가정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왔으니 여기서 후퇴하지 않고 최고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할 생각입니다. 
13일이면 20여 명의 기동대원들이 와서 17일까지 5일간 활동을 합니다. 아직 작은 개척교회로서는 크나큰 잔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밤에는 기동대원들을 맞이하기 위해 식구 4명과 철야를 하였습니다. 이 교회에 청년회, 유년회, 학생회 등 여러 모임과 조직들이 생기기를 꿈꾸면서 계속 쉬지 않고 정성을 쏟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식구들이 입교한 지 6개월 미만의 식구들이고 1개월 미만인 식구들도 많습니다. 주일 낮 예배는 2~3명이 참석하지만 밤 예배는 십여 명이 넘는 식구들이 참석합니다. 
이토록 부족한 필교가 친히 주시는 서신을 받을 수 있는 것도 감사한데 한번 오시겠다고 하시니 무어라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기대하시는 바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이달 말이면 아마 서울에서 우리 동지들이 같은 자리를 마련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쉽게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이끄시고 수고하시는 순회사님 앞에 하늘의 가호가 계시옵기를 빌면서 펜을 놓습니다. 

1973년 3월 6일 김필교 올림
박신재 목사로부터 받은 편지




존경하옵는 강 회장님께
회장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본격적인 무더위 속에 어떻게 지내시옵니까? 한국은 참부모님을 모시고 피스킹컵 축구 행사로 매우 은혜로운 순간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곳 모스크바도 요즈음 30도 가까운 무더운 날씨가 연속되고 있지만 햇빛이 부족한 나라이기에 누구 한 사람 파라솔을 쓰는 사람 없이 여름 햇빛을 즐기고 있습니다. 
대모님 행사는 천여 명의 식구들이 새 건물에서 모인 가운데 매우 성공적으로 마쳐서 대모님 일행도 매우 기뻐했습니다. 이제는 받은 은혜에 힘입어 모든 식구들이 하계 전도활동에 총동원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거행되는 세계문화체육대전과 축복행사 준비를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초종교체육대회를 위해 100명 이상의 선수를 한국에 보냅니다. 그리고 세계정상회의에 보낼 지도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겹친 행사로 식구들의 경제사정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보낼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얼마 전에 손자를 보았습니다. 이름을 박성훈(朴成訓)이라고 지었습니다. 회장님께서 축도해 주셔서 순산했다고 합니다. 
회장님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나날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행사 때 한국에서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5년 7월 20일 박신재 올림
석준호 회장으로부터 받은 편지



안녕하십니까? 천일국 창건을 위해 수고하시는 회장님 가정에 천지인참부모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참부모님께서 여러 국가로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셨으며 행사 후에는 많은 호의적인 언론보도가 있었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많은 젊은 식구들을 보시고 기뻐하셨으며 동북대륙의 식구들이 세계섭리를 위해 크게 기여해 줄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10월 21일 우크라이나에서는 평화경찰과 평화군을 정식으로 조직하시고 출범하셨으며 평화군 활동에 모범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참부모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 가운데 동북대륙 순회를 승리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것은 회장님의 크신 정성과 적극적인 협조의 결과라고 생각하며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지금은 11월 말경에 있을 중국 대회를 준비하고 있으며 참부모님을 러시아에 모시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동북대륙 국가들이 속히 선교기반을 확보하고 국가 복귀를 이루어 세계 섭리에 기여할 수 있도록 회장님의 지속적인 협조와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이번 대회를 위해 물심양면의 정성을 다해 주신 회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더욱 충만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5년 10월 29일 동북대륙회장 석준호 올림
박정민 권사님이 보내 주신 편지 





귀하고 또 귀하신 강현실 회장님

무슨 말씀을 먼저 드려야 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만사제외하고 통일교 안에서는 강현실 회장님이 제일 귀하신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무도 전도되지 않았을 때 참부모님께서 친히 제일 먼저 전도하신 믿음의 따님이시니 얼마나 귀하신 분입니까? 그리고 또 참부모님을 친히 모시면서 손등이 터져 피가 나면서 물동이에 물을 길어다가 진지를 해 올리면서 사시지 않았습니까? 또한 전도하러 다니시면서 주무실 곳이 없을 때 산에 가서 기도하시며 하늘의 인도하심을 받아 산에 기도하러 온 사람들을 만나 전도하신 전도사님이 아니었습니까?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전도사님을 생각하면서, 이 늙은 사람이 일정기도회 권사들과 같이 은혜를 기억하면서 기도드립니다. 
330만 원이라는 돈이 보통 돈입니까? 또 모든 권사들에게 한 사람마다 각자 3가지나 보약을 주셨지요? 그래서 우리 권사들이 협회 건축할 때 그 돈을 일정기도회 이름으로 헌금하고 십일조도 내고 기도회 회비로 내고 그랬습니다. 지금도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회장님을 위해 기도를 드립니다. 두고두고 기억하며 영원히 그 마음, 그 사랑 하나님 앞에 영광 받으시리라 생각하옵니다. 
전 세계 통일교회 안에서는 제일 귀하시고 공로가 많으신 분으로 기록되신 귀하신 분이니 얼마나 복이 많으신 분입니까? 장하시고 훌륭하시고 존경할 수밖에 없는 분으로 모시는 마음입니다. 더욱 참부모님께 영광 높이 돌려 드리시고 모든 일에 뜻하신 바 대승, 대성공 하시옵소서. 
만수무강·만수무강·만수무강, 만사형통·만사형통·만사형통 하오소서.
진실한 심정으로 간절히, 간절히 두 손 모아 공손히 비옵니다. 

2008년 9월 13일
박정민 드림


전 브라질 협회장 사모 김명순 씨가 보내 준 편지





강현실 회장님께

존경하는 강현실 회장님, 아니 사랑하는 현실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요.
베란다에 앉아서 천정궁을 바라보며 어머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리운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늘부모님의 참사랑을 우리들에게 상속시켜 주시려고 한평생 희생의 길을 걸어 오시면서도 항상 기쁘게 감사하며 생활하신 우리 참부모님!
언제 우리는 참부모님처럼, 참어머님처럼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언니, 기억나세요? 어느 날 자르딘에서 아버님과 언니가 같이 식사를 하실 때 조명원 언니와 함께 제가 거실에 같이 들어갔었는데, 아버님께서 갑자기 “같이 먹자!”고 하셔서 저는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몰라요. ‘불청객’으로 그곳에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저의 마음을 읽으신 아버지가 갑자기 “누가 기도할까?” 하시더니 “명순아, 네가 기도해라!” 하셨어요. 그리고 식사 중에 김윤상 원장님께서 들어오셔서 “아버님, 보기가 좋습니다.”고 하셨죠. 그러자 아버님께서 대답하시길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너희들도 식구들을 이렇게 사랑하길 바라기 때문이야.”라고 하셨습니다. 그 일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현실 언니!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또 기억나네요. 살로브라호텔의 부모님 공관을 국가메시아들이 방문하셨을 때 언니가 저에게 300불을 주시면서 “부모님께서 주신 돈인데 나눠 갖자!”고 하셨어요. 그 말씀이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아버님께서 가장 우리에게 바라셨던 것은 ‘형제끼리 사랑하고 용서하고 위하여 사는 모습’이었지요. 
참아버님께서는 천상에서만 계시지 않고 우리 속에 같이 계시겠다고 하셨지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곳에 아버지가 계신다고 하신 말씀을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언니, 사랑해요!

2013년 천력 7월 17일(양 8.23) 새벽 
명순 올림
 


목숨 걸고 전도하신 용감하신 양윤영 선생님 





나는 통일교회 식구들 중에서 남한에서 제일 먼저 아버님께 전도된 사람이고, 양 선생님은 서울에서 제일 먼저 아버님께 말씀을 들은 분이십니다. 1954년 4월 유효원 선생이 부산으로부터 서울에 와서 제일 먼저 전도한 분이 양 선생님이십니다. 
양 선생이 원리말씀을 듣고 너무너무 감동을 받아 자기가 아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서울 북학동에 재림주님이 오셨다고 자신을 가지고 서슴없이 외쳤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이들은 양 선생을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으로 보기도 했답니다. 그래도 양 선생이 인도한 많은 학생들과 지인들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북학동의 그 초라한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양 선생은 숭의여고 출신입니다. 그때에 양 선생은 숭의여고 교장이었던 이신덕 씨에게 말씀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처음부터 주님이 오셨다는 말씀부터 전하니 이신덕 씨가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만나 주지도 않았습니다. 양 선생이 그런 상황을 아버님께 보고 드리자 아버님께서는 “강현실이 가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택시를 탔지만 그 댁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아버님께서 야단 치셨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아버님께서 그렇게 무서운 분인 줄 몰랐습니다. 너무너무 혼을 내셔서 나는 그만 ‘주님이 이렇게 무서운 분인 줄 몰랐다.’면서 소리 내어 엉엉 울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순한 어조로 다시 찾아가라고 하시며 길을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집을 잘 찾아 말씀을 전했으나 내 이야기를 다 듣지도 않고 쫓아냈습니다. 결국 나도 미친 사람 취급만 받고 울면서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양 선생은 적극적인 분이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참아버님을 증거해서 아버님이 좋아하셨고, 아버님을 기쁘게 해 드린 분이었습니다. 양 선생님이 입교한 후 몇 달 동안 한 사람도 전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전도가 되지 않을 때 양 선생님은 “주님이 이미 한국 땅에 오셨는데, 다들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꾸짖으며 전도를 했습니다. “지금 주님이 이 땅에 오셨으니 오신 주님을 믿고 그 뜻을 펼쳐야 할 때”라고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그런 양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이것은 양 선생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하늘이 답답하셨으면 강의를 들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양 선생님을 앞장 세워 역사하셨을까?’ 하는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양 선생님은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하는 자녀보다 뜻을 더 중히 여기신 분이셨습니다. 자녀를 고아원에 보내 놓고 자녀 생각에 홀로 울며 밤을 지새운 날이 그 얼마였던가? 자녀들을 생각하면 미칠 것 같다가도 날이 밝으면 또 다시 동분서주하며 전도에 온 정열을 다 쏟느라 자녀를 생각할 틈이 없으셨던 양 선생님, 참으로 뜻에 미치신 분이었습니다.

양 선생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주님을 모시고 있는 것은 세상의 어느 것보다 가장 가치 있는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이 가장 값진 재산을 얻기까지 양 선생님은 가난과 싸워 이기셨고, 핍박과 싸워 이기셨으며, 형언할 수 없는 수모와 굴욕을 극복하셨습니다. 양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과 참부모님께서 사랑하시고 사람을 사랑하시는 심정의 소유자이셨기 때문에 통일가 식구들의 본이 되신 분이기도 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자랑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양 선생님이셨습니다. 

행사 때면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참부모님과 식구들을 기쁘게 해 주신 효녀이시며 여걸이셨던 양 선생님, 어제 같은데 60여 년이 지났습니다. 영계에서 만납시다. 

1989년 강현실 드림


구정숙 권사님 추모사





36가정 구정숙 여사님
1991년 중앙대병원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구 권사님, 구 여사님의 생전 모습을 한 번 회상해 봅니다. 
구 여사님을 뵙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1956년 초가을 대전시 대흥동에서였습니다. 저는 그때 한 사람의 식구도 없던 대전에 내려가서 개척할 때였습니다. 35년 전 개척전도는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40일간 하루에 대전시를 일곱 바퀴 돌면서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성도들을 보내 주십시오.” 하고 눈물로 기도했을 때였습니다. 마침 그당시 부군인 김인철 선생께서 미창지점장으로 대전에 전근을 오셨습니다. 
저는 그때 지성이면 감천이요, 또 정성들인 공은 무너지지 않으며 전심을 하나님께 향하고 구하면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이 두 분을 만났을 때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하나님이 보내 주신 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또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두 분의 첫 인상은 법이 없어도 사실 수 있는 착한 분으로 보였습니다. 그때 저는 구 여사님 앞에서 정성껏 말씀도 하고 원리강의도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말씀을 들은 소감이 어떠하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구 여사님께서는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다만 주인 되시는 김 선생이 좋다고 하신다면 이 뜻길을 가겠습니다. 나는 아무 이유 없이 무조건 이 길을 갈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천품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통일 식구 그 누구에게나 구 여사님에 대해 물어보면 온순하시고 자애로우시며 양보심이 많으시며 이해심이 깊으신 분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한 구 여사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시던 분이었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스쳐 보내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나는 고생을 하고 또 없이 살아도 식구들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주기 좋아하셨습니다. 특히 손님 대접하기를 즐기셨던 분이었습니다. 뜻길을 가면서 한 번도 자신이 했다고 뽐내지 않으시고 자랑하지도 않으셨으며 조용히 남들이 모르게 스스로 하나님만이 아시는 길을 가셨습니다. 마음속으로 참부모님께 효성을 다하시면서 걸어오신 분이었습니다. 
오늘 하늘나라로 보내는 아쉬움을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습니다. 나는 구 여사님께 너무도 많은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영계에 가서도 “참 고마웠습니다.”라고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구 여사님 댁에 가서 아침 저녁을 대접 받으면서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가시는 길 부디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좋은 천국을 이룬 자로서 승리의 길로 가시기를 바라면서 추모사를 대신합니다. 
1991년 강현실 드림 
최정순 권사님 추모사


최정순 권사님 영전에 드립니다. 
최 권사님, 천국을 향해 가시는 길 즐겁게 가세요. “최 선생님” 하고 이렇게 부릅니다만, 대답이 없으신 것을 보니 참말로 유명을 달리하셨군요. 그렇게도 정답게 대답해 주시며 언제나 웃는 얼굴로 여러 면으로 지도해 주셨던 저에게는 참으로 잊을 수 없는 많은 추억을 안겨 주셨음을 오늘 이 영전 앞에서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립니다.
2000년 8월 24일, 87세로 천국을 향하시는 최정순 권사님! 그렇게도 사랑하시며 정성을 다하여 훌륭하게 길러 세운 네 따님들과 사위님들, 손자손녀들, 또 평소에 최 권사님을 존경하고 사랑해 왔던 믿음의 자녀들, 협회장님과 많은 식구들이 천국 가시는 장도를 환송하기 위하여 여기에 모였습니다. 여기에 많은 화환들도 가시는 길 앞에 함께 웃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또 그 위에 하나님과 참부모님이 영적으로 이곳에 오시어 ‘내가 사랑해 왔던 내 딸아!’ 하시며 환송하고 계실 것으로 믿습니다.
먼저 참부모님께서 최 권사님의 성화 소식을 접하셨을 때 생각이 많으셨을 것입니다. 뜻 앞에 누구보다 정성을 다하여 모든 것을 투입했고, 또 학교로부터 희생을 당했던 시절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최 선생님은 통일가의 역사 앞에 길이길이 본이 되시는 자취를 많이 남기셔서 참부모님께서도 감동하셨던 일들이 많았습니다. 1965년 10월 28일 참부모님께서 춘천교회에 순회오셨을 때 ‘人類之尊貴 天父之心情(인류에게 존귀한 것은 하늘부모의 심정)’이라는 휘호를 받으신 적도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참부모님께서 좋은 곳, 밝은 곳, 귀한 곳으로 권사님을 환송하고 계십니다. 
최 권사님의 일생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일제시대의 무서운 압박 속에서 멸시와 굴욕과 천대를 받으시면서도 신앙을 지키려고 많은 눈물을 흘리시며 정성의 제단을 쌓으셨습니다. 
해방 이후 잔인무도한 공산 정권 하에서도 자유를 그리워하시고 정도의 길을 가시며 언제든지 “나라와 인류를 위하여 무엇을 하오리까?” 하시면서 기도해 오신 생애였습니다. 
최 권사님은 1955년 3월 1일에 최원복 선생님의 인도로 입교하셨습니다. 그때 식구는 다 합해도 50명이 채 되지 않았으며, 교회는 흥인동에 있었습니다.
최정순 권사님을 제가 만나게 된 것은 1955년 봄이었습니다. 그때 첫 인상은 예수를 잘 믿고 있는 신앙인이며, 또 강직하고 끈기 있으시면서도 겸허하게 보이셨습니다. 거기에다 지성미가 가득한 평화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에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고 편안하게 해 주는 내용을 지니고 계시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때 최원복 선생님이 희색이 만면에 찬 모습으로 최정순 권사님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이화여전을 나오시고, 또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위하여 사시는 분이며 기성교회에서도 봉사생활을 많이 하신 분이시라고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때 소개해 주시던 최원복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최정순 권사님이 그러한 자랑을 받으실 자격을 가지시고도 남음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최 권사님은 감리교회의 권사님으로서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며 열심히 주님을 믿고 형제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드리고도 아까워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교회에서 신앙 형제들로부터 신임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살아오신 분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초창기였기 때문에 어느 누가 입교했다고 하면 기쁜 마음보다 ‘이 길은 순탄한 길이 아닌데 과연 이들이 이 모든 어려움과 고생 그리고 핍박을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동정과 눈물이 앞서서 측은한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때 권사님은 거의 매주일 원주에서 서울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심령이 서글퍼서 혼자서 너무너무 외롭기 때문에 아버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최 권사님과 악수로 인사할 때마다 말씀은 하지 아니해도 무언으로 서로 주고받는 큰 힘이 작용했습니다. 그 만남의 악수와 티 없이 순수한 웃음은 형식이나 의식 혹은 어떤 제도에 매어서 할 수 없이 하던 악수가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피와 살에서 우러나오던 진실된 참사랑의 악수였습니다. 옛날의 독립군들은 한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바쳤는데, 우리는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그 세계를 찾아 세우기 위하여 소명 받은 사람들이니 무엇을 아까워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참된 주님의 말씀으로 어두운 땅을 환하게 밝히는 하늘의 역군들이요, 하늘의 밀사라고 하면서 손을 잡고 그 날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자고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최정순 선생님 앞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머리를 숙이고 또 우러러보고 존경했습니다. 그리고 왠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랑으로 점령하고 감동시키며 울리신 분입니다. 최 권사님이 참부모님에 대해서 간증을 하시면 듣는 이들은 전적으로 공명 호응하며 ‘사실입니다’ 하고 결심할 수 있는 결과가 나오던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최 권사님은 말씀을 듣자마자 전도에 불을 붙였습니다. 최 권사님의 형부인 권창림 장로가 신령역사를 한다기에 대전에 내려갔습니다. 최 권사님과 함께 강의를 했는데 그는 생사를 걸고 반대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쫓겨났습니다. 우리는 전도가 그렇게 어렵다는 것을 알고 더욱 식구가 귀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하나가 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지금 영계에 가 있는 권 장로를 거론하고 있는 이 시간에 그는 가슴을 치면서 옛날에 생사를 걸고 반대했을 때를 뉘우치고 있을 것입니다. 
1956년 5월 1일 최 권사님의 초청을 받고 원주에 가서 원리강의를 했습니다. 그때 권사님은 네 따님들과 함께 학교 관사에서 생활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후에 워낙 기성교회로부터 핍박이 심했고, 학교 기숙사에서 강의한 것이 원인이 되어 학교로부터 퇴직 처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퇴직한 이후에 상경하셨을 때의 그 모습이 지금도 저의 눈에 선합니다. 내적 외적으로 많은 고생을 해 오셨기에 창백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마음으로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과 참아버님이 사랑하시는 딸 최 권사로 하여금 타락으로 자녀를 잃어버리고 외롭게 섭리해 오셨던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게 하시며, 참아버님이 걸으셨던 옥중 노정의 어려움보다는 지금이 쉬운 길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소서!” 하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퇴직 처분을 받고 나서 네 따님들을 다 최고 학부를 마치도록 교육시키려니 말로 형언할 수 없이 힘드셨을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자식들을 교육시켜서 하늘이 원하고 나라가 원하는 자리에 세워야겠다는 굳은 의지로서 생활을 일관해 오셨습니다. 결국 최 권사님이시었기에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 와중에서도 친딸들보다 식구들을 훨씬 더 사랑하셨고, 그들을 돌보기에 진심으로 애써 오셨습니다. 
이제는 그 모든 뜻을 이루신 장하신 네 따님의 어머니가 되셨고, 장모님이 되셨고, 할머니가 되셨고, 또 통일교회의 표본적인 큰 상을 받고도 남음이 있는 진실로 승리하신 최정순 권사님이십니다. 
저는 최정순 권사님과 45년간 이 길을 걸어왔습니다. 1971년 강원도를 순회하던 도중에 춘천교회에서 권사님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그때 권사님은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현실 씨, 지금 강원도의 상황을 보면 참으로 눈물겹고 속이 상합니다. 얼마 전에 원주에 갔었는데, 15년 전에 내가 교회를 개척할 때 깡보리밥에 새까만 된장 소금국을 먹었는데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로 깡보리밥에 그 소금국을 그대로 먹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지요?” 하면서 목이 메이셨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그 문제를 놓고 통곡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서로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자세가 문제입니다. 통일 식구들이 진심으로 사생결단하여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고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뜻에 미친 자리에 서야 합니다. 어떤 무서운 어려움과 핍박이 다가와도 참부모님 고난의 노정에는 비할 수 없음을 느끼고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극복합시다.”라고 했습니다. 
권사님은 백절불굴의 투지로 가난과 더불어 싸워 이기셨고, 그 무서운 핍박과 반대도 싸워 이기셨고, 자기와 세상과 사탄과 싸워 이기셔서 하늘과 땅 그리고 후손들 앞에 큰 사표가 되셨습니다. 
이제는 다시 불러도 유명을 달리하셔서 말이 없으십니다. 10년만 더 사셨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욕심을 부려보지만, 이제 저나라에 가서 함께 만날 것을 기약해 봅니다. 앞서서 영계에 가신 흥진님, 대모님, 이상헌 선생님, 유효원 선생님, 박봉애 선생님, 김영운 선생님, 김순화 국장님 등 우리 선배님들께서 얼마나 반가워하시겠습니까?
지금 영계에서는 최 선생님을 영접하는 환영회로 분주할 것입니다. 최 선생님, 크게 영적으로 역사하셔서 하루 속히 참부모님의 세상을 만듭시다. 큰 기대를 걸어 봅니다. 
마지막으로 최 권사님으로부터 받은 글월 세 통을 건사해 왔는데, 그 중에서 제일 먼저 보내 주신 1956년 글월을 읽어 드림으로써 그때 당시의 최 선생님의 심정과 입장을 회고해 봅니다. 

친애하는 현실 씨에게
이 시간도 뜻을 향하여 불굴의 심정을 지니고 사탄과 더불어 싸우시는 늠름한 모습이 더욱 아버님의 사랑받으실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소식은 종종 듣고 있었으나 지금쯤은 식구도 많이 늘었겠지요. 이곳도 아시다시피 진리의 싹이 튼 지는 오래되었으나 작년 여름 시련과 함께 찬서리를 맞은 후로는 잦아든 상태에 있던 것이 집을 지음과 동시에 경규 씨가 와서 활동하기 시작하자 사탄들도 호응하여 벌써 열렬한 싸움이 시작된 지 수개월, 아직도 계속하여 작년 이대사건을 반복하며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나 최후의 승리는 우리에게 오고야 말 것입니다.
기성교회나 반대하는 학교 괴수들이 삼위기대를 조성하여 쉬지 않고 반대역사를 하고 있으며, 내가 전직(轉職)하면 교회가 서지 않을 줄로 오산하고 있으나 이번만은 양보하지 않고 교회를 세우고야 말겠습니다. 
이미 말씀을 듣고 나간 자들이 많아 더욱 힘듭니다. 현실 씨가 뿌리고 간 씨알과 같은 학생들이 지금은 참 열렬히 잘 싸우고 있답니다. 춘천에 가서도 씨를 퍼트려 영광 돌리고 있습니다. 속속히 우리는 맡겨진 바에 사명을 감당하여 아버님의 원한을 한시라도 속히 갚아 드려야 할 몸들이 아닙니까?
선생님께서는 지방으로 순회를 떠나셨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작년 수난기 눈물로 양식 삼아 지내던 눈물겨운 모습들이 하나하나 머리에 떠오르며, 그때를 탕감함인지 식구가 늘어나지 않습니다. 
부디 잘 싸워 대전에 제일로 큰 교회를 세우시고 아버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라나이다. 
1956년 8월 13일 최정순 올림

이 편지를 끝으로 추모사를 대신합니다. 감사합니다. 

2000년 8월 26일 삼성의료원에서
차만춘 선생님 회고사


천성시승자(天誠侍勝者)이신 차만춘 선생님의 영전에 오늘 여기 모인 우리 식구 모두는 엄숙하게 머리를 숙입니다. 지금 차 선생님께서 참부모님의 거룩하신 참자녀님들이 계시는 그 천국을 향하여 가시는데, 이런 노래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 묘한 화초향기는 바람에 불어오는데 
생명수 강변에 화초는 늘 사시청청하도다. 
청아한 음악 소리는 우리 귀에 들려오는데 
흰 옷을 입은 우리들 천사와 노래하도다.”
지금 차 선생님은 이 노래를 부르시면서 천국을 향하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도 함께 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차 선생님은 문형진 세계회장님께서 내리신 휘호 ‘天誠侍勝者(천성시승자)’라는 내용 그대로 정성으로 하늘을 모시는 데 승리하셨던 분입니다. 
1962년 청파동 시절입니다. 그때 차 선생님은 참부모님의 세탁을 전담해 오셨는데 그 정성은 어느 누구도 흉내를 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차 선생님만이 할 수 있었던 정성으로 참부모님을 모셨습니다. 당시에 저는 차 선생님과 청파동 구본부교회 안방에서 같이 지내고 있었습니다만, 언제나 제일 늦게 주무시고 아침에는 제일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냉수욕을 하시고 기도하시고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정성에는 하늘도, 땅도 가만히 있지 못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무슨 빨래를 하는데 기도하고 냉수욕을 하느냐?’ 하고 웃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 선생님은 오신 재림주님, 메시아, 참부모님을 맞은 자로서의 생활이었습니다.
다림질을 할 때 누구든지 옆에서 먼지를 날리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면 혼자서 가만히 삭이고 계시다가 폭발하셔서 불호령을 내리셨는데 그 음성에 듣는 이들이 다 부들부들 떨어야 했습니다. 그때의 그 정성은 제가 말로써 아무리 표현하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세탁물을 백옥같이 하얗게 만드셨습니다.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정성어린 심정으로 씻고 또 씻고 헹구기를 거듭했기 때문입니다. 그 정성은 참으로 대단해서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내용을 많이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형진님께서 ‘천성시승자’라고 하셨습니다. 초창기의 통일교는 그런 정성 위에 세워졌으며 그중에서도 차 선생님이 표본이셨습니다. 
‘차 선생님’ 하면 이것 하나만은 잊을 수 없습니다. 하루는 다림질을 하는데 전기선이 합선되어 불이 팍팍 소리를 내면서 타 올랐습니다. 그때 차 선생님은 그 전선을 손으로 잡고 이빨로 선을 물어 끊기 시작하셨습니다. 삽시간에 손은 새까매지고 입술도 타서 상처가 생겼습니다. 나중에 제가 물어보았더니 ‘행여나 불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나?’ 해서 자신의 몸은 생각지 않고 그런 위험한 일을 태연하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뜻을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행하셨던 큰 분이셨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분들 가운데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좋아하고, 또 심정의 모습을 닮아 보려고 애도 써보았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차 선생님은 원리강의도 잘하셨던 분입니다. 또 노래도 너무 잘하셔서 아버님께서 자주 시키셨습니다. 차 선생님께서 노래하시던 그때가 그리워집니다. 참아버님께서는 참을 말씀하시는데 옆에서 누군가 아니라고 하면 그대로 못 넘기시는 성품이신데, 차 선생님 또한 참을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생벼락을 내리시던 성품이셨습니다. 저는 차만춘 선생님과 청파동에서 한 집에 살면서 한 상에서 밥을 먹으며 지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어리광도 부리고, 또 어떤 때는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차 선생님을 괴롭게도 했습니다. 그때 차 선생님은 괴로운 내 마음을 위로도 해 주시고 어머니같이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차 선생님께 용서를 빕니다. 
차 선생님과 함께 지냈던 시절에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람은 다 왔다가 가며, 5분 이후에 어떻게 될지를 모르고 살고 있지요. 우리 중에서 영계에 누가 빨리 갈지 모르지만, 먼저 가는 이가 영계에 가서 참으로 크게 역사합시다. 모두가 알 수 있게, 또 느낄 수 있고 믿을 수 있게 합시다.”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해 5월 14일 훈독회에서 참아버님께서 영계를 모르면 아니되며, 또 참부모님의 가정에서 먼저 영계에 가신 참자녀님들이 직접 역사하시는 때가 왔다고 하셨습니다.
차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저보다 먼저 가셨으니 이야기하신 대로 정말로 역사를 해 주십시오. 차 선생님이 좋아하시고 언제나 그리워하면서 존경해 오셨던 옥 씨 어머니, 지승도 어머니, 이기완 씨 어머니, 득삼 형님 만나서 즐겁게 지내십시오, 또 지상섭리에 협조해 주십시오. 또 너무 좋아하셨던 최원복, 김영운, 김순화, 최정순, 박봉애, 양윤영, 이소담 선생님들과 더불어 영계에 계시는 참자녀님들과 하나가 되시어 이 땅에 재림협조하셔서 이 땅에 참부모님의 소원이신 하나님의 나라와 세계, 천일국을 창건하게 하옵소서! 
36가정 중에서 영계에 가신 어르신들과 함께 영계에서 한 무리가 되어 큰 군대를 이루어 역사하게 해 주소서! 차 선생님, 가시는 길 편안히 즐기며 가시옵소서! 먼 후일에 그곳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2008년 5월 15일 
강현실 드림
김인주 권사님 추모사

天城入城 明一者(천성입성 명일자), 김인주 권사님의 영전에 드립니다.
참부모님 직계의 자녀님들이신 효진 님, 흥진 님, 영진 님, 혜진 님과 대모님이 계시는 천국을 향해 가시는 길 즐겁게 가세요.
김인주 권사님, 이렇게 부릅니다만 대답이 없으신 것을 보니 참으로 유명을 달리하셨군요. 언제나 참으로 정답게 대해 주시며 반가운 미소로 여러 면으로 지도해 주셨던 형님, 저에게는 참으로 잊을 수 없는 많은 추억을 안겨 주셨음에 오늘 이 영전에서 뜨거운 감사를 올립니다. 
먼저 참부모님께서 64년간이나 함께 뜻길을 걸어오신 김인주 권사님의 성화 소식을 접하셨을 때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아버님께서 1946년 5월 28일 서울을 떠나 6월 6일 평양에 도착하셔서 나흘 째 되던 날에 그렇게도 권사님이 사모하며 기다려 오셨던 구세주, 재림주님을 만나셨습니다. 
평양은 이북의 예루살렘으로서 부흥사와 선교사 그리고 순교자들이 많이 나온 곳입니다. 거기에 새로운 하늘의 뜻을 세운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것이었습니다. 기성교회로부터의 핍박과 반대 투서가 80여 장이나 되었으니 아버님은 감옥으로 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인주 권사님도 가정으로부터 부모뿐만 아니라 친구와 친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그 핍박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여기에 계시는 여러분도 김인주 권사님의 간증을 듣고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아버님은 그당시의 평양 식구들이었던 김종화 씨, 라최섭 씨, 차상순 목사 등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2년 8개월의 그 무서운 옥고도 회상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언제 김 권사님을 뵙게 되었는가 하면 1953년 크리스마스 때였습니다. 그때 아버님은 34세이셨는데 전도에 미쳐 계셨습니다. 부산 영도에 있었던 신성묵 씨 댁의 판잣집 단칸방에서 유효원 선생 3형제와 송도욱, 김관성 장로를 앞에 놓고 부흥설교를 하셨을 때입니다.
권사님은 그 방에 들어오자마자 ‘주님, 주님!’ 하고 외치면서 아버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통곡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한 20여 분간을 큰 소리로 우시니 아버님께서 그만하라고 하셔서 그 울음을 그치셨습니다.
그 울음 속에는 많은 사연이 담겨 있는 듯, 또 그동안의 많은 회포를 푸는 듯 느껴졌습니다. 이후로 권사님이 증거하시던 핵심은 ‘나는 주님을 만나 즐겁다.’는 것이었습니다. 욕을 먹어도, 핍박을 받아도, 주님 때문에 죽는 경지에 들어가도 여한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백절불굴의 신앙은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었습니다. 
1946년 7월에 김 권사님은 김원필 선생을 전도하셨으니 하늘에서 큰 상을 받으실 것입니다. 권사님께서는 그 이후에 늘 김 선생의 건강을 위해 걱정하시고 많은 정성을 쏟으셨습니다. 
동대문교회와 본부교회의 부인회장 시절에 언제나 양손에 큰 보따리를 들고 다니시길래 무엇인가를 물어보았더니 불쌍하게 사는 식구들을 위해 사기도 하고, 얻기도 한 옷이라고 했습니다. 그 옷보따리를 가지고 심방 가셔서는 위로하고 울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김 권사님을 이야기하며 자랑하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김 권사님은 봉사를 할 때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고 또 주고도 부족함을 느끼셨던 분입니다. 김 권사님의 그 참사랑에 감격해서 열심히 활동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청파동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우리는 보리밥에 소금국을 끓여 먹고 있었습니다. 영감님의 생신이라고 해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영양실조에 걸려 있던 우리를 위해서 너무도 큰상을 차려 주셨습니다. 불고기, 갈비, 잡채, 큰 생선 등을 우리를 위해서 대접하면서 권사님께서 너무너무 기뻐하셨습니다. 당시의 유효원 협회장이 땀을 흘리면서 “맛이 참 좋아요.” 하셔서 우리 모두는 매우 즐거웠습니다. 그때 기뻐하시던 권사님의 모습과 우리를 초대해 즐겁게 해 주신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권사님께서 정성들여 키우신 자녀들이 여기에 상복을 입고 서 있습니다. 아드님과 며느님, 특히 미국에서 온 혜영 내외와 영계에서 협조하는 큰딸 혜자와 그 남편이 권사님의 육신과 헤어지는 서러움에 울고 있습니다. 참으로 귀하게 기른 자녀들, 어머니가 자녀들을 위해서 들인 그 정성의 진실을 유린하지 않는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권사님은 지상에서도, 영계서도 그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 예외없이 다 영계로 갑니다. 영계를 모르면 안된다고 참부모님은 누누이 말씀하십니다. 언젠가 권사님과 이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우리 중에서 영계에 누가 먼저 갈지 모릅니다. 먼저 가는 이가 참부모님의 재세시에 뜻이 이루어지도록 협조합시다. 모두가 알 수 있게, 느낄 수 있게, 또 믿을 수 있게 합시다.” 하고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권사님, 먼저 가셨으니 이야기했던 대로 역사해 주세요. 믿습니다. 
김 권사님이 좋아하신 이북 식구님들이셨던 옥세현 어머니, 지승도 어머니, 기완 씨 어머니 그리고 최원복, 김영운, 김순화, 최정순, 차만춘, 박봉애, 양윤영, 이소담 선생님들께도 참부모님의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참자녀님들이신 효진 님, 흥진 님, 영진 님, 혜진 님, 희진 님과 하나가 되시어 천일국 기원절인 2013년 천력 1월 13일에 참부모님께서 그렇게도 소원하시던 하나님의 나라와 세계를 창건하시게 도와주시옵소서.
먼저 가신 36가정 식구님들과 더불어 한 무리가 되어 큰 군대를 이루어 역사해 주세요. 권사님이 가시는 길 편안히 즐기시며 가시어 하나님께 “저, 김인주가 왔습니다.” 하고 인사드려 주세요.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딸아!” 하고 손잡아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참부모님을 64년간 모신 김인주 권사님을 천국으로 보내는 장도를 배웅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부디 김인주 권사님을 좋은 곳으로, 더 좋은 곳으로 보내주소서! 높이 세우시옵소서! 

천기 1년 2010년 천력 4월 4일 
강현실 드림
최원복 선생님 송별사

信愛忠母(신애충모)님, 최원복 스승님의 영전에 드립니다. 
최 선생님! 천총관 흥진 님, 영진 님, 혜진 님, 희진 님, 대모님, 그리고 먼저 간 식구님들이 계시는 천국을 향해 가시는 길 즐겁게 가세요.
최 선생님, 이렇게 부릅니다만 대답이 없으신 것을 보니 참말로 유명을 달리하셨군요. 
최 선생님, 지금 이 자리에 살아 계시는 하늘부모님과 천지인참부모님께서 오셨습니다. 
천일국 6년 1월 15일 오후 2시 40분에 91세를 일기로 천국을 향하시는 최원복 선생님, 그렇게도 사랑하시며 정성을 다하여 훌륭하게 길러 세운 아드님들과 자부님들 그리고 손자손녀들이 여기에 왔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최 선생님을 존경하고 사랑해 왔던 황 회장님과 믿음의 자녀들 그리고 많은 식구님들과 제자들이 최 선생님이 천국으로 가시는 장도를 환송하기 위하여 여기에 모였습니다. 이곳에는 많은 화환들도 최 선생님이 가시는 길 앞에 웃으면서 서 있는 듯합니다. 
먼저 천지인참부모님께서 최 선생님 성화 소식을 접하셨을 때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통일가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투자하셨으며, 가족으로부터 반대를 받고 학교로부터 퇴직을 당하셨으며, 사회로부터 매장을 당하며 희생을 치루셨던 그때를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통일가의 역사에 길이길이 본이 될 자취를 남기실 때마다 천지인참부모님께서 참으로 많은 감동을 받고 감격하셨던 일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천지인참부모님께서 좋은 곳, 밝은 곳, 귀한 곳, 값진 곳으로 이 시간에 환송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많은 식구들도 동참하고 있습니다. 
최 선생님의 일생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일제시대의 무서운 압박 속에서 멸시와 굴욕과 천대를 받으면서도 나라의 장래 문제를 놓고 염려하며 많은 눈물을 흘리고 기도해 오셨습니다.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하시고, 개성학생 독립운동의 주모자로 40일간 투옥되어 모진 매와 고문을 당하신 고통도 겪으셨습니다. 실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신 마음은 최 선생님의 피와 살과 뼈 속에서부터 우러나온 심정의 발로였습니다. 
해방 후 잔인무도한 공산 정권하에서도 자유를 그리워하고 인생의 정도를 걸으시며 언제든지 ‘나라와 인류를 위하여 무엇을 하오리까?’ 하는 마음으로 명상에 젖어 계셨던 때도 많았습니다. 또 ‘나라와 민족과 세계를 위해 무엇을 남기고 가오리까?’ 하시며 매일 초조한 마음으로 안절부절하시면서 정성 들여 오신 놀랍고도 위대하신 애국충정에 불타신 스승이셨습니다. 
최 선생님은 1954년 이전에는 다복한 가정생활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참뜻을 아신 이후부터는 학교로부터의 이루 형언할 수 없었던 반대를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신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언제나 겸손히 꿇어 엎드려 하나님의 뜻 성사를 위하여 민족과 나라와 세계를 위하여 간절한 심정으로 기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아시고 계시며, 참부모님께서 기억하고 계십니다. 
1954년 겨울 어느날 이대 교수 되는 분이 찾아왔다고 해서 저와 또 다른 식구가 부엌에 있다가 문틈으로 내다보았더니 키가 훤칠하게 크고 인물이 너무나 잘 생기시고 깨끗한 아름다움을 지니신 최 선생님이 보였습니다. 우리는 그 외모에 그만 압도되고 말았습니다. 
6개월간 전도가 안 되어서 고민하고 있던 때라 마음속으로 식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최 선생님이 매일같이 찾아와서 강의를 듣고 가시던 그 얼굴 모습이 훤한 중에서도 더 훤하게 보였습니다. 그 인자하고도 맑은 목소리를 저는 또 다시 한 번 뵈려고 돌아가실 때마다 따라 나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최 선생님은 입교하시자마자 학교의 선배이셨던 최정순 선생을 1955년 3월 1일에 입교시키기도 하셨습니다.
최원복 선생님은 참사랑으로 참으로 사람을 사랑하신 정의 소유자이셨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다 머리를 숙이며 옳은 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통일가에서는 어느 누구나 예외 없이 최 선생님의 인격을 존경할 것이라고 봅니다. 참부모님께서도 ‘信愛忠母 崔元福師’라고 휘호를 주시며, 믿음과 사랑으로 충성을 다하신 최원복 스승이라고 증거해 주셨습니다. 
최 선생님이 하나님을 믿어 온 믿음은 참으로 절대적이었습니다. 최 선생님은 남편보다 아버님을 절대적으로 믿으셨습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최 선생님이 가시는 길에 잘못되었던 것을 다 용서하고 가신다면 더 가벼울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초창기에 누구든지 문제가 생기거나 심정이 어두워질 때 최 선생님을 찾아가서 그 사정을 말씀드리면 언제나 통쾌하고 시원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최 선생님께 찾아올 때는 사람들이 우는 얼굴로 왔다가 돌아갈 때는 모두 다 활짝 웃으면서 돌아갔습니다. 모든 문제를 이야기하던 사람들과 같은 입장과 심정에서 함께 우시고 달래시며 쓰다듬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딸을 사랑하는 참사랑이 동기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돌과 같이 굳었던 마음까지도 녹았던 것입니다. 
코디악에서 참부모님께서 “석 박사, 어머니가 좀 어떠시냐?” 하고 물으셨을 때가 있었습니다. 석 박사님이 “병원에 그대로 계십니다.” 하니까 아버님께서 “인류의 잘못을 위하여 희생의 짐을 아직도 지고 가야 하는구나.”라고 말씀하시던 것을 저도 들었습니다. 최 선생님은 타락한 세계의 가인적인 어머니로서 모든 인류를 위해 고통의 십자가, 서러움의 십자가, 원한의 십자가, 죄악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렵게 지내던 지난 날에 저는 모든 것을 최 선생님과 의논했습니다. 어느 날은 “도둑이 들어 가진 돈을 모두 가지고 갔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딱하신 표정으로 도둑맞은 돈의 10배나 되는 돈을 주신 적도 있습니다. 지금도 ‘최 선생님,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청파동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언제나 최 선생님은 마음을 못 놓으시고 긴장해 보이셨습니다. 아버님께서 어디에 갔다가 돌아오신다고 하면, 최 선생님은 깜짝 놀라며 그 준비에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최 선생님은 아버님을 평화의 왕, 만왕의 왕으로 모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구세주요 메시아요 재림주요 참부모님으로 모시고도 남으실 분입니다. 
그토록 간곡한 심정으로 아버님을 보필하고 식구들을 사랑해 오신 분입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좀 더 사셔서 참부모님께서 실제로 세계적으로 평화의 왕, 만왕의 왕으로 등극하심을 보고 가셨으면 얼마나 좋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최원복 선생님이 영계에 가심으로 영계도, 지상도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이 참으로 참부모님을 천지인참부모님으로 알 수 있게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의 나라와 세계가 참부모님 앞으로 우후죽순같이 모여들 것으로 믿습니다. 그 세계는 영원무한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그리워하고 동경했던 세계입니다. 
끝으로 최 선생님을 저나라에 가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또 앞서 가신 우리 선배들님들이 얼마나 반가워하시겠습니까? 제일 기다리고 계시던 분은 석가세존 님이십니다. 함께 즐겨 주세요.
지금 영계에서는 신애충모님 최원복 선생님의 환영회로 분주할 것입니다. 최 선생님! 크게 역사하셔서 하루속히 지상도, 영계도 참부모님의 세상으로 만듭시다. 큰 기대를 합니다. 가시는 길, 부디 조심하시며 편안히 가세요. 옛 동지들에게도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06년 1월 19일
강현실 드림
이수경 회장님 송별사

이수경 회장님의 영전에 드립니다.
이 회장님의 성화 소식을 참아버님은 영계에서 아시고, 참어머님은 지상에서 들으셨습니다. 마음이 쓰라리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게도 사랑하고 아끼던 아들이셨으니까요. 크게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이 회장님, 천국을 향해 가시는 길 즐겁게 가세요. 저는 회장님께서 떠나셨다는 것이 사실이 아닌 것 같아서 심정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회장님, 하고 불러 봅니다만 대답이 없으신 것을 보니 참으로 저나라로 옮기셨군요.
언제나 그렇게 정답게 웃는 모습으로 대답해 주시며 많은 것을 주시려고 애써 오셨던 그 마음씨와 그 모습을 오늘 이 영전에서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립니다.
천기 3년 천력 9월 25일 79세를 일기로 천국을 향하시는 이 자리에는 사랑하는 부인, 자녀들, 동생들, 친척, 친지, 그리고 많은 식구님들이 아름다운 꽃속에서 아쉬운 마음으로 환송하고 있습니다.
1953년 4월 14일 제주도에서 형언할 수 없었던 고생에 대해서 저는 이봉운 장로님의 자서전을 통하여 울면서 읽었습니다. 세상에, 그 고생…! 나는 표현을 정말 못 합니다.
이요한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서울 수정동으로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재림주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셨던 그날은 구름 끼고 비 오는 날이었는데, 식구 여섯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이 회장님은 19세의 젊은 총각이었습니다.
그날 아버님께서 왠 미역 비린내야 하시더니 “그래, 이 장로의 가정이 제주도에서 미역을 주식으로 해 왔기에 미역 냄새가 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려운 생활을 하셨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지요.
그때 아버님은 희색이 만면에 가득 차 계셨습니다. 정말 식구들이 없었던 때인데 여섯 명의 식구가 한꺼번에 나타났으니…!
가끔 아버님께서 이 장로님께 “고생스럽지 않느냐? 이 길을 나와 함께 갈 수 있느냐?”고 묻기도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장로님은 신념에 넘치는 음성으로 “가고 말고요. 가고도 남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특히 아버님께서 이수경 회장님을 김원필 선생 다음으로 사랑하시고 대학도 즐거운 마음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아버님은 “수경이, 너 만은 내 편이야! 하늘 편이며, 이 길을 죽으면서도 갈뿐만 아니라 죽고 난 다음에도 가야 한다.”고 하시며 참으로 믿으셨습니다. 그 절대적인 신앙에 아버님도 절대적으로 그를 믿으셨습니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서울에 오시기 며칠 전 몽시에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보였는데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장로교회에서 들어온 강 장로의 딸인데, 집에서 반대하는데도 따라 나온 이라고 가르쳐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아버님의 댁에는 선생님, 옥 씨 모친, 김원필 선생, 이요한 목사, 정달옥 형님, 지승도 모친, 송숙이 씨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나도 함께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보시더니 강 장로의 딸이 아니냐고 묻기에 어떻게 아시느냐고 했더니 하나님께서 몽시로 미리 다 보여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이 장로님의 가정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으로 믿어 왔습니다. 오늘 이렇게 말씀드리게 되니 속이 후련하고 퍽 자랑스럽습니다, 
이 장로님의 가정은 제주도에서도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부산에서도 역시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그때는 피난시절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고생했지만 유독 이수경 회장님의 고생은 말로는 설명이 어렵습니다. 
부산에 오셔서의 생활은 나무 젓가락을 깎아 납품하면서 꾸렸습니다. 그것은 돈벌이가 안됐습니다. 그런데도 꾸준히 판잣집 방 한칸에서 생활하시며 밥은 드럼통을 잘라서 솥을 얹어 놓고 젓가락을 깎던 나무로 밥을 지었습니다. 연기가 얼마나 많이 났던지, 나는 밥 짓는 동안 내내 울고 있었습니다. 이 장로님은 연기를 보고 기차가 지나가는 것 같다고 하면서 칙칙폭폭을 몇 차례나 되뇌며 찬송가도 불렀습니다. 나는 그 신앙을 보고 참으로 감격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신세타령이나 하고 하나님을 원망도 했을 터인데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 고마운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나는 마음으로 많은 회개를 했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저의 눈에는 이 장로님 가정의 식구 전체가 도인들처럼 보였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온유 겸손했으며, 참으로 하나님의 축복가정으로서 자격을 갖춘 가정이었습니다. 회장님은 19세에 아버님을 만났고 1954년부터 서울에서 우리와 함께 한 집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찢어지게 가난하게 지냈습니다. 언제나 외상 쌀에 김순철 형님이 시장 보러 갈 때 조금씩 떼어 주어 반찬을 샀습니다. 그때 유효민 씨가 전국을 다니면서 찍어 온 풍경사진을 이수경 회장님이 예쁘게 물감으로 색칠을 해서 길가에서 팔았습니다. 원래는 길가에서 물건을 못 팔게 되어 있었습니다. 순경들이 감시했고, 또 어느 때는 사진을 다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매일같이 이수경 회장은 길에다 사진을 펴 놓고 오가는 사람들의 발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조금씩 벌어 온 돈으로 아버님의 진지와 식구들의 생활비를 위해서 썼습니다. 비가 오는 날은 나갔다가 그냥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저녁 준비를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아버님의 진지를 어떻게 하는가였습니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득삼 형님이 밀가루를 두 포대나 갖다 주었습니다. 그걸로 몇 달을 살았습니다.
어느 때는 순경에게 붙들려 도구를 모두 다 빼앗기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온 일도 있었습니다. 그때의 이수경 회장의 표정은 무슨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우리의 생활을 자기가 책임진 것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때 김원필 선생과 이수경 회장이 고생하면서 기반을 닦지 않았다면, 우리는 더 많은 고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님이 계셨기에 많은 기적도 있었습니다. 김원필 선생과 이수경 회장님은 통일교의 경제 기반을 닦는 데 있어서 원조가 되신 분입니다. 
1954년 비 오던 어느 날 나는 전도가 안 돼서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찬송가를 몇 장이나 불렀습니다. 그 찬송을 들은 이 회장님이 “어떻게 찬송가가 그렇게 은혜스러울 수가 있느냐? 몇 시간 설교를 듣는 것보다 더 은혜스럽다.”고 할 때 아버님이 들어오셔서 함께 찬송가를 부르면서 우리 심령에 부흥을 일으켜 주셨던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던 그 시절에 커피 잔 하나가 없어서 양재기에 커피를 타서 나누어 마시면서 이 회장님은 “커피 국물을 내게 좀 더 주세요.” 하고 농담을 하셔서 다 함께 폭소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우리 아버님이 영계에 가셨으니 그곳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며, 어머님이 지상의 중심에 서 계시니 아버님은 더욱 크게 영계에서 호령하시며 역사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 회장님, 영계에서 아버님을 곧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기쁘실까요? 그리고 먼저 가신 참부모님의 직계자녀님들이신 효진 님, 흥진 님, 영진 님, 혜진 님을 만나서 즐기시기 바랍니다. 영계에서는 이 회장님 환영파티에 이봉운 장로님도 참석했을 것으로 믿습니다.
먼저 가신 우리 옥 씨 모친, 지승도 모친, 기완 씨 모친으로부터 지상에서 많은 사랑 받으셨지요. 먼저 가신 형제들과 하나가 되어 지상의 어머님을 중심하고 하루 속히 참부모님께서 이상하셨던 뜻이 성취되는 데 협조 역사해 주실 줄 믿고 송별사를 대신하겠습니다. 

천기 3년 천력 9월 27일(2012년 11월 8일)
강현실 드림
김주화 선생으로부터 받은 편지

현실 씨, 안녕하세요?
저희들은 지금 화란 해변가에 와서 쉬고 있습니다. 
인편에 들으니 교통사고가 있었다고요? 그후 별고 없으신지요? 
나이가 많아지면서 건강이 제일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독일에서는 21일 이상 헝가리 전도에 전원 동원령이 내렸습니다.
각자가 아이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는 등 바쁘게, 바쁘게 준비들을 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우연히 한국 식구를 만나서 한국 소식을 많이 들었습니다.
몸 건강히 계세요.

2000년 김주화 드림
정의 소유자 김순화 국장님

초창기였던 1955년 입교하신 김순화 국장님은 보건사회부 부녀국장으로 어디서나 인기가 많았던 분입니다. 특별히 내게는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신 분이어서 잊을 수가 없습니다. 
대전으로 개척전도를 떠날 때 눈물 어린 심정으로 “고생이 심할 텐데….” 하면서 어머니가 딸을 사랑하듯 위로와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편지도 여러 통 받았는데, 다 건사하지 못했습니다. 대전에 가 있는 동안 여름옷을 사 보내 주고 파라솔에 돈까지 보내 주면서 “혼자 대전으로 떠나던 모습이 외로워 보였다.”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신앙이 너무너무 좋으셨던 점, 부모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식구들을 사랑하신 마음을 참으로 잊을 수 없습니다. 김순화 국장님이 처음으로 저에게 구두 한 켤레를 사 주셔서 아버님께서 깜짝 놀라시며 “강현실, 구두 신었네.” 하시면서 웃으셨던 일도 기억납니다. 그때 제가 “김순화 국장이 사 주었어요.” 했더니 아버님께서 진심에서 우러나오시던 웃음을 지으셨습니다. 
많은 격려와 위로의 편지를 받았지만, 청파동교회 다락 위에 보관해 두었다가 둘 곳이 없어서 태워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다시 그 편지를 볼 수 없으니 너무너무 아쉽습니다. 
제가 매일 기도할 때마다 잊지 않고 영계에 먼저 가신 분들을 위하여, 지상섭리를 위하여 역사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버님과 함께 크게 역사하고 계실 김순화 국장님의 인자하신 모습이 그립습니다. 
언제나 아버님 앞에서 대답을 먼저 하셨던 국장님, 언젠가 아버님께서 “국장은 무슨 국장이야? 된장국장이야!” 하셔서 모두 웃었던 옛일도 기억납니다. 김 국장님, 영계에서 뵙겠습니다. 


사토 히사에(佐藤久江) 님

일본 동경에서 화흥당(和興堂)을 경영하는 사토 히사에 님이 생각납니다. 그 여사님은 천리교 집안의 딸로 태어나 교양을 갖춘 80여 세 된 분입니다. 매해 연말이면 자신의 통장에 있는 모든 돈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다 헌금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분입니다. 어디를 가나 말씀대로 살고 행하시는 분입니다. 전도한 사람만 100여 명이 넘고, 가정교회 활동을 위하여 가시는 이곳저곳에서 일본 사람은 물론이고 한국 사람들도 전도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전도를 할 때 정말로 부모의 심정으로 종의 몸을 쓰고 봉사하는데, 그렇게 정성을 들이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 것입니다. 나는 이분의 말씀을 듣고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분과 같은 심정으로 전도를 못 하였음을 진심으로 통곡하면서 회개했던 것입니다. 
히사에 님은 있는 것을 다 바치고 쏟으면서 봉사하는 분입니다. 한 번은 편지가 왔는데, 열장이나 되는 장문을 읽으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참부모님에 대한 그 심정, 죽든지 살든지 아버지의 것으로 살겠다는 내용에 아주 감격했습니다. 아버님께 보고를 드렸더니 그분을 서울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직접 간증을 들으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너무너무 기뻐하시며 “통일교 식구들은 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도를 많이 하셔서 한국에도 믿음의 자녀가 많이 있습니다. 하루는 사토 님이 몸이 안 좋다고 하셔서 한약을 지어 주었습니다. 아버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그 한약을 보시고 몇 차례나 만지시면서 이 따님을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후 건강을 찾고, 지금까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참부모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분이자 참부모님께서 사랑하시는 따님이십니다. 

다마오키 쇼코(玉置祥子) 님

다마오키 님은 1980년에 입교하신 분입니다. 인생과 우주 문제를 놓고 많은 고민 끝에 통일원리를 듣게 되었는데, 강의를 듣고 너무 기뻐서 본인 집의 방 하나를 전도소로 정하고 일 년 내내 일주일 원리수련을 시켜서 수료증을 수여하고 자기와 함께 전도를 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열심히 전도에 몰두하다 보니 가족들이 반대를 하게 되어 집에서 쫓겨났으나 변치 않고 계속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 모습에 남편과 자녀들도 감동을 받아 아내와 어머니가 가는 길을 함께 가겠다면서 식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기성축복을 받았습니다. 
다마오키 님이 전도하여 축복받은 가정이 3백 가정이 넘는다고 하니 얼마나 열심히 전도를 하신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동동경지역의 책임을 맡고 있을 때 그분이 초청해서 나고야(名古屋)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그분은 나고야에서 최고의 VIP들 수백 명을 모아 놓고 원리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분은 사업에도 조예가 깊어서 부시 대통령 시절에 백악관에서 일본 사업가들 세 명을 초청했을 때 초청을 받아 참석한 분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댁에 가면 부시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귀한 분이라서 기회가 될 때 아버님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아버님께서 이분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고 하시면서 한남동 공관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참부모님께서 이분의 보고를 들으시고 참으로 기뻐하시면서 앞으로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전 영국 수상인 마가레트 대처 수상을 일본으로 초대해 원리강의를 한 적도 있습니다. 대처 수상에게 참부모님을 증거하고 직접 만나 뵙게도 했습니다. 다마오키 님은 1990년대 참부모님으로부터 천운을 받아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역사의 불을 붙였다고 증거하곤 했습니다. 지금 연세가 일흔이기 때문에 앞으로 10여 년 동안 더 큰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 봅니다. 
참부모님께서 다마오키 님의 간증을 들으시고 참으로 기뻐하셨던 모습이 새삼 그리워집니다. 자서전을 내면서 영계에서 박수를 보내시며 잘해 보라고 하실 아버님의 모습과 응원과 격려를 해 주실 참아버님의 모습이 떠올라 다마오키 님에 대한 활동을 보고드립니다. 


숨은 기도의 제물, 사카마키 미치코 님

사카미키 미치코(坂卷 美知子) 님은 참부모님을 위해서 살아오신 분으로 시집을 두 권이나 출간한 분입니다. 그 시집 속에는 하나님과 참부모님에 대한 간절한 내용이 붓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 10여 년간에 걸쳐서 참부모님을 사랑한 그 간절한 심정은 내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일본 식구들이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사랑하는 깊은 심정은 무엇으로도 표현이 되질 않습니다. 나는 이 시집을 몇 번이나 정독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중에서 시 두 편을 소개합니다. 
또한 그분은 나를 위해서 777번이나 정성기도를 해 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영계에 가 있지만, 지금도 나는 그분을 잊을 수 없어서 기도하며 많은 협조를 구하고 있습니다. 

영계와 지상계의 체험

저는 강 선생님을 청평에서 뵌 것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5월 10일 한국 청평에 가서 이틀째가 되던 5월 11일부터 저는 영계와 지상계를 왕래하게 되었습니다. 4시간 정도 진행된 폐회식 때 참부모님께서 청평 성지에 올라가시는데 빛의 다리를 두 분이 손을 잡고 건너가셨습니다. 그 뒤로 흥진 님과 훈숙 님이 올라가시고, 그 뒤를 따라서 흰색 예복을 입으신 대모님이 천천히 따라가셨습니다. 
그 성지에서 가끔 흰 옷을 입고, 흰 지팡이를 들고 기뻐하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제 자신이 제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강단 정면에 계시는 참부모님, 흥진 님, 훈숙 님, 대모님의 모습만 계속 보았던 저는 아주 귀중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던 길에 공항에서 마주친 하늘은 파랗고, 땅은 회색빛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많은 것을 얻고 집에 돌아오니 집안에는 천정이든 벽이든 한국 선영들과 저희 선조들이 나타나서 춤을 추었고, 꽃들이 피었고, 텔레비전 위에는 미륵보살님이 기뻐하고 계시며, 참부모님을 모신 곳에도 꽃이 활짝 피어있었습니다. 이것이 제 눈으로 본 장면이었습니다. 
기도, 소원
하늘부모님의 허락 하에 남겨진 나의 오른쪽 눈만큼은 영원히 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저의 마음에 크나큰 사랑을 주신 강현실 순회사님께 감사드립니다. 
(1995년 5월 11일)
참아버님

남미의 작열하던 태양 아래서 “얼굴에 기미가 많이 생겼네.”라고 말씀하신 참아버님 
사정없이 내리쬐던 태양 빛 속에서도 
부족한 저희들을 대신하여 
당신의 목숨을 걸고 십자가 노정을 가시던 참아버님
짧은 식사 시간에 쪽잠을 주무시던 참아버님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시고도 계속되던 험난한 길
냉방이 안 되는 찌는 듯한 방에서 기도하시던 참아버님
저는 무엇으로 보답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저희가 입술을 꼭 깨물고 
양손을 꽉 쥐어도 참부모님께 도움을 드릴 수 없는 
죄 많은 제 자신을 보니 마음이 찢어집니다. 
할 수만 있다면 아버님의 다리 통증을 저에게 주시옵소서 
말로는 표현할 길 없는 아버님의 그 아픔을 저에게 주시옵소서
뼈를 깎는 아버님의 아픔을 저에게 주시옵소서
하늘부모님,
참부모님의 아픔을 부디 저에게 주시옵소서 
아무도 모르게 저에게 주시옵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저의 목소리를 들어 주시옵소서! 
(1991년 6월)
이 책을 마감하면서

아버님께서 나를 처음으로 개척전도에 내보내시던 1953년 7월 20일 아침에 해 주신 말씀이 “개척의 길은 쉬운 길이 아니다. 그러나 온 마음을 하나님과 참부모님께 향할 때 하나님이 강현실의 편이 되어 협조해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그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내 배후에서 함께하신다는 신념과 확신으로 살아왔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참부모님께서 동행·동사·동역해 주셨으므로 하나님은 강현실의 하나님이시고 참부모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살았고, 또 일생을 그렇게 마감하려고 합니다.
우리 통일 식구는 어느 누구나 예외 없이 그렇게 살면서 천복이 함께하는 천권을 행사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날 나를 대구로 보내시며 해 주신 기도를 나는 평생 잊지 못합니다. 그 기도는 보통 기도가 아니고 심정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의 기도였습니다. “어린 딸이 처음 새 말씀을 전하기 위해 남한에서 제일 교세가 강한 대구로 향합니다. 하나님, 이 어린 강현실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꼭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간구하나이다, 아멘!”이라고 해 주신 그 간절한 기도로 나는 지금까지 통일가 식구로 남았습니다. 

지금도 아버님은 영계에서 통일가 식구는 물론 전 세계 인류 가운데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다 하늘편 식구가 되기를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자에게는 믿는 그대로의 열매로 반드시 맺어질 것입니다.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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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年
↓2025年7月14日追加(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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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식구 여러분께

2016년 12월 21일

강현실

저는 강현실이라고 합니다.

1952년에 부산 범냇골에서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감격하고 감사하며 인생과 우주의 문제를 해결하고 기쁨으로 천하를 얻은 심정으로 아버님과 함께 섭리의 일선에 서게 된 지난날이 그립습니다.

그 후 대구, 대전, 광주, 부산진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65년간 참부모님을 증거하며 내 있는 정성 다하여 인류 복귀를 위하여 아버님과 함께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몸부림쳤던 날들이 그립고 생각납니다.

개척시절은 형언할 수 없는 고생을 했지요. 너무 배가 고파서 음식점 문 앞에서 곰탕 냄새를 맡으며 허기를 달래던 젊은 시절. 그때마다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격려와 권고, 그 사랑, 행복했던 그때가 지금도 내 마음을 감동시켜 줍니다.

나의 65년의 그 세월 하나님과 참부모님은 아실 것입니다. 나는 재림주님을 만난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혼자 미친 사람처럼 웃고 길을 걸으며 춤도 추었지요. “내 생전 재림주님을 지상에서 만났으니 나는 무엇이나 못할 것이 없다. 나는 죽어가면서도 이 길을 가야 하며 죽고 난 다음에도 이 길을 가겠습니다.” 라고 맹세하고 나선 길입니다. 아버님 말씀은 참으로 위력이 있어 나를 통일원리에 미치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말이 들려왔습니다.

어머니는 “나는 원죄가 없이 복중에서, 출생할 때부터 3대가 깨끗한 순혈로 출생되었지만 아버님은 원죄와 함께 출생하셨다” 고 했습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 몇날 며칠 고통속에서 몸부림쳤습니다. 내 신앙적 양심으로는 받아드릴 수 없습니다.

나는 메시아요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말도 이해가 안됩니다. 2천년 기독교가 독생녀인 나를 기다려 왔다는 말을 기독교인들이 들으면 웃어버릴 것입니다. 억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여자는 메시아, 재림주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어머니는 어머니가 재림주인 아버님의 위치보다 더 높고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버님 위치를 격하시키고 어머니의 위치를 격상시키는 것을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저는 좀 더 연구해보며 하나님과 아버님이 어떻게 보시는지 기도해 보겠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어서 길을 달리 하려 합니다. 저의 걱정은 마시고 지켜보아 주시는 사랑하는 식구님 되실 것으로 믿습니다.

내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어머니,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누가 교회에서 나를 떠밀어도 떠나지 않습니다. 나는 그렇게 어머니 곁을 그리워하며 사랑했던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지금 나는 떠나도 언제나 잊지 않고 어머니 기억하며 사랑하렵니다. 그리고 더 아버님께 가까이, 더 가까워지려고 생츄어리교회로 나가겠습니다. 나는 나이가 많지만, 내가 생츄어리 교회로 오는 것은 내 생각과 의지로 결정했으며 하나님의 뜻과 참아버님의 권유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나는 펜실베니아 생츄어리교회로 왔습니다.

어머니 안녕히 계시고 영계에 가서 만나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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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

2017년 1월 6일

강현실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에게 한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며,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자에게는, 반드시 그 하나님은 아버지로 믿는 이에게 찾아와서, 아들로 여겨 주시고 아버지가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는 아주 가까운 관계, 어떤 관계이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이런 부자지인연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지 100여년이 넘었는데, 많은 부분에서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역사가 일어나고 있느냐 하면, 참하나님은 살아서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내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딸이라는 이 귀한 관계의 인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우리의 마음속에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 라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되고, 나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며 딸이라는 아주 귀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진심으로 하나님은 내 아버지라는 이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때에는, 반드시 살아 계신 그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찾아와서 “내 아들이요, 나의 딸이다”라는 명칭을 쓰실 것입니다.

명칭만이 아니라 정말로 그 하나님은 내 아버지가 되시고, 그 하나님은 내 아버지인 동시에 나는 그의 자녀가 되는, 이런 큰 관계적인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대통령의 아들딸이만 되어도 자랑하는데, 우리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믿고, 모시고, 섬기고, 그대로 우리가 아들과 딸이라는 관계 속에서 산다는 것은 기적 중의 큰 기적인 것입니다.

바라건대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해온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살았던 여러분들이었다면,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귀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형식이나 의식이나 제도나 법에 매여서 믿지 말고, 진심으로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동시에 내 아버지로서 나를 염려하시고, 내 아버지로서 내게 찾아와서 관계적인 인연을 맺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신다면, 믿는 자에게는 믿은 그대로,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딸이 될 수 있는 놀라운 은사가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 마음속에 임재하셔서, 역사하시고, 협조하시고, 도와주시고, 또 그 일생을 그 아버지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여러분들의 일생을 좋은 일이 있어도, 나쁜 일이 있서도, 언제나 간섭해 주시고, 동행, 동사, 동역해 주신다는 것을 믿는 자에게는 큰 축복이 있을지어다! 아멘.

그래서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과 언제나 함께하시는 생활을 하세요. 작은 일을 할 때도, 큰 일을 할 때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고, 그 하나님은 내 아버지가 된다는 이런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살 때에 내가 살고, 내 가족이 살고, 내 모든 형제들이 살고, 미국의 온 시민들이 살 수 있는 길이 반드시 열리게 될 것을 나는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오늘이 무엇보다가도 하나님을 받아들이시는 귀중한 시간이 되고,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믿으시는 귀중한 시간이 되고, 하나님을 여러분들이 모시는 귀한 시간이 되어 주셔서,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서 말씀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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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성전식구님 여러분께

2018년 10월 8일

강현실

사람은 어느 누구 예외 없이 이승에 왔다가 저승에 갑니다. 사대성인, 목사, 장로, 권사, 집사 할 것도 없이, 또 박사, 유명한 철인, 예술가 할 것도 없이 다 저승에 갑니다. 너도 가고, 나도 가고, 이 땅에 생명을 가지고 나온 사람은 다 갑니다. 어떻게 살았냐가 문제입니다. 뜻이 있게, 보람 있게 참삶을 살다가 가느냐가 문제입니다. 생각을 깊게 또 깊이 해야 합니다.

성전 식구님들!

우리는 저 세계에 가서 하나님과 참아버님을 만나야 합니다. 꼭 하나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임을 확인하고 살아야 합니다.

저는 문 선생과 만난지 금년이 66년째입니다. 26세 때 만나서, 지금은 92세입니다. 오래 이 세상에 머물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많이 받았습니다. 참아버님의 기억에도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천지인참부모님과 ‘천주완성축복성혼식’을 천기 8년 8월 4일, 양력 2017년 9월 23일에 올렸습니다. 나는 내외적으로 너무나 부족하여 몸 둘 곳을 모릅니다.

참사랑의 깊이는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부터입니다. 저 밑창까지 포괄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깊은지, 또 긴지, 무거운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기 시작간 근원에서부터 되었기 때문에, 얼마나 크고 긴지 모릅니다. 또 무거운지 모릅니다. 그러하지만 일생동안 살고도 다 거기까지 못가서, 저 세계에서도 그것을 향해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끼리 서로 싸우고, 서로 나누어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깊은 사랑과 인연을 맺었으나, 서로 마음대로 사랑 한번 못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서 “선생님, 사랑합니다!” 했더니, 그 답변은 “사실 내가 강현실을 사랑하는 것이, 현실이 나를 사랑하는 것의 백 배 이상이다”고 하셨습니다. 들어보니 “너무 과장하시며, 거짓말도 섞여 있는 것 같다”고 했더니, 문 선생님은 깜짝 놀라운 표정으로 “나중에 영계에 가면 다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때는 무서워요”.

나는 그때에 “선생님! 나는 영계에 가서도 확인 안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나는 절대적으로, 머리카락 하나 끝만큼도 믿어 왔는데, 왜 마지막을 아버님을 불신하는 자로 남아지면 무서워요. 저 나라 영계에 가서도 확인 아니 하고, 선생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겠습니다”.

“우리 내 현실은 잘 믿는 사람이지. 세상에 제일 가까운 입장에 있어던 이가 나를 저버리고 갔지만, 강현실은 ‘이 진리는 참입니다’ 하면서 나를 위로해 주었던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통일교회를 같이 세운 사람입니다. 학교 퇴학을 맞으면서도 나를 위로해 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분과 제자 사이인데도,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시고, 참아버님이 원하셨었니, 지금은 영원히 반려자가 된 것입니다.

글씨가 안보여서 틀린 것이 많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우리 두 부부는 만국의 만민을 내 백성으로 참으로 사랑하며, 위하여 살며, 하나님께서 처음 지어주셨던 본연의 죄 없는 참된 세계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하시고, 예수님과 영계가 협조하면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믿읍시다! 믿는대로 이루어집니다. 확신과 신념이 지금 이 때에 필요합니다.

막 잘가서 하나님께 드리고 잘 떠나겠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의 마음에,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영계가 여러분에게 오시옵소서.

온 천주가 여러분 안에, 여러분 세상에 있을 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16장33절)라는 말씀을 읽고, 믿고, 실천하세요.

신팔, 신만, 신궁, 신준, 신득, 모두 안녕.

언니 식구들과 아이들, 안녕.

손이 떨려서 못쓰겠어요. 아주.

왕님, 왕비님, 삼대왕권, 가인 아벨, 아버님이 축복하신 대로 이루어지리라. 아주! 아주!

왕님의 통치하시는 모습을 못보아서 섭섭합니다. 아주 잘 하실 것입니다. 태평성대 세상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참부모가.

감사합니다.